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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도발적인 거장, 스즈키 세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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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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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B급영화의 대명사… 장르영화 안에서 시스템의 억압에 저항하다

2월18일부터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은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든다. 스즈키 세이준이 누구지? 회고전이 열릴 정도의 감독이라면, 당연히 영화사에 남을 위대한 거장일 텐데. 일본의 영화감독 중에서 거장을 꼽아보자. 우선 <7인의 사무라이>의 구로사와 아키라, <도쿄 이야기>의 오즈 야스지로, <우게츠 이야기>의 미조구치 겐지가 있다. 이들은 일본영화를 전세계에 널리 알린 위대한 거장들이다. 그들의 다음 세대로는 <감각의 제국>의 오시마 나기사와 <우나기>의 이마무라 쇼헤이가 있다. 현재는 <하나비>의 기타노 다케시를 꼽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스즈키 세이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본의 영화평론가 요모타 이누히코가 “전후 일본영화가 도달한 가장 세련된 미의식과 극도로 바로크적인 정신의 결합”이라는 평을 썼던 <지고이네르바이젠>의 감독 스즈키 세이준은 과연 어떤 감독일까?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설정

<겐카 엘레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즈키 세이준 역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영화사의 한 흐름을 선도한 위대한 거장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 흐름은 철저하게 비주류이고, 또 도발적이고 해괴망측하기까지 하다. 60년대 일본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오시마 나기사가 일본영화의 고답적이고 안일한 선배세대와 직접적인 투쟁을 벌이며 일본영화를 바꿔나간 당사자라면, 스즈키 세이준은 뒤에서 사지절단하고 재구성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일본영화를 일신했다. 도발적이고, 가치전복적이며, 치졸하면서도 감동적인 묘한 영화들을 만든 스즈키 세이준의 이런 미학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B급영화’다.


B급영화라는 말은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지금과 달리 50년대의 미국 개봉관에서는 2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했다. 스타가 출연하고 대규모 제작비를 들여 만든 A급영화를 한편 틀고, 거기에 끼워팔기로 붙는 영화를 흔히 B급영화라 불렀다. 관객은 A급영화의 지명도에 혹해서 오는 것이니, B급영화는 적당히 저예산으로 범죄영화나 공포, SF 등 대중적인 장르영화를 만들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감독에게는 제작비를 초과하지 않는 한 자유가 주어졌고, 그 덕에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새로운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것도 가능했다. 미국에서 B급영화의 전통은 동시 개봉이 사라진 70년대 이후 독립영화로 흘러들었고,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주류가 아닌, 소수 비주류의 문화를 흔히 (마이너 문화라는 뜻에서) B급문화라고 부른다.

일본에서 B급영화의 전통 역시 유서가 깊다. 일찌감치 장르영화가 발달했던 일본은 70년대 들어 소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장르영화 만들기에 몰두했다. 텔레비전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텔레비전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그것을 스펙터클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본의 영화사들은 섹스와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망 포르노나 범죄영화에서 뛰어난 감독들이 많이 탄생했고, 이것은 80년대의 ‘자주영화’ 감독들이 탄생하는 기반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어떤 분야이든 그 영역에서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면 ‘거장’을 인정해주는 풍토이기 때문에 마이너 장르에도 능력있는 감독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하지만 스즈키 세이준은 그들과 다르다. 우선 시대부터가 다르다. 스즈키 세이준이 감독 데뷔를 한 것은 56년작 <항구의 건배>다. 아직 B급영화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스즈키 세이준은 그저 충실하게 장르영화를 만들었다. 스즈키 세이준은 영화공부를 따로 한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영화감독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생계를 위해서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영화사가 요구하는 장르영화를 만들어나가다가 시스템 안에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가난의 문제를 사도마조히즘과 엮어서 독특하게 그려낸 <육체의 문>(1964), 특유의 화려한 영상미가 두드러진 <문신일대>(1965) 등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스즈키 세이준은 <도쿄 방랑자>(1966)로 일약 컬트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도쿄 방랑자>는 일본 전역을 떠돌던 킬러 테츠가 도쿄로 돌아와 야쿠자 조직간의 전쟁에 끼어든다는 이야기다. 여전히 의리의 존재를 믿는 고리타분한 킬러의 방랑을 야쿠자영화의 틀에서 벗어나 뮤지컬,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의 기법을 활용하며 형언하기 힘든 감흥을 이끌어낸다. 67년에 만든 <살인의 낙인>은 스즈키 세이준의 60년대를 마감하는 기념비적인 걸작이면서 영화외적인 이유로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살인의 낙인>은 일본에서 서열 3위인 킬러가 살인청부를 맡으면서 겪게 되는 심적인 혼란과 분열을 그리고 있다.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설정의 이야기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들이 펼쳐지는 <살인의 낙인>은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에서 이탈된 듯한 괴이하면서도 기묘한 느낌을 준다.

비주류를 옹호하는 소수의 힘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선 <살인의 낙인>을 만든 스즈키는 제작사인 닛카쓰에서 쫓겨난다. 흥행이 안 되는 이상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스즈키의 팬과 영화인들이 긴자 거리에서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 결국 법정소송을 벌여 승리했다. 그러나 영화판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70년대에는 텔레비전 각본 등을 쓰며 소일했다. 80년대에 만든 ‘다이쇼 삼부작’인 <지고이네르바이젠> <아지랑이좌> <유메지>는 60년대의 작품 스타일과는 달리 탐미적이며 초현실주의적인 영상을 선보이며 일본의 전통적인 미학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80년대 영화도 훌륭하지만, 스즈키 세이준 특유의 도발적인 미학은 60년대 작품에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오시마 나기사가 <교사형>이나 <일본의 밤과 안개> 같은 작품에서 직접적인 정치적 발언과 투쟁으로 경직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면, 스즈키 세이준은 유희정신과 의도적인 왜곡으로 완고한 현실을 돌파했다. 장르영화를 만들면서, 시스템의 억압과 공식에 시비를 걸고 도발적으로 현실을 전복한 것이다.

스즈키 스타일은 이후 마이너영화와 장르영화의 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분명한 사실은, 스즈키 세이준의 60년대 영화들이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결코 다수의 관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일부 영화팬과 영화인들이 스즈키 세이준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이유도, 어쩌면 바로 그 이유였다. 그것은 일본의 문화 현황과 관계가 있다. 일본사회를 설명할 때 잘 쓰는 것이 ‘2 대 1의 사회’라는 말이다. 일본은 주류가 초강세를 보인다. 어떤 분야이건 선두주자가 전체의 2/3 정도를 휩쓸어버린다. 그러면 나머지 1/3을 수많은 비주류가 나누어 가진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2/3의 주류는 상업적이고 진부하지만 나머지는 엄청나게 다양한 취향의 비주류가 장악하고 있다. 결코 주류는 될 수 없지만, 다양한 비주류 또한 살아남을 수 있는 곳. 그게 일본사회이고, 또 문화다. 스즈키 세이준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의 비주류 정신과 미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소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즈키 세이준이 ‘일본의 거장’을 꼽을 때 첫머리에 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는 비주류의 거장이고, B급문화의 기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그는 시대를 뛰어넘는 거장이 될 수 있었다. B급영화는, B급문화는 주류문화가 부패하지 않도록 방지해주는 유일한 방부제이기 때문이다.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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