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눈부신 사랑과 관능의 찬란함 첫사랑으로 만나 결혼한 남자와 여자는 마흔이 넘어 사랑에 다시 눈을 떴다. 저녁이면 함께 바둑을 두었고 사랑을 나눴다. 사랑을 나누기 전 오늘은 어떤 사랑을 시도할까 속삭였다. 혼곤한 밤을 보내고 나른한 아침을 맞았다. 아침에 달콤히 부은 얼굴을 서로 마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10년 동안의 나날이었다. 그리고 권태가 찾아왔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제 일흔인데, 그 꿈을 꾸고 깨달았어. 내 인생에서 그런 날들은 딱 한 번뿐이었구나. 이후에도 사랑했지만, 혼곤한 밤과 나른한 아침이 세월로 굽이굽이 이어진 사랑은 한 번뿐이었구나. 그 말에 나는 잠시 휘청거렸다. 70년의 세월이 그토록 구체적인 무게로 내 가슴 위로 떨어지듯 내려앉은 순간이 이전에는 없었다. 인간의 삶에 주어진 사랑과 관능의 찬란함은 얼마나 눈부신 것인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아득함으로 눈을 멀게 하는 건 아닌지. 숨을 가다듬고 여전히 지속되는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나는 이어 귀 기울여 들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침없고 다채롭고 관능적이다. 화려하게 짜인 태피스트리처럼 이국적이고 황홀하다. 귀 기울여 듣다보면 눈앞에 정교한 풍경이 펼쳐진다. 언제까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밤이 지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나는 그녀를 홀린 듯이 바라본다. 어느새 창밖은 커다란 어둠으로 가라앉았고 테이블 위로는 촛불이 타오른다. 일렁이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며 창 너머를 바라보는 그녀의 하얀 얼굴에 머무르는데, 그녀가 시선을 돌려 내게 눈을 맞춘다. “서희씨는 다시 결혼할 생각 없어?” “없어요.” 나의 대답은 너무 일렀다. 지나치게 단호했다. 그녀의 웃음이 불빛처럼 번진다. “아직 많은 날이 있잖아. 또 결혼해서 한바탕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단 한 번의 사랑을 한 사람은 단 한 번으로 휘청이지만, 많이 사랑하고 깊이 유영한 사람은 세상이 뭐라 하든 승자가 되는 거야.” 나의 성급함과 어설픈 단호함이 부끄러워 나는 웃는다. 그녀의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든든해 나는 또 웃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되물으며 서성이던 날들 너머 희미한 여명이 비쳐오는 기분이 드는 건 두 번째 와인병도 비어가서 오는 착각이었을까. 이제 막 실연을 겪은 또래 친구와 함께 비아냥거리듯 주고받던, “사랑은 무조건 축복이란다”며 깔깔거리며 주고받던 자조적 농담이 떠올라 나는 등을 곧추세운다. 관계를 이어갈 사정보다 그만둘 사정이 더 많은 것이 사람 사는 일이다. 그럼에도 가꾸고 보살펴야 할 인연이 있음을 알아보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밝은 눈’의 일이다. 풍부한 삶의 경험을 품고 앞서간 시간의 힘을 아는 친구가 주는 조언이 값진 것은, 우리 눈이 어둡고 마음이 두렵고 몸이 귀찮기 때문이다. 소년과 청년의 우정과 사랑 그녀 덕분에 불현듯 눈앞이 밝아지고 두려움이 걷히고 새로운 힘이 혈관을 따라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며칠 전 본 영화 이야기를 들려줬다. 안드레 애치먼이 2007년 출간한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에 대해서였다. 영화는 1983년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서 40일 동안 펼쳐진 혼곤한 사랑 이야기를 담아낸다. 조숙한 17살 소년은 여름을 맞아 그의 가족을 방문한 24살 미국 청년과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두려움과 오해를 지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얼마 남지 않은 숨 가쁜 사랑의 나날이 펼쳐진다. 미처 다 누리지도 못하고 격렬한 이별의 고통 앞에 내던져진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너희 둘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어. 우정 이상일지도 모르지. 난 너희가 부럽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대부분의 부모는 그냥 없던 일처럼 되기를, 아들이 얼른 회복되기를 바랄 거다. 하지만 난 그런 부모가 아니야. 네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통이 있으면 보살피고 불꽃이 있으면 끄지 말고 함부로 대하지 마라. …순리를 거슬러서라도 빨리 치유되기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뜯어내버리면,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하려 할 때마다 줄 것이 별로 없어져버리는 거지. …근접한 적은 있었지만 나는 네가 경험한 걸 얻지 못했어. 언제나 무언가 나를 저지하거나 막아섰지. 네가 삶을 어떻게 사는지는 네 선택이다. 하지만 기억해. 우리의 가슴과 육체는 평생 한 번만 주어지는 거란다. 대부분의 사람은 마치 두 개의 삶을 살 수 있는 듯 살아간다. 하나는 실물 모형의 삶, 또 하나는 완성된 버전, 그리고 그 사이에 온갖 유형이 존재하지. 하지만 삶은 하나뿐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닳아버리지. 육체의 경우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고 더더욱 가까이 오려고도 하지 않는 때가 오고. 슬픔이 찾아오지. 나는 고통이 부럽지는 않아. 그저 네 고통이 부러운 거야.” 영화는 두 젊은이의 우정과 사랑을 중심에 놓았지만, 그 사랑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주는 또 다른 사랑과 우정을 풍경처럼 펼쳐놓는다. 아름다운 청년들의 사랑과 이별, 슬픔을 보살펴주는 것은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너그럽고 현명한 시선과 적절한 눈감음과 때맞춘 다독임이다. 나는 거기서 또 다른 형태의 우정을 본다. 우정은 연인 사이에, 그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피어나는 가장 소중한 기적인지 모른다. 그녀와 만남이 있은 지 며칠 뒤 나는 무더운 이국의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도시의 한적한 카페에서 여행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던 이른 저녁, 인터넷에 접속하자마자 전화가 창백한 알림을 전해왔다. 화면에 한때 익숙했던 이름 하나가 불시착한 우주선처럼 떠 있었다. 옛 연인의 소식이었다. 한바탕 아픈 뒤 자리에서 일어나 오랜만에 안부를 전해온 그는, 내 20대의 절반을 기원전과 기원후처럼 동강 낸 이였다. 전자우편함에는 ‘1990년대 후반, 너와 나’란 제목이 반짝이고 있었다. 첨부파일에 그가 다시 열어본 낡은 상자에서 발견한 그와 나의 흑백 증명사진이 동봉돼 있었다. 난 그 상자를 잘 알고 있기에 가슴이 쩍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오래전, 그가 출근해서 없는 늦은 오전의 아파트에서 큰맘 먹고 뒤져봤던 책장 속 그만의 비밀 상자였다. 나는 거기서 마지막 남은 내 사진 몇 장을 훔쳤고 며칠 뒤 그에게 이별을 선언했다. 내가 이번에 전자우편으로 받은 사진은 뺏고 또 뺏어도 그가 내게 다시 훔쳐내던 사진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그 사진을 자꾸 훔쳤다. 나는 도망가기 위해, 그는 잡아두기 위해. 결국 그가 이겼다. 그는 아직도 그 사진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그때 참 아름다웠어, 그렇지?” 연애하듯 쌓는 우정 과연 그랬다. 그의 섬세하고 눈부신 젊음이 쩍 갈라진 가슴 한구석을 도려내듯 아프게 했다. 눈부신 것은 부서진다. 부서짐은 아프다는 걸 이제야 안다. 죽음 가까이 다가갔다 돌아온 남자는 내게 말했다. 삶의 축복을 누리라고. ‘삶’과 ‘사랑’이 맞닿았듯, ‘live’와 ‘love’ 또한 닮아 있음을 그의 글에서 확인했다. 도처에 부추기는 사람투성이다. 그들 덕택인지 몰라도 나는 아직 봄밤처럼 혼곤히 사랑하고 늦은 아침처럼 나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랑과 우정으로 흥건한 날들이다. 결국, 어떤 형태이든 사랑은 축복이란 말은 옳다. 연애하듯 우정을 쌓는 나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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