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가 어머니를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한 예로 어머니의 머리칼은 갈색인데 리베카는 금발을 가졌다. “딸은 어머니를 줄어들게 하고 쪼개고 무언가를 떼어가지만 아들은 뭔가 덧붙여주고 늘려주는 존재”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대놓고 아들을 편애했다. 아들이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지만, 딸이 봐줄 만한 여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는 치를 떨었다. 어머니는 리베카가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싫어했다. 성별과 외모를 문제 삼았으므로 바꿀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의 분노와 증오를 고스란히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구가 썩어가는 동안, 리베카는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의 파편들을 기억하고 찾아나섰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어머니가 일평생 버림받았다는 분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그러다가도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체 게바라의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에스키모 여인이 추위 속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썼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다시 쓰면서, 그녀는 어머니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해나갔다. 그러던 중 리베카의 몸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이런저런 검사가 이어졌다. 고작 하루 만에 어머니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려서 누군가의 보살핌이 절실했다. 다행히 친구들이 찾아와 그녀를 도왔다. 그녀를 씻기고 먹였다. 누구나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내가 어떤 존재를 낳았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호의였다. 삶의 테마를 결정하는 것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리베카는 살구 앞으로 돌아왔다. 문드러진 것들을 내다버리고 멀쩡한 것들을 골라 잼을 만들고 술을 담근 뒤 문병 온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어머니의 살구는 이제 리베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리베카에겐 임무였을지도 모를 살구가 누군가에겐 달콤한 보상으로 전해졌다. 인생은 멋진 일이 생기고 난 직후에 돌아보면 운이 좋았던 일들의 연속이고, 끔찍한 일이 생긴 뒤에 돌아보면 고난의 연속이다. 리베카의 경우를 보건대, 멋진 일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우리 삶의 주제가 사랑으로 결정하는 것은 호의에 대한 호의일 뿐, 그 이상이 필요하지 않다. 삶의 테마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일 텐데, 내 이야기는 늘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이야기로 귀결될 때, 리베카 솔닛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갈 때, 이야기의 장르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의 처음에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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