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수 누르고 WBC 타이틀 따낸 홍창수의 외침 “조국은 하나다!”
총련계 재일동포 홍창수(26·일본이름 도쿠야마 마사모리)는 지난 8월27일 일본 오사카 부립체육관에서 열린 세계권투평의회(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 매치에서 한국의 조인주(31·풍산체육관)를 판정으로 누르고 챔피언에 오른 뒤 관중석을 향해 “조선은 하나다. 조선은 하나다”를 외쳤다.
부모 품 박차고 프로의 길로
홍창수는 총련계 재일동포 3세. 아버지 홍병유(67)씨와 어머니 권민자(57)씨는 각각 경남 고성과 합천이 고향이다. 홍창수는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해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성격도 밝고 쾌활하다. 한편으로 젊은 시절 방황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 공인들이 ‘한국계’라고 밝히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는 것과는 달리 떳떳이 ‘조선인’이라고 밝혔다. ‘조선적’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한다.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부모는 젊은 시절부터 총련에서 활동했다. 홍씨와 권씨는 총련 도쿄지부 부회장을 맡으면서 재일동포 사이에선 꽤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계 타이틀 매치전에서 조국을 ‘조선’이라고 당당히 밝힌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가라테 총련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젊은 시절 가라테를 통해 스포츠에 대해 남다른 이해를 지니고 있는 아버지 홍씨는 홍창수가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시절 취미삼아 복싱을 배우겠다고 하자 흔쾌히 허락했다. 어머니 권씨는 “창수가 복싱을 배우겠다고 해서 기뻤다. 젊은 시절 운동은 정신을 밝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홍창수가 차츰 복싱에 빠져들어 18살 때인 94년 직업선수가 되겠다고 하자 부모는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어머니 권씨는 “취미삼아 운동을 하는 것은 몰라도 프로복싱은 원치 않았다. 가족 모두가 무척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프로복싱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홍창수는 부모의 품을 박차고 오사카에 둥지를 틀었고 이때부터 본격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부모의 반대 때문에 빈털터리로 거리에 나선 홍창수는 식품점을 돌며 점원 생활을 했다. 방황도 많이 했다. 복싱선수에겐 금기시되는 술도 들이켰다. 그런 과정 속에서 승수를 쌓았고 96년부터는 일본 프로복싱계에서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부모가 그토록 말리던 프로복싱을 허락한 것도 이때였다. 홍창수의 형이 나서 부모를 간곡히 설득한 것도 한몫 했다. 홍창수는 이때부터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복싱에만 전념했다. 불이익 감수하고 내 조국을 알리겠다
세계 챔피언의 꿈도 이때 갖게 됐다. 아버지는 적극적이었다. 아들을 챔프로 만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2년 동안 가출한 아들이 직접 돈을 벌며 운동을 한 것을 대견스럽게 여긴 아버지는 오사카 가네자와체육관에서 운동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75년 미들급 세계 챔피언을 지낸 유제두 등 한국선수와 현역 시절 4차례나 경기를 가진 가네자와 관장은 자신이 못다 이룬 세계 챔피언의 한을 홍창수로 하여금 풀려고 조인주 도전을 성사시켰다.
홍창수는 96년 가을 재일동포 3세인 최인숙(26)씨를 친구 소개로 만났다. 최씨는 민단가정 출신으로 한국 국적. 부모로부터 “결혼만큼은 조선인끼리 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은 홍창수는 첫눈에 반해 뜨겁게 사랑했다. 당시 은행에서 일하던 최씨는 홍창수가 지난해 동양타이틀에 오르자 은행을 그만두고 뒷바라지만 했다. 세계타이틀 한달 전부터는 홍창수가 홀로 사는 아파트에 머물며 궂은 일을 다했다. 홍창수는 챔피언이 된 뒤 “약혼자다. 마음이 착하고 편안하다”고 자랑했다.
홍창수는 방랑기도 많다. 시속 최대 50km밖에 낼 수 없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여행을 하고 오사카 인근을 밤새 걷는 등 기행을 했다. 이 때문에 최씨는 애간장이 탔지만 그럴 때마다 홍창수를 감싸안아 복싱에 전념케 했다. 홍창수는 오는 12월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밝혔다.
홍창수의 국적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북한 복서로서는 처음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홍창수는 북한 국적도 아니고 북한 출신으로 처음 세계 타이틀 매치에 오른 것도 아니다. 홍창수의 국적은 ‘조선적’이다. 일본 당국은 지난 1948년 외국인등록법을 만들어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하면서 일본땅에 남아 있던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분류하고 이들에게 모두 ‘조선적’을 부여했다. 지난 65년 한-일수교 뒤 조선적 가운데 남쪽과 가까운 동포는 ‘조선적’을 ‘한국 국적’으로 바꿨고 그렇지 않은 동포들은 그대로 ‘조선적’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는 ‘한국적’과 ‘조선적’만 있을 뿐이지 ‘북한 국적’이나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국적’은 없다. 홍창수는 조선적이다. 일본과 북한은 수교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북한 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홍창수는 조선인 국적의 재일동포인 것이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도 홍창수가 챔피언이 된 뒤 “총련계 재일동포 홍창수”라고 밝혔다. 국적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하지 않았다.
다케하라 신지는 98년 세계복싱협회(WBA)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아시아 선수로는 가장 무거운 체급에서 챔피언이 돼 화제가 됐다. 그는 조선적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조선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리고 있다. 심지어 조선족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를 잘 아는 일본인들은 그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언론은 홍창수가 조선 국적을 밝히고 세계 타이틀 매치에 나서 챔피언에 오른 최초의 조선적 선수라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불이익도 감수해야 했다.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 타이틀 매치로서는 보기 드물게 TV가 중계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수입도 줄어들었다.
판문점에서 경기를 갖고 싶어
하지만 총련동포들의 열렬한 후원이 있었다. 경기장에는 일본 각지에서 4천여명의 총련동포들이 몰려 들었다. 홍창수가 다니던 조선중고급학교 출신 600여명이 도쿄에서 오사카로 몰려와 응원했다. 재일본조선청년동맹 오사카 농악대는 경기 시작 2시간 전부터 북과 꽹과리를 치며 장단을 펼쳤다.
홍창수가 “조선인”이라고 떳떳이 밝힌 이유는 강한 민족심 때문이다. 그는 한국선수와 판문점에서 경기를 갖는 게 꿈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여건이 되면 평양에서 한국선수와 게임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타이틀 매치 때 입은 트렁크에도 이런 의지를 표시했다. ‘ONE KOREA’란 자수를 직접 트렁크에 새겨넣은 것이다. 세계 타이틀전 포스터에도 ‘38선은 없다’ ‘소원은 통일’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홍창수는 22승(5KO승)1무2패를 기록하고 있다. 챔피언감은 아니라는 게 복싱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가였으나 이런 예상을 깨고 ‘무패의 복서’ 조인주를 꺾고 챔피언이 됐다. 홍창수는 “한번 싸워 2승을 올렸다”는 그의 말처럼 세계 챔피언이 됐을 뿐 아니라 재일동포 사회에서 민족영웅으로 거듭 태어났다. 남북화해시대에 걸맞은 스포츠스타, 홍창수의 앞날이 기대된다.
강영기/ 스포츠서울 기자

(사진/지난 8월27일 WBC타이틀 매치에서 승리한 홍창수가 한반도기와 인공기를 들고 관중의 환호에 답례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부모는 젊은 시절부터 총련에서 활동했다. 홍씨와 권씨는 총련 도쿄지부 부회장을 맡으면서 재일동포 사이에선 꽤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계 타이틀 매치전에서 조국을 ‘조선’이라고 당당히 밝힌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가라테 총련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젊은 시절 가라테를 통해 스포츠에 대해 남다른 이해를 지니고 있는 아버지 홍씨는 홍창수가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시절 취미삼아 복싱을 배우겠다고 하자 흔쾌히 허락했다. 어머니 권씨는 “창수가 복싱을 배우겠다고 해서 기뻤다. 젊은 시절 운동은 정신을 밝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홍창수가 차츰 복싱에 빠져들어 18살 때인 94년 직업선수가 되겠다고 하자 부모는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어머니 권씨는 “취미삼아 운동을 하는 것은 몰라도 프로복싱은 원치 않았다. 가족 모두가 무척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프로복싱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홍창수는 부모의 품을 박차고 오사카에 둥지를 틀었고 이때부터 본격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부모의 반대 때문에 빈털터리로 거리에 나선 홍창수는 식품점을 돌며 점원 생활을 했다. 방황도 많이 했다. 복싱선수에겐 금기시되는 술도 들이켰다. 그런 과정 속에서 승수를 쌓았고 96년부터는 일본 프로복싱계에서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부모가 그토록 말리던 프로복싱을 허락한 것도 이때였다. 홍창수의 형이 나서 부모를 간곡히 설득한 것도 한몫 했다. 홍창수는 이때부터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복싱에만 전념했다. 불이익 감수하고 내 조국을 알리겠다

(사진/조인주 선수에게 펀치를 날리고 있는 도전자 홍창수)

(사진/지난 8월26일 시합전 가진 조인식에서 상대 조인주와 함께 한반도기를 들고 어깨동무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