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의 태평양 전쟁 당시 만행을 폭로한 <히로히토-신화의 뒤편>
지난달 중순 개봉한 일본영화 <호타루(반딧불)>는 1989년 히로히토 천황이 숨진 시점에서 시작한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의 과거를 오가며 진행되던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가미카제 특공대원과 그 가족이다. 어부 야마오카는 특공대로 출격했다가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고 귀환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가슴 한쪽에 묻어두고 지내는데, 당시 상관이던 조선 학도병 출신의 가네야마 소위가 사랑했던 일본인 약혼자 도모코를 아내로 두고 있다. 야마오카는 히로히토의 죽음과, 중병으로 생이 얼마남지 않은 아내를 계기삼아 안동으로 찾아온다. 가네야마 소위가 출격 직전 자신에게 남겼던 유언을 ‘조선인 가족’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다. 이 영화는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염원하는 작품으로 소개됐지만, 다분히 일본식이다. 가네야마 소위가 떳떳하게 출격하며 남긴 말은 일본과 조선을 같은 편으로, 연합군을 적으로 삼는 대동아공영권에 명분을 두고 있다. 히로히토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노년의 특공대원들이 짓는 표정이나 화면의 정서는 깊은 회한과 비통함이다. 심지어 그중 한명은 천황의 뒤를 스스로 좇아간다.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과 주연배우 다카쿠라 겐은 <철도원>으로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이들이다. <철도원>에서도 묵묵히 일본의 한 모퉁이를 지켜온 노인의 과거에 대한 향수와 고집이 배어 있었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원작자인 영국 언론인 에드워드 베르가 히로히토의 쇼와시대가 막을 내리던 1989년 출간한 <히로히토―신화의 뒤편>(유경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을 통해 이런 일본의 독특한 정서를 새롭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권력의 핵심부에는 서구식 자유주의 분위기가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1930년 군비감축조약에 합의하고 해군의 예산을 삭감한 하마구치 총리의 암살을 시작으로 ‘순수의 시대’는 끝을 맺는다. 여기에는 하나회 같은 군부의 비밀결사 벚꽃회와 명성황후 시해에도 관여한 우익집단 흑룡회가 이 사건에 깊이 관련됐다. 이어 1932년에는 군비 증액에 반대의사를 표명한 대장성 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 국제연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다쿠마 남작, 이누카이 총리 등이 차례로 암살당한다.
역사의 희생양?
그리고 살인자들은 이들의 정치적 신념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 덕분에 대체로 자유의 몸이 되고, 일본은 착실히 군국주의의 아성이 되어간다. 이런 모습은 패망 직후 기묘하게 급변한다. 히로히토의 종전 선언을 낭독하는 ‘옥음’(玉音)이 라디오로 방송된 1945년 8월15일 정오 직후의 풍경에 대해 일본의 세계적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는 이렇게 말한다.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걸어 집으로 돌아갈 때의 거리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백만인 옥쇄’를 주장할 것으로 알았는데 다른 대안이 나오자 색다른 반응을 보였다. 천황이 막상 백만인 옥쇄를 주장했더라면 다들 따랐을 것이고, 나도 그랬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 주장을 부도덕한 행위로 알고 있었던 반면, 자기 희생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의무로 알고 있었다. 모두들 이런 가르침에 익숙해 있어서 어느 누구도 감히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적성국 외국인들과 함께 구금되어 있던 로배르 길랭이란 이는 옥쇄를 각오했던 일본인들이 특유의 미소로 얼굴을 싹 바꾸던 극적 변화를 목격했다. “그렇게 못살게 굴던 경찰들이 모든 외국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친절한 태도로 도와주기 시작했다. 민간인 방위조직의 간부들도 외국인들에게 정종과 새로운 옷을 선물했고, 외무성 관리들은 외국 대사관을 탐방하여 전시 때는 완강하게 거부했던 전쟁 포로 수용소의 방문을 적극 권유하기도 했다.”
이처럼 종전 전후로 일어난 일본의 표변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게 히로히토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더불어 세계 2차대전을 일으킨 전범 가운데 한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는 군부의 강경파에 떠밀린 역사의 희생양으로 미화돼 전범 재판에서 완전히 ‘열외’된 뒤 ‘타고난 평화주의자’로 연민과 사랑의 대상이 됐다. 이 책의 목표는 히로히토가 평화주의자의 가면 뒤로 온갖 만행을 저지른 태평양 전쟁의 실질적 지휘자였음을 밝히는 일이다. 평화주의자에 대한 암살이 횡행하던 1930년대로 돌아가보자. 생후 70일 만에 생모와 격리돼 황실의 특별교육을 받으며 서구식 생활방식에 길들여진 히로히토는 군부 강경파와 극우주의자에게 포위돼 있음직하다. 그러나 1936년 일어난 2·26 폭동에 대한 히로히토의 대응은 사태가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히로히토는 자신을 정점으로 한 군사독재를 꿈꾸며 내각을 향해 총을 든 일부 장교들을 단호한 태도로 진압해버린다. 이후 중국과 동남아 침략, 진주만 기습의 최종 결정권자로서 모든 세세한 사안에 관여한다. 이를 증명해가는 작업에서 베르는 히로히토의 수석비서관 격인 옥새관 기도 고이치가 남긴 ‘기도일기’와 스기야마 하지메 장군이 육군 참모총장 시절 각종 회의내용을 기록한 ‘스기야마 메모’를 요긴하게 사용한다.
각색의 주역은 맥아더
태평양 전쟁 당시 총리이던 도조 히데키가 전범 재판에서 “우리 일본인들 중 감히 어느 누구도 천황의 뜻에 반하여 행동할 수가 없다”라고 증언한 것처럼 A급 전범임이 명백한 히로히토를 평화주의자로 각색시킨 주역은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다. 맥아더는 “만약 천황을 구속한다면 우리의 점령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며 합동참모본부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행정상의 혼란, 게릴라전의 발생 가능성, 자생적인 공산주의가 잉태할 수 있는 위험과 추가병력의 필요성을 부각시켜 히로히토의 기소 움직임을 저지시켰다. 이건 해방 직후 친일파를 대거 등용한 미군의 행태를 떠올리게 한다. 전범 재판을 “실질적으로 삼류 코미디로 만든” 맥아더의 행태는 생체실험으로 악명높은 731부대의 이시이 장군과의 거래에 이르면 아주 노골적이다. “맥아더가 731부대의 자료를 챙기는 대신 이시이에게 면죄부를 주기로 합의했다. 맥아더에게서 이시이를 기소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 이 거래의 중간다리 구실을 했던 샌더스 대령의 증언이다.
<히로히토―신화의 뒤편>은 500쪽이 훨씬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히로히토 개인에 대한 세밀한 증언과 묘사,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계획 같은 크고 작은 사건들, 쇼와시대를 수놓은 주요 인물들의 극적인 등장으로 흥미를 더해가는 다큐멘터리 역사서로 손색이 없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최신 발명품에 관심이 많던 히로히토가 공습에 대비해 만든 거대한 음속 탐지기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태평양 전쟁 중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그는 전범 재판에서 "어느 누구도 천황의 뜻에 반하여 행동할 수 없다"고 증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