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앨범 들고 돌아온 봄여름가을겨울…쇠락을 경험한 불혹의 나이, 불혹의 음악
올 초 발매된 봄여름가을겨울의 신보를 받아들고, 순간적으로 “어” 하는, 요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놀라움만도, 반가움만도 아닌 이 감탄사의 정체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거기에는 묘한 비현실감이 섞여 있었다. 이를테면, 유명인인 줄 알고는 있었지만 전기료, 수도료 이야기하며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옆집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화려하고 거대한 무대에 주인공으로 복귀한 모습을 응시할 때 느낄 법한 당혹스러움과 낯선 감정.
“우리는 여전하다”
96년 6집 앨범 발표 뒤 새 앨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나오기까지 이들은 햇수로 6년이라는 공백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김종진, 전태관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거의 매주 라디오 방송에 게스트로 나와 독자들의 사연을 읽으며 디제이와 수다를 떨었고 청취자들과 함께 낄낄거렸다. 너무 오랫동안 그들의 재치있는 말솜씨에 익숙해져버려서일까. 아니면 4집 앨범 이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어간 봄여름가을겨울 음악의 인기 때문일까. <브라보…>를 플레이어 위에 올려놓는 순간, 한국 대중음악의 ‘아티스트’ 시대를 열어젖혔던 80년대가 플래시백되면서 당시 그 견인차였던 동아기획사단의 멤버 봄여름가을겨울이 퍼뜩 떠오른다. <브라보…>는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그들의 초창기 음악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요절한 김현식의 백밴드로 출발, 88년 데뷔작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로 우리 음악에 퓨전재즈 또는 퓨전록이라는 새로운 줄기 하나를 보탠 봄여름가을겨울이 “우리 여전하다고”라고 말하듯 10년 전 모습 그대로 다시 서 있는 것이다.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우면서도 쑥스럽고, 낯설지만 친근하다.
“그냥 백수였어요. 가끔 여행도 다니고, 주식도 하고. 벌었냐고요? 말아먹었죠. 잘됐으면 음반이 좀더 빨리 나왔으려나.” 놀면서 음악생각은 별로 안 하고 지냈다. 6집을 낸 다음 고갈됐다, 말라버렸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데뷔 뒤 8년 동안 1년이나 1년 반 정도의 간격을 두고 새 음반을 내면서 달려왔던 게 결국 음악적 감성의 작동 중단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 4집부터 이어진 상업적 실패도 이들의 침체와 무관하지 않았을 터. 그냥저냥 빈둥거리고 이따금씩 방송에 나가 유쾌한 수다도 떠는 이들 모습이 밖에서는 한없이 느긋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일상”을 연출하는 장본인들의 속이야 편할 리 있었을까. “밴드 만들고 1집 낼 때까지 겪었던 것과 아주 비슷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어요. 86년에 백밴드 결성된 지 얼마 안 돼서 김현식씨가 마약사범으로 음악활동을 중단했죠. 1집 준비할 때는 멤버들이 속속 빠져나가고, 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공포감 같은 게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랬죠. 다시 음악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머릿곡이자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컨셉인 <브라보…>의 그림이 그려진 건 99년 초. “구겨진 회색양복에 넥타이를 맨 직장인이 강북에서 한강 남쪽을 쳐다보면서 담배를 한대 물고 있어요. 뉘엿뉘엿 지는 해를 등지고 툭툭 털고 일어서서 집으로 향해 추적추적 걸어가는데 그 앞에는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죠. 머릿속에 그려진 그 모습에서 멜로디가 나왔어요.” 직장생활 한번 안 해본 사람들이 어떻게 직장인들의 애환을 알겠냐고 반문했더니 “음악하는 삶은 팍팍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의지할 선배는 거의 없고, 후배들한테는 퇴물취급을 받죠. 이 나이가 되면 다들 비슷한 강도의 쓴맛을 경험하게 되는 거 아닌가요?” 하고 대답한다. 동갑내기로 이십대 초반에 만난 그들도 이제 나이 마흔인 것이다. 불혹의 나이를 맞은 소회. 김종진씨가 “젊었을 적 욕심내던 게 지나가보니 별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고 다 부질없이 느껴진다”며 혹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전태관씨가 딴죽을 건다. “여전히 좋은 것 보면 먹고 싶고, 좋은 옷 보면 입고 싶죠. 세상에 유혹이 좀 많나요?” 그러나 음악생활에서 불혹의 나이가 주는 변화는 그도 감지한다. “예전에는 드럼 테크닉을 좀더 돋보이게 하려고 궁리하고 연습했는데 이제는 옛날 음악의 단순한 리듬이 더 좋아져요.” 김종진씨가 짓궂게 받아친다. “맞아. 이번 음반에서는 완전히 불혹이더만.” 테크닉 대신 단순함을
<브라보…>에서 화려한 스케일이나 테크닉이 줄어든 건 나이와 세월에 대한 이들의 감지와 이어져 있다. “6집까지 우리가 추구해온 건 좀더 구체적으로, 좀더 또렷하게 이런 거였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블러링(음의 포커스를 흐트리는 것)을 하게 되더라고요. 의도적인 건 아니었는데 우리 삶이 명쾌하거나 단단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음악도 그렇게 변한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쌓으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느날 문득 많은 걸 버려야 하는 걸 깨닫는 나이, 숨가쁘게 달려온다 싶었는데 어느날 문득 자신이 많이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나이의 동세대, 그리고 자신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브라보…>다.
이들은 앨범의 곡 일부를 헝가리의 고성에서 녹음했다. 뮤직비디오도 부다페스트에서 찍었다. 처음에는 가격대비 생산성을 따져서 차선책으로 헝가리행을 결정했지만 현장에 가보니 헝가리는 자신들의 처지와 닮은 구석이 아주 많은 곳이었다고. “한때는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쇠락했고, 여전히 미래는 불안하지만 새 출발을 하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지금의 우리 이미지와 비슷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자신의 쇠락이나 실패를 변명이나 합리화 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마흔이라는 나이와 무관하지 않을 게다.
그러나 요즘 그들은 혹(惑)하고 있다. 음반이 나오자마자 1월 둘쨋주 라디오 방송 순위 1위에 오르면서 음반에 대한 반응이 5, 6집 때와 달리 예사롭지 않게 감지되고 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두 사람은 “야, 우리가 1등을 다 해보네” 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하기도 했다. 물론 god 같은 아이돌 스타와 판매량 경쟁을 할 수는 없겠지만 20∼30대층의 음반시장이 지나치게 얇은 국내 대중음악 시장에서 그들의 이번 앨범은 분명 단비 같은 선물이다.
공연 준비로 땀 흘리는 나날들
요즘 봄여름가을겨울은 공연 연습으로 부산하다. 오는 2월1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앨범발매 기념공연을 준비한다. 지난해 12월31일 공연이 기획사의 문제로 갑자기 취소됐던 터라 이들은 불안함에 조급함이 뒤섞인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거기다 팬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원래 서울 하루만 잡혔던 공연도 제주도, 대구시, 경기도 의정부로 넓혀 3월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종진이가 마흔 되니까 기억력도 떨어지고 몸을 사려요. 노친네처럼. 실은 그게 우리 팀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고 있어요.” 평소에 주로 방어로 대응하던 전태관씨가 모처럼 한방 날렸다. 김종진씨의 응수를 기대했는데 대답이 의외로 싱거웠다. “맞아. 안 그랬으면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다 아마 폭발해버렸을 거야.” 초고속 열차에 대한 매혹에서 빠져나와 주변의 풍경을 안고 함께 가는 완행열차의 미덕을 알게 된 봄여름가을겨울. 이들의 계절은 이제 전보다 더디게 지나갈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꽃과 따사로운 햇살, 서늘한 바람으로 좀더 풍성해질 것 같다(공연문의: 02-3775-3862).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이제는 옛날 음악의 단순함에 더 끌린다"는 전태관(왼쪽), 김종진(오른쪽)씨.(김종수 기자)
“그냥 백수였어요. 가끔 여행도 다니고, 주식도 하고. 벌었냐고요? 말아먹었죠. 잘됐으면 음반이 좀더 빨리 나왔으려나.” 놀면서 음악생각은 별로 안 하고 지냈다. 6집을 낸 다음 고갈됐다, 말라버렸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데뷔 뒤 8년 동안 1년이나 1년 반 정도의 간격을 두고 새 음반을 내면서 달려왔던 게 결국 음악적 감성의 작동 중단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 4집부터 이어진 상업적 실패도 이들의 침체와 무관하지 않았을 터. 그냥저냥 빈둥거리고 이따금씩 방송에 나가 유쾌한 수다도 떠는 이들 모습이 밖에서는 한없이 느긋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일상”을 연출하는 장본인들의 속이야 편할 리 있었을까. “밴드 만들고 1집 낼 때까지 겪었던 것과 아주 비슷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어요. 86년에 백밴드 결성된 지 얼마 안 돼서 김현식씨가 마약사범으로 음악활동을 중단했죠. 1집 준비할 때는 멤버들이 속속 빠져나가고, 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공포감 같은 게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랬죠. 다시 음악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머릿곡이자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컨셉인 <브라보…>의 그림이 그려진 건 99년 초. “구겨진 회색양복에 넥타이를 맨 직장인이 강북에서 한강 남쪽을 쳐다보면서 담배를 한대 물고 있어요. 뉘엿뉘엿 지는 해를 등지고 툭툭 털고 일어서서 집으로 향해 추적추적 걸어가는데 그 앞에는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죠. 머릿속에 그려진 그 모습에서 멜로디가 나왔어요.” 직장생활 한번 안 해본 사람들이 어떻게 직장인들의 애환을 알겠냐고 반문했더니 “음악하는 삶은 팍팍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의지할 선배는 거의 없고, 후배들한테는 퇴물취급을 받죠. 이 나이가 되면 다들 비슷한 강도의 쓴맛을 경험하게 되는 거 아닌가요?” 하고 대답한다. 동갑내기로 이십대 초반에 만난 그들도 이제 나이 마흔인 것이다. 불혹의 나이를 맞은 소회. 김종진씨가 “젊었을 적 욕심내던 게 지나가보니 별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고 다 부질없이 느껴진다”며 혹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전태관씨가 딴죽을 건다. “여전히 좋은 것 보면 먹고 싶고, 좋은 옷 보면 입고 싶죠. 세상에 유혹이 좀 많나요?” 그러나 음악생활에서 불혹의 나이가 주는 변화는 그도 감지한다. “예전에는 드럼 테크닉을 좀더 돋보이게 하려고 궁리하고 연습했는데 이제는 옛날 음악의 단순한 리듬이 더 좋아져요.” 김종진씨가 짓궂게 받아친다. “맞아. 이번 음반에서는 완전히 불혹이더만.” 테크닉 대신 단순함을

사진/ 6년만에 내놓은 7집 발매공연이 지난 12월 말에서 오는 2월16일로 미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