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아시아는 있는가

396
등록 : 2002-02-06 00:00 수정 :

크게 작게

문화 |동아시아의 정체성

‘동아시아 문화공동체 포럼’을 통해 본 동아시아 공통의 정체성 탐구

사진/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자본의 연대 아닌 아래로부터의 민중연대에서 새로운 동아시아를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이용호 기자)
우리는 모두 ‘동아시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서구 근대에 대한 비판의식이 확산되면서 동아시아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새로운 정체성의 구현 공간으로서다. 서구식 근대화에 대한 일방적 강요 속에서 야만과 봉건, 낙후성의 대명사로 전락했던 동아시아의 의미를 새롭게 탐구하려는 시도도 크게 늘고 있다. 최근 거셌던 ‘한류’ 바람은 한국이 동아시아적 정체성의 형성을 주도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과 함께 한국 문화산업의 상업적 해외진출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추기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지역연대


그러나 과연 지금 동아시아에 공통의 정체성을 ‘상상’할 만한 역사와 문화적 자원이 존재하는가. 동아시아는 과거 그랬듯이 지금도 하나의 문명단위로 소통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여전히 커다란 불확실성의 여백을 남겨두고 있다.

2월1∼3일 서울 성공회대학교와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에선 ‘동아시아 문화공동체 포럼’(대표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주최로 현 단계 동아시아 담론의 의미를 점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신영복 교수와 백원담 교수 등 성공회대 중심의 진보적 소장학자들이 주축이 돼 꾸린 이번 토론회엔 왕후이 중국 사회과학원 교수와 첸쾅신 대만 청화대 교수,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 등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과 연대성의 문제를 천착해온 한·중·일·대만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이 대거 참가해 동아시아의 문화적 회통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신자유주의하 동아시아의 문화적 소통과 상생’이라는 주제는 이번 토론회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참가자들은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자본의 광풍에 맞선 지역연대로서 새로운 동아시아를 ‘상상’하자는 데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왕후이 교수는 “아시아 범주는 서구에 의해 서구의 타자로 제기되는 과정에서 극심한 왜곡을 겪었다”며 “유교자본주의 등의 아시아 담론들도 서구 중심의 발전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에 대한 대안을 담아낼 수 있도록 아시아의 개념을 새롭게 상상하자고 그는 주장했다.

이번 토론회를 조직한 백원담 교수는 아래로부터의 민중연대에서 새롭게 동아시아적 정체성을 상상할 자원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는 “아세안+3 등의 구상에서 보이듯 그동안 동아시아 연대는 미국 패권에 맞서 동아시아 자본간의 연대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의 수준에 머물렀다”며 “그러나 과거 역사는 이미 민중 사이에 반식민지와 반서구의 다양한 연대활동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중국의 반제국주의 투쟁, 일본의 평화운동 등 아래로부터 이뤄졌던 연대의 역사들을 동아시아적 전통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한 한 문화적 계기로서 한류에도 주목했다. “비록 한류가 문화자본의 산업적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이긴 하지만, 동아시아 민중 사이에 서로를 알아가는 새로운 만남의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류… 만남의 계기

그러나 이러한 동아시아 정체성의 형성을 향한 다양한 가능성의 모색에 대해선 여전히 커다란 난점들이 제기됐다. 첸쾅신 교수는 “하나의 동아시아를 특권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동아시아 담론 또한 미국에 의해 한줄로 꿰인 동아시아의 문화적 준거틀을 다양화하기 위한 하나의 참고자원으로서만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9·11 테러 직후 프랑스의 <르몽드>는 “우리는 지금 모두가 뉴욕시민”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반인륜적 테러행위에 대해 인류구성원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분노와 슬픔’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 전체의 보편적 느낌보다 서구문명의 동질성에 대한 느낌을 먼저 감지한 이들도 없지는 않았을 터이다. 이들이 미군에 맹폭당한 베트남 민간인들의 무고한 떼죽음 앞에서 “우리는 지금 베트남 인민”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토론회는 동아시아인들에게 그 정도의 연대감조차 만들어가야 할 과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