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가사키>의 온전한 첫 문장은 이렇다. “아주 일찍, 사는 일에 크게 실망하고 나가사키 변두리의 제멋대로 생겨먹은 거리, 작은 빌라에서 살아가는 오십 대 남자를 상상해보라.” 시무라 고보를 상상하기 전에, 나가사키에 사는 사람들을 먼저 떠올려야 했다는 걸, 나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았다. 1950년 전후에 태어나 여전히 나가사키에 사는 사람들, 시무라가 그러하고, 시무라의 집에 숨어 살던 여자가 그에 속한다. 기상관측사가 아니더라도 수시로 하늘을 살피고 집 밖의 기척에 귀 기울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여자에게 나가사키는 “어느 8월9일에 여러 조상들이 죽고 다시 생겨난 세상”이다. 매미 울음이 온종일 이어지고 간간이 우라카미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고 그보다 드물게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지는 나가사키의 한낮. 1945년 8월9일, 그날의 나가사키도 무더운 한여름이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리는 대축일이어서 우라카미 성당에는 수많은 신도가 모였다. 성당에서 700m 남짓 떨어진 곳,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더 많은 사람이 피폭으로 죽어갔다. 수많은 집이 무너졌다. 여자의 가족은 살던 집을 떠나 변두리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여자가 여덟 살 때의 일이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세상 위로 난 발코니가 있는 방, 그가 세례를 받은 성당이 내려다보이는 방. 여자는 시무라 이전에 그 집에 살던 사람이었다. 원폭으로 잿더미가 된 도시가 재건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어른이 되었다. 그 집을 떠나던 날, 여자는 고아가 되었다. 가엾은 도둑이 되어 그 방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여자는 원자폭탄을 투하한 나라를 증오하며 실패의 이력을 쌓았다. 증오도 피폭의 부작용일까.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는 고통은 나날이 커졌다. 쉰여덟 살의 실업자. 편의점 쓰레기통을 뒤져 근근이 끼니를 잇는 노숙인. 나가사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여자는 그 집이 자기를 기억한다고 믿었다. 여자의 말처럼 집이 사람을 기억한다면, 도시 또한 그러할까. 여자가 돌아온 뒤, 시무라는 “도무지 내 집에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떠났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 얼마나 돌아가기를 원할까. 한 예로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있다가 간신히 살아난 수만 명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여전히 피폭의 고통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나가사키>의 저자, 에릭 파이는 프랑스인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시무라 고보를 상상하라 했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은 더 이상의 상상을 거부할지 모르겠다. 대신 그들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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