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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선택하는 삶을 살라고!

재혼하고 다시 부부관계가 삶의 중심이 된 엄마에게 딸이 건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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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20 17:57 수정 : 2017-11-2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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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데브라를 처음 만난 것은 대략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할리우드에 자리잡은 바에서 열린 파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금발의 파란 눈에 날씬한 몸매, 화통하면서도 다정한 매너가 어디에 있든 그를 돋보이게 했다. 대화하면서 우리는 비슷한 나이와 비슷한 시기에 첫딸을 얻었음을 알게 됐다. 꼬마 때부터 얼굴을 마주한 내 딸과 데브라의 딸은 곧 고등학생이 되는데, 세상에 둘도 없는 친한 친구다. 둘째딸들도 같은 학교를 다니는 가까운 친구다. 데브라와 나로 말하자면 적절히 도움을 주고받는 고마운 관계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감은 넓고 편안하다. 그는 학부모회에서 주역이 되어 학교 행사를 도맡아 꾸리는 등 언제 어디든 적극적으로 나서서 계획하고 활동하는 반면, 나는 최소한의 활동으로 해야 할 일만 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걸 선호하는 등 드러나는 성향도 참 다르다.

설교 중 예배당 빠져나온 엄마와 딸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고돼도 달콤했던 육아 생활에 급격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대륙에서 분리되는 섬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요동침은 우리의 존재마저 뒤흔들었다. 재작년 어느 아침, 학교에서 마주친 데브라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끔찍한 아침을 보냈어. 나쁜 것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였다니까.”

잠시 차라도 같이 마시자는 데브라의 제안에 우리의 대화는 조금씩 길을 열어갔다. 그리고 단순하고 열정적이며 훌륭해 보이기만 했던 한 미국 백인 여성의 삶이 내가 짐작했던 것만큼 평탄하지는 않음을 차츰 깨달아갔다.

데브라가 거슬러 올라가는 인생의 맨 처음 전환점은 5살 무렵 엄마 손을 잡고 교회를 성큼성큼 걸어나온 기억이었다. 텍사스주의 작은 시골마을, 보수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데브라는 태어나 자랐다. 그의 엄마 역시 그랬고, 두 언니도 그랬다. 엄마는 누구보다 평범한 가정에서 충실한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을 따르는 삶을 살려 했다. 그러나 데브라가 생후 18개월 때 가족이 함께 간 캠핑에서 아빠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었다. 아빠는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딸들은 물론 아내도 알아보지 못했다. 어린아이 셋을 키우면서 기억이 백지 상태가 된 남편을 돌보는 일은 엄마 혼자 감당하기에 터무니없이 버거웠다. 결국 그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했고, 3년 후엔 이혼을 결정했다. 아빠를 보여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요양원을 방문하는 일은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순종적이며 가정적인 아내의 일생을 꿈꾸었던 데브라의 엄마는 웨이트리스부터 비서직까지 갖은 일을 전전했고 이혼녀가 되었다. 한참 보수적인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엄마의 정체성은 몇 년 사이 천지개벽하듯 달라졌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아니, 달라져야만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던 데브라의 엄마는 40년 전의 그날도 아이 셋을 데리고 교회를 찾았다. 그가 이혼 수속을 밟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다. 목사는 설교 중에 시선을 신도 속 엄마에게 고정한 뒤 말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목사는 부드럽지만 완고한 말투로, 이혼 자체를 비판하는 내용의 설교를 이어갔다. 작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이혼한 여자인 엄마는 모든 비난이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엄마는 고개를 돌려 아이들에게 말했다.

“일어나자, 얘들아.”

설교 중에 벌떡 일어난 엄마는 아이들 손을 잡고 성큼성큼 예배당을 걸어나왔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어떤 남자도, 그리고 교회라도 내 삶을 함부로 짓밟을 수는 없어. 너희에게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다시는 교회로 돌아가지 않았다.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

엄마는 데브라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다.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라고. 선택을 위해서는 독립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시간이 흘렀고 데브라가 14살 되던 해 엄마는 한 남자와 진지한 관계에 들어섰고, 데브라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결혼해서 데브라를 데리고 의붓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좀 충격적인 경험이었어. 나는 엄마의 독립적인 모습에 한참 적응돼 있었는데, 엄마는 의붓아버지와 함께 있자 남편을 돌보는 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가정주부로 돌아가버리더라고. 엄마를 나무라고 싶진 않았지만 배신감은 컸지. 그때부터 떠날 궁리만 했던 것 같아. 어느 날인가, 아래층에 내려가서 엄마에게 선언했지. 떠나겠다고. 떠날 날짜까지 정해서 말했어.”

데브라가 22살이 되던 해, 떠나겠다고 말한 바로 그날인 1995년 6월14일, 친구 둘과 함께 차를 몰고 텍사스를 떠났다. 로스앤젤레스까지 꼬박 이틀 걸려 도착했다. 고향 마을에서 특수교육 보조선생으로 일해서 모은 돈을 가지고 왔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고작 3개월의 삶을 보장할 정도의 돈이었다. 곧바로 웨이트리스로 일을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각종 오디션에 참여했다. 결과는 매번 좋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했고, 점차 자신이 그 일에 잘 맞다는 걸 깨달았다. 배우의 꿈을 잠시 접고 현장에 몰두했고, 몇 년 뒤 데브라는 몇몇 주요 광고와 뮤지컬의 프로듀서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백화점 광고 현장에서 남편 글렌을 만났다. 첫눈에 서로 반했다며 데브라는 활짝 웃어 보였다.

“현장에서 바로 데이트 신청을 받고 30일 뒤 동거에 들어갔어. 결혼을 일찍 결정하지는 않았어. 일에 집중하고 싶었거든. 그러다 서른이 되기 전 결혼했고, 서른이 되면서 첫딸을 낳았지.”

20년째 삶을 공유하는 이 커플은 그동안 많은 커플이 이별과 새 가족의 탄생을 거듭하는 동안 단란한 가정을 착실히 이뤄갔다. 그 비결을 물으니 데브라가 대답했다.

“독립성의 인정과 일상의 균형이야. 첫아이 임신부터 출산까지, 정말 쉽지 않았어. 갖은 출혈과 합병증으로 고생했거든. 그래도 일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가까스로 병행해갔지. 글렌과 함께 참 많이 고민했어. 결국 둘째를 임신한 뒤 직장을 그만뒀지. 아이를 키우는 데만 전념하니까 더 힘들어지더라. 당시 나는 건강이 좋지 못해 첫아이를 낳고도 잘 돌볼 수 없었어. 모유도 애를 썼지만 거의 나오지 않았고. 그 와중에 내 곁의 누군가는 수월하게 아이를 낳고 모유를 먹이는 듯 보였어.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좌절감과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분노와 우울에 시달렸어. 둘째를 낳고 다시 일을 시작할까도 생각했지만, 촬영 현장을 감당하기에는 몸의 회복 속도가 너무 느렸어. 어디를 가든, 내가 좋은 엄마인지 아닌지 판단당하는 듯했지. 살면서 가장 큰 위기를 그렇게 맞은 것 같아. 아무리 힘든 상황에 있어도, 나로서 삶을 꾸려간다고 생각할 때는 견딜 만했거든. 그런데 아이들의 엄마가 되니 끊임없이 평가당하고 세상의 시선에 먹잇감처럼 날것으로 던져진 기분이었어.”

엄마에게 그 말을 되돌려주다

지난한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글렌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러다 문득 데브라가 떠올린 것은, 교회를 박차고 나섰던 오래전 엄마의 용기였다. 세상의 획일적인 판단 앞에 개인으로 올곧이 서서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라고 외치며 상황을 박차고 나올 수 있는 힘, 환경에 압도당하지 않고 내 길을 걸을 수 있는 당당함을 기억해냈다. 데브라가 먼저 나서서 가족의 일상을 조율해나갔다. 글렌과 긴 대화를 했고, 몇 차례 서로에게 휴가를 줘서 혼자만의 공간과 고민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요가와 명상을 배우며 같이 보내는 시간도 다양하게 쌓아갔다. 시기마다 변하는 자신과 상대를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데 부단히 노력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함께하는 삶의 튼튼한 일상을 쌓아가고 있다. 동시에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찾아 만들어갔다.

데브라는 더 이상 영화일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좀더 세상과 연관돼, 함께 연대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려는 열망이 크다. 도시농업, 공원 조성, 지역 내 공립학교 건설 등 사회와 환경, 공동체를 고민하고 연대하는 활동에 열정적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좀더 깊이, 그리고 멀리 세상을 고민하게 됐다. 아이들이 자라고 뜻을 펼칠 곳을, 그들이 아이를 기꺼이 낳아 키우고 싶은 곳을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

요즘 데브라의 주된 관심은 엄마에게 오래전 그의 모습을 되찾아주는 것에 있다. 4년 전 생물학적 아버지는 유명을 달리했고, 의붓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 재혼 뒤 급격히 변한 엄마의 삶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재편됐다. 부부관계가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듯 보였고, 엄마는 다시 남편의 치매와 함께 삶의 극심한 지각변동을 치르고 있다.

데브라는 지난여름에도 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텍사스에서 2주간의 휴가를 보냈다. 어릴 적 자주 가던 강에서 가족이 함께 수영을 했다. 수영복조차 갈아입기를 꺼리던 엄마를 부추겨, 한때 수없이 왕복하던 길을 혼자서 건너게 했다. 손녀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물에서 걸어나오는 엄마의 자태에는 물방울처럼 빛이 솟아올랐다. 오래전 교회를 박차고 떠난 강하고 의기양양한 여자가 다시 걸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한때 볼링 선수였어. 찰랑이는 에너지와 밝은 기운이 넘치는 분이었지. 남을 기꺼이 도우려 성큼성큼 움직이고 잘 웃고 자기표현이 활발한 사람이었지. 첫딸을 보면 엄마 생각이 나.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던 엄마를 두고, 오래전 엄마를 불러내는 의식을 가족과 함께 치른 기분이야. 강을 거슬러 수영하는 할머니를 보고 아이들도 감탄했어. 여전히 엄마에게는, 그 시절 그 여자가 살아 있었던 거야.”

데브라는 엄마가 어린 시절에 해준 말을 되돌려줬다. 선택하는 삶을 살라고, 당신에게는 충분히 그럴 힘이 있다고. 데브라는 기꺼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관계에는 선택의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지란 선택이어야 해”

“독립적이지 않고는 온전히 의지할 수 없어. 의지란 자기 무게를 그대로 상대에게 얹어놓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함께 지탱하는 힘의 균형이 있을 때 비로소 건강해져. 의지란 선택이어야 해. 의지할수록 독립적이고 당당해야 하거든. 글렌과 내가 항상 하는 말도 그거야. 의지해줘서 고맙다고. 당신의 선택이 나를 이만큼이나 의지하는 것이라서 기쁘다고.”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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