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넘어 지민(知民)으로
대통령과 내가 연대하는 길 <대통령의 책 읽기>
등록 : 2017-10-30 17:42 수정 : 2017-11-01 09:17
문(文)은 본디 문(紋·무늬)이다.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모국어는 정신의 지문’이라 한 말이 이를 잘 드러낸다. 글은 무늬이므로, 기억이고 기록이며 시간이다. 시간의 축적이 글을 빚고 대하를 이뤄 역사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글은 곧 형성이다. 인간의 형성 의지가 글을 낳고, 글을 읽으며 형성 의지가 피어난다. 하여 글을 담은 그릇인 책은 세상을 만들어내려는 인간 의지의 가장 압축적 형태이며, 책 읽기는 거기에 다가가려는 인간 의지의 가장 압축적인 행위이다. 책(冊)은 글자 모양에서도 보이는바, 대나무 조각을 잘라 이은 죽간을 시원의 하나로 삼는다. 요컨대 책 읽기는 세계 형성의 의지를 지닌 인간들의 가장 압축적인 ‘연대’(어깨 겯기)를 상징한다.
<대통령의 책 읽기>(휴머니스트 펴냄)는 ‘대통령에게 권하고 시민이 함께 읽는 책 읽기 프로젝트’를 내세운다. ‘촛불혁명’ 1년을 맞아 내놓은 기획이다. 세상에 이름난 이들 26명이 저마다 책을 추천했다. 한 권은 길게, 두 권은 짧게 소개했다. 모두 더하면 78권이다. 중국 고대의 <맹자강설>(맹자)에서 근래 입소문을 탄 <사피엔스>(유발 하라리)까지 동서고금을 아우른다. 한국인이 저자인 책이 27권이고, 외국 서적이 51권이다.
책을 묶어낸 이들은 이제 지민(知民)으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시대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를. 이미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과정에서 ‘국민’(國民)에서 ‘민중’(民衆)으로, 다시 ‘시민’(市民)으로 거듭난 우리는 시대가 마주한 문제들을 정확히 알고 공유하며 그 해결 방안을 토론하면서 찾아나가는 ‘실천하는 지민(知民)’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지은이들이 추천하고 인용한 책에는 지금 현실에 바투 다가가도록 하는 대목이 여럿 읽힌다.
전쟁, 그리고 여성. “전쟁터에서 제일 끔찍한 게 뭐냐고, 지금 묻는 거야? …‘죽음’이라는 대답을 기대하겠지. 죽는 거라고. …전쟁터에서 제일 끔찍했던 건, 남자 팬티를 나르는 일이었어. …글쎄 우선 꼴이 웃겼다고 할까. …전쟁터까지 와놓고 남자 팬티나 나르다니.”(<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탈핵, 그리고 생명. “전 지구적 의사소통 기구를 포함하는 인간의 문명을 바탕으로 그 위에 집합적 의미의 인간 의식이 형성되어온 생명을 하나의 유기적 단위로 인식하게 될 때, 명실상부한 온생명의 자의식이 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삶과 온생명>, 장회익) 가난, 그리고 반복. “달동네가 사라졌다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돌고, 돌고, 또 돌고 계속 그 자리만 머물게 되고… 꿈이 있어야 하는데….”(<사당동 더하기 25>, 조은) 자본주의, 그리고 관점. “자본주의는 다수의 관심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에 가두어놓음으로써 그 생명을 이어나간다.”(<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지은이들은 말한다. ‘대통령과 시민/ 지민이 함께 새 세상을 형성하자, 더불어 책을 읽으며.’
전진식 <한겨레> 교열팀장 seek1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