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배움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단지 ‘뭔가를 읽어서 아는 것’과 ‘속속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깨닫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된다. 간접경험과 직접경험의 차이는 예스와 노의 차이만큼 엄청나다. 직접 내 몸으로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을 향한 배움의 열정은 우리의 권태로운 삶을 빠른 속도로 확실히 치유할 수 있다. 에단 호크 감독의 다큐멘터리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를 보면서 나는 배움의 기쁨으로 삶을 바꾸는 피아니스트의 감동적인 가르침의 온기를 느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피아노를 향한 열정이 다시금 되살아나 심장이 따끔거렸다. 나는 어린 시절 내 삶의 소중한 일부였던 피아노를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다.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피아노를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나는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내 영혼의 깊은 곳이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가장 깊은 울림을 갈구한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무려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하루에 8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아름다운 글까지 쓰는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인생을 엿보고 나니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비로소 감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가르치며 배우는 삶, 배우고 글 쓰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솔로 피아니스트로서의 화려한 공연을 포기했다. 그는 더 높이 날아올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우뚝 설 수 있었지만, 그 빛나는 성공의 길이 아니라 조용히 고독을 즐기며 홀로 있음에도 아무것도 결핍되지 않은 삶을 추구했다. 그는 아주 작은 아파트에서 최소한의 가구만으로 살아가지만 누구보다 풍요로운 감수성의 재벌처럼 보였다. 그래, 매일매일 배우고 매일매일 가르치고, 그리고 거기서 느낀 것들을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 이것만큼 행복하고 충만한 삶이 또 있을까. 나는 ‘뭔가를 가르치는 것’에는 자신이 없지만, ‘가르침의 행위 속에서 배우는 것’에는 뜨거운 열정을 느낀다. 가르침 속에는 반드시 배움이 깃들어 있다.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공부함으로써 배우는 것도 있지만, 가르침의 과정 속에서 나도 모르게 체험하고 느끼는 것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다. 사과나무에서 돌연변이로 자라난 귤 얼마 전에는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다가 학생의 사랑스러운 문장을 만났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상황을 고통스러워하는 학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사과나무에서 자라고 있는 귤 같다.” 이 나무에서는 오직 사과만 열리도록 예정되어 있는데, 나만 돌연변이로 귤이 되어 태어난 것 같은 그 느낌을 나도 안다. 어딜 가도 이방인인 듯한 느낌, 어딜 가도 내 진정한 친구를 결코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뼈저린 외로움을 나는 안다. 나는 학생의 어깨를 다독이며 네 아픔을 이해한다고 말해주었다. 수업이 끝난 뒤 생각해보니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네 아픔을 나도 안단다. 그런데 네가 느끼는 아픔은 다른 사과들 때문은 아니란다. 사과들에게 귤을 이해해달라고 강요하면 안 돼. 나 혼자 귤이기 때문에 내가 혼자 남아 견뎌야 할 고통이 있거든. 난 내가 사과가 아니라 귤로 태어난 것을 이제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어. 이제 더 이상 사과처럼 보이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지 않거든. 너도 네가 ‘사과나무에서 돌연변이로 자라난 귤’로 태어난 사실을 언젠가는 사랑하게 될 거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볼 때마다 깊은 슬픔을 느끼는 장면이 있다. 연극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군사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진 주인공 닐(로버트 숀 레너드)이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리기 전날 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주인공을 맡아 열연하기 전날 밤에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엄스)의 방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늘 교실을 비롯한 ‘공적인 가르침의 현장’에서만 보던 키팅 선생님이 자신의 비좁은 개인 연구실에서는 숲속의 현자 같은 고즈넉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늘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지던 키팅 선생님이 이날따라 이상하게도 너무 멀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제 겨우 18살인 닐은 사력을 다해 선생님께 ‘도움’을 구하러 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순수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닐은 키팅 선생님께 차마 ‘도와주세요, 아버지가 저를 군사학교에 보내지 않으시도록’이라는 직접적인 부탁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닐이 차라리 자존심을 조금 접고 ‘선생님,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기를 바랐다. 매일매일이 선택의 날 하지만 닐은 그러지 못한다. 그날따라 왠지 조금은 낯설고 멀게만 보였던 키팅 선생님, ‘이제 네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갈 때야’라고 눈빛의 언어를 보내는 듯한 키팅 선생님의 모습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그때 닐이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면, 키팅 선생님이 ‘그래, 아직은 너 혼자서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는 없단다’라고 말했다면, 그토록 아름답고 눈부신 청년 닐이 죽음을 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도 마지막 한 걸음까지 함께 가줄 수는 없다. 지상 최고의 스승이라도, 제자가 홀로 건너가야 할 인생의 결정적인 한 걸음, 반드시 혼자서 겪어내야 할 인생의 전환점을 함께 건너가줄 수는 없다. 키팅 선생님은 스승으로서 최선의 것을 이미 다 주었고, 이제 닐은 자신의 발걸음 하나하나로 이 거친 세상을 홀로 헤쳐나가야만 했다. ‘내 아들은 내가 원하는 길을 걸어가야만 해’라고 믿는 아버지의 폭력적인 사고방식이 끝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닐은 마지막 순간에 알지 않았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법’을 깨우쳐준 키팅 선생님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너무 짧은 생이었지만, 연극배우로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마지막 에너지를 불태운 그 시간이 생애 최고의 시간이었음을, 닐은 깨닫지 않았을까. 하지만 키팅 선생님처럼 ‘학생들에게 때로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조금은 다르게 말해주고 싶다. 내가 만약 닐의 누나이거나 선생님이었다면, 지금이라도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삶은 한 번뿐이지만,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매일매일 있다고. 삶이 한 번뿐이라고 해서 ‘선택조차 한 번뿐’이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오늘의 선택이 틀렸다면, 내일 용기를 내서 그 선택을 바꿀 수 있는 힘 또한 너 자신에게 있다고. 나는 오늘도 이렇게 가르치며 배우는 삶, 배우면서 가르치는 삶, 낮에는 배우고 저녁에는 가르치는 삶, 그리고 밤에는 글을 쓰는 삶을 꿈꾸며 ‘아직 한참 모자란 나’를 예전보다 더 깊이, 더 따뜻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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