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은 순순히 불지 않았다. 자신들을 돕고 지원해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노력했다. 일주일간의 심문을 마치고 일본 본국으로 출항하던 날, 총영사관이 외무장관 앞으로 작성한 수사 보고서가 있다. 사실과 다른 정보가 도처에 눈에 띈다. 현금 수송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사건 이후 도주 경로가 어떠했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 그러했다. 시종일관 엉뚱한 답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밀 정보를 제공한 사람과 사건 이후 피신 과정을 도와준 사람, 그리고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이름이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였다. 수감자들이 얼마나 고심했는지 짐작된다.
군함 지쿠젠마루호는 2월7일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떠났다. 군함은 규슈 북단의 모지(門司)항을 거쳐, 요코하마(橫浜)항으로 항해했다. 그곳에 체포된 청년들을 하선시키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을 태운 배는 다시 부산항으로 출항했다. 이 사건의 재판 관할을 청진지방법원으로 지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부산항에 내린 피의자들은 철도편으로 서울을 거쳐 원산까지 호송됐다. 철도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원산에서 청진까지는 다시 배편으로 이송됐다.
마침내 재판이 시작됐다. 1심은 청진지방법원에서 진행됐다. 숙소에서 같이 잠자다가 변을 당한 나일은 결국 무혐의로 인정되어 석방됐다. 그 대신 현금 수송 정보를 제공했던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사무원 전홍섭(全洪燮)이 피고인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사건 당일 밤 일찌감치 회령경찰서에 체포됐다. 그를 의심스럽게 본 회령지점장이 고발한 탓이었다. 그는 3주 동안 계속된 심문을 견뎌야 했다. 그 결과 1920년 1월28일자로 ‘강도종범 및 정치범’ 혐의로 청진 지청 검사국에 송치됐다.
재판은 빠르게 이뤄졌다. 2심은 서울의 경성복심법원에서, 3심은 서울의 고등법원에서 진행됐다. 최종심 선고는 1921년 4월4일에 있었다. 사건 발발 이후 1년3개월만의 일이었다. 와타나베 노부(渡邊暢) 재판장을 수위로 하는 고등법원 형사부 5인 합의부 판사들은 피고들에게 극형을 선고했다. 15만원 사건에 직접 가담한 윤준희·임국정·한상호 3인에게는 사형을, 현금 수송 정보를 제공한 조선은행 용정 출장소 사무원 전홍섭에게는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선고가 이뤄진 지 4개월20일이 지난 뒤였다. 사형이 집행됐다. 1921년 8월25일이었다. 낮 기온이 28도에 이른 더운 여름날이었다. 잠시 맑기도 했지만 종일 흐린 날씨였다. 서대문형무소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형장에서 세 청년은 영영 눈을 감았다.
세 사람의 주검은 서대문형무소 사형수들이 으레 묻히는 홍제동 밖 신사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장례를 주관한 이는 여성들이었다. 윤준희의 젊은 부인 최씨와 임국정의 어머니 ‘임뵈뵈’였다. 임뵈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북간도 성녀’라는 별호로 알려진 여성이었다. 멀리 북간도에서 살다가 남편과 아들의 주검을 찾기 위해 낯설고 번잡한 객지에 온 두 여인이었다. 주검을 수습하고자 동분서주하던 여인들의 흐느낌 속에 세 무덤이 나란히 들어섰다.
엄인섭(嚴仁燮)이었다. 15만원 사건 주인공들의 거처를 일본 총영사관에 알려준 밀정 말이다. 이 사실은 일본 총영사관의 정보 보고서에 암시되어 있다. 기토 통역관은 자신이 관리하던 밀정의 활약상을 자세히 기술했다. 보기를 들면 ‘우리 밀정’이 저들의 무기 구매를 알선해줬다고 한다. 그 행위는 기만이었다. 구매 협상에 나선 사람들 가운데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우리 밀정’은 이 점을 이용하여 다른 이들을 교묘하게 속였다고 한다.
좀체 믿기 어려운 기록이다. 엄인섭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으리만큼 그는 민족혁명운동의 중견 인물이었다. 그는 1907년 개시된 연해주 반일 의병운동에 열렬히 참가했다. 1908년 여름 국내 진공작전 때에는 안중근과 함께 최선봉에 서서 두만강을 넘어 국내 진격을 영도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는 안중근의 가장 친한 동지였다. 여순감옥에서 심문받을 때 안중근은 말했다. “엄인섭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고 속마음을 토로했다. 그뿐인가. 그들은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였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평양 출신의 반일 혁명가 김기룡(金起龍)과 함께 결의형제를 했다. 그들은 그럴 만큼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나이순으로 따진다면 김기룡(1876년생)이 큰형이고, 안중근(1879년생)이 둘째, 엄인섭(1885년생)이 막내였다.
세 사람은 목숨을 걸고 혁명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일본군의 첩보에 따르면, 1908년 4월에 세 사람은 다른 두 사람(현학표, 이범석)을 더하여 5인 단지동맹을 맺었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 살해를 맹세했고, 다른 세 사람은 친일 매국 행위자인 이완용·박제순·송병준을 각각 암살하기로 서약했다. 다섯 사람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증거로 각자 왼손 무명지의 첫 번째 관절부를 절단했다.
엄인섭은 힘이 세고 성격이 담대했다. 사람이 여럿 모인 곳에서는 힘자랑을 즐겨했다. 그는 좌중의 분위기를 제압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키는 164cm였다. 당시 기준으로 중간쯤 되는 키였다. 수염이 많고 다소 뚱뚱한 체격이었다.
엄인섭의 반일 행동은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에도 계속됐다. 1911년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권업회 설립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권업회 지회 설립을 촉구하기 위해서 연해주 각 지방에 파견한 3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1913년 11월 이동휘와 홍범도를 비롯한 혁명가 6인 간담회가 열렸을 때다. 엄인섭도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이동휘는 “홍범도와 엄인섭 두 장군의 활약을 보는 날이 있으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무장투쟁 시기가 다시 도래할 터이므로 그에 대비해달라는 당부였다. 엄인섭은 홍범도와 병칭되는 항일 무장투쟁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14년 동안 진행된 밀정 노릇
밀정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독립운동계 내에서 갈등 관계에 있는 혁명가들이 상대편을 밀정이라고 의심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암시적이고 간접적인 의혹 말고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그를 잘 몰랐다. 러시아 지역 한국독립운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조차 그랬다. 엄인섭은 최재형, 이범윤, 유인석, 안중근 등과 나란히 거론되는 의병장이었다. 주요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고, 향후 그에 관한 연구가 더 활성화되어야 할 인물로 지목받았다. 하지만 이제 국사편찬위원회가 해외 한국사 사료의 수집과 편찬에 노력한 성과에 힘입어, 우리는 엄인섭의 밀정 여부를 확증할 수 있게 됐다. 외무성 산하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에서 작성한 반일 단체 관련 공문서철(불령단관계잡건)에는 엄인섭의 밀정 행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엄인섭은 1911년 반일 언론 <대양보>의 간행을 막기 위해서 한글 활자 1만5천 개를 훔쳤다. 93kg에 달하는 무게였다. 이 활자는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 기토 통역관에게 전달됐다. <대양보>는 발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일본 밀정임이 발각된 서영선(徐永善)이란 자를 한밤중에 몰래 탈출시켰다. 1912년에는 연해주의 조선인 농촌 지대인 연추에서 둔전영(屯田營)을 설립하려는 은밀한 논의를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 경찰에게 자초지종 밀고했다. 둔전영은 농장 경영과 함께 독립군 양성을 동시에 수행하는 무장투쟁 준비 단체였다. 이동휘, 홍범도, 이종호, 김립, 황병길 등과 같은 반일 인사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도 그의 직분이었다. 이외에도 엄인섭의 밀정 행위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밀정을 했는가? 그의 밀정 행위 관련 기록은 1911년부터 남아 있으므로,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 그가 타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실제는 그보다 훨씬 앞서 있다. 총영사관의 기밀문서를 보면 “엄인섭은 재작년(1908년) 11월경 본 영사관에 출두하여 첩보자로서 고용해달라고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총영사관에 접근한 시기에 눈길이 간다. 국내 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미뤄보면 그가 밀정으로 암약한 시기는 1908년부터 1922년까지 14년이나 된다. 이처럼 오랜 기간 스파이 노릇을 행한 사례는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무엇 때문에 밀정이 됐을까? 첩보자로 ‘고용’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그가 바랐던 것은 돈이었다. 밀정이 되면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보기를 들면 용정 총영사관은 밀정에게 하루 1원 50전씩 지불했다. 1개월치는 45원이었다. 그 시기 회령경찰서 순사 나가토모가 받은 월급은 30원이었다. 오히려 일본 경찰관보다 월수입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엄인섭은 거물이었고, ‘공로’를 여러 번 세웠기 때문에 수령액이 훨씬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도박 즐기고 여성 관계 문란
그는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았다. 러시아 지방관청의 기록 속에 엄인섭 인물평이 있다. “지방 거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엄인섭은 속이기와 카드놀이에 아주 능한 사람이며 방탕하다”고 한다. 도박을 즐기고 사람 속이기를 능사로 한다는 말이었다. 그뿐인가. 여성 관계도 문란했다. “그는 합법적인 아내 외에도 몇 명의 첩을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생활 습관은 그에게 많은 돈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병하던 1922년에 엄인섭의 밀정 생활도 끝났다. 그는 일본군을 따라 연해주를 떠났다. 처음에는 두만강 너머 함경북도 경흥에 정착했다. 그러나 일본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르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거처를 옮겼다. 연해주에 가까운 북간도 훈춘을 찾았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제가 자라던 고향 연추와 연결되는 곳이었다. 엄인섭은 1936년 그곳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52살이었다. 그로 인해 15만원 사건 주역들이 30살 고개를 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음을 상기해보면, 과연 역사에 정의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