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추석 가까워 고향 찾아온 벗들을 만난다. 친한 후배는 예전보다 훨씬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나이 탓일까. 늘 그리운 고향인데 왜 이곳에 오면 상상이 빗나가는지 모르겠다던 그녀. 모처럼 시댁 식구를 만나고 친정을 찾았는데 묵직한 돌덩이 하나 얹고 가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런 명절증후군 같은 그늘을 걷어내는 데 10여 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단다. 돌이켜보니 그냥 서로에 대한 예의의 문제였던 것 같다. 이쪽도 저쪽도 예의를 갖췄다면 관계는 훨씬 좋아졌을 거란다. 사람 사는 세상, 물론 사람 일이라 잘나가던 관계도 말 한마디에 껄끄러워지기도 한다. 그렇다. 하지 말아야 할 말 뱉어놓고 가슴앓이한 적 누군들 없겠는가. 그럼에도, 종종 잊으며 산다. 돌아보면 내 마음에 여유가 없거나 기쁨이 없을 때 그 상처를 곧잘 받는지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든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이 필요한 시대, 최근 젊은 시인 박준이 낸 산문집 속 이 한 문장을 곱씹어본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 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숨 한번 쉬어가시라고 곧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지독하게 그리운 얼굴들이 달에 있던가. 여유를 찾으라고, 한번쯤 잊고 지낸 사람들을 찾아보라고 달은 빛난다. 소소한 나의 행동에, 나의 말에 가슴 다친 사람들이 어디 없는지 생각해보라고 달이 환하다. 이 부풀고 부푼 달이 켜준 우주의 등 아래 종종걸음 치며 추석이 온다. 그러니 꼭 가슴에 매어두지 않아도 되는 말은 내려놓고, 풀고 가시라고. 숨 한번 쉬어가시라고 추석달이 온다. 제주오름의 여왕 다랑쉬오름 위로 며칠 뒤면 만삭의 달이 뜨리. 이 아픈 역사의 오름엔 둥글고 넉넉한 굼부리가 있다. 풍덩 빠져도 좋을 만한, 그만한 달도 온다면 포옥 안아주겠다는 양 넓다. 달빛이 서러운 가슴들을 채워주리라. 그럼에도 어려운 시대, 이렇게 잘 견뎌왔다고 다독여주리라. 괜찮다면, 그 고운 달빛 한편 가슴에 담아가시기를 권한다. . 허영선 시인·제주 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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