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실은 수송마도 중요했다. 총소리에 놀라 허둥대는 사이 윤준희(26·尹俊熙)가 말에 올랐다. 또 다른 말은 최봉설(23·崔鳳卨)이 낚아챘다. 두 사람은 골짜기 서쪽 산등성이로 말을 몰았다. 내심의 목표 지점과 반대 방향이었다. 눈 위에 찍힐 말 발자국을 서쪽 화룡(和龍)현 방면으로 유도하려는 행동이었다.
그 뒤를 두 사람이 따라붙었다. 타고 갈 말이 없어 부득이 뛰어야 했다. 임국정(25·林國禎)과 한상호(21·韓相浩)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갔다.
습격자는 도합 6명이었다. 남은 두 사람은 사전에 약정한 대로 대열에서 벗어났다. 박웅세(朴雄世)와 김준(金俊)은 습격 작전에만 가담하고 이후에는 독립적으로 행동하자고 약속했다. 뒷날 두 사람은 각자의 행로를 걸었다. 박웅세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고 박건(朴健)으로 개명했으며, 사회주의 항일단체 ‘적기단’의 유명한 구성원이 되었다. 문필이 뛰어났던 김준은 재러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동했다.
습격대는 비밀결사 ‘철혈광복단’ 단원이었다. 이들은 1910년대 북간도의 3대 항일 중학교로 이름 높던 명동(明東)중학, 창동(昌東)학원, 광성중학 졸업생 가운데 선발됐다. 민족의식이 높고 반일 혁명운동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철혈광복단은 북간도 3·1혁명을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9년 3·13 용정 만세시위를 이끌고, 그해 7월 북간도 민족운동 방향을 평화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단체였다.④
산속으로 4km쯤 들어갔을까. 습격자들은 말을 멈춰 세웠다. 전리품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보름달이 밝게 비치는 공간에서 짐을 부렸다. 철제 궤에는 고액권 지폐가 띠지로 묶인 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5원짜리 지폐 200장을 묶은 1천원 다발이 100개, 10원짜리 지폐 100장을 묶은 1천원 다발이 50개였다. 도합 15만원이었다.
놀랄 만한 거금이었다. 1919년 당시 경기도 수원에 사는 4인 가족이 가장 월급 25원으로 근근이 생활하던 시절이다.⑤ 전리품 15만원은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억원에 해당한다.
탈취금 전액을 무기 구입에 쓰면 조선독립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그즈음 블라디보스토크에 은밀히 거래되는 무기시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소총 1자루와 탄환 100발’ 한 세트를 30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개인 화기만이 아니다. 공용 화기인 기관총 1문을 구매하는 데 200원이면 족했다.
‘15만원 탈취 사건’ 현장 기념비.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군 부대의 실제 무장 상태를 보자. 1920년 7월 임시정부 간도 특파원 왕삼덕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부대의 군인은 500명, 소총 500자루, 공용 화기인 기관총 3문이 있었다.⑥ 말하자면 15만원이란 돈은 북로군정서 규모의 독립군 부대를 9개나 더 편성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다음 목표는 거액의 현금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자면 말 발자국을 따라 뒤쫓아올 추격대도 따돌려야 했다. 네 사람은 역할을 분담했다. 한 사람은 추격대를 유인하기로 했다. 임국정이 그 임무를 맡았다. 그는 말을 타고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기로 했다. 백두산 방향 서쪽 산악지대 깊숙이 들어가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말 두 마리를 몰고 즉각 길을 떠났다.
다른 세 사람은 현금 다발 150개를 나누어 배낭에 넣고 짊어졌다. 밤을 새워서라도 속히 안전지대로 이동해야 했다. 염두에 둔 목표지는 용정 동북쪽에 위치한 왕청(汪淸)현의 산악지대 의란구(依蘭溝)였다. 거기에는 철혈광복단 동지이자 사냥을 업으로 하는 김포수가 아내와 단둘이 거주하는 외딴 가옥이 있었다. 그곳에 집결하기로 약속했다.
세 사람은 지체 없이 길을 떠났다. 그들은 도회지인 용정을 우회하여 국자가(局子街·오늘날 연길) 교외에 위치한 와룡동까지 약 80리 길을 걸었다. 32km나 되는 눈 쌓인 산길을 밤새 걸었다.
와룡동에는 최봉설의 집이 있었다. 새벽닭이 울 즈음 도착했다. 머지않아 날이 밝을 터이므로 의심받지 않게 옷을 갈아입고, 운송 수단도 바꿔야 했다. 청년들은 한복 두루마기로 갈아입었다. 두루마기는 품이 넉넉해 돈다발을 감추기에 적합했다. 운송 수단도 얻었다. 최봉설의 아우 최봉준의 도움을 받아 소달구지를 동원해 값비싼 화물을 수송했다. 와룡동에서 의란구 김포수의 집까지 40리 길, 16km였다.
의란구 김포수의 집은 외딴 산속에 있는데다 향후 행로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북쪽으로 향하면 무장투쟁의 한 거점인 하마탕(哈蟆塘), 동쪽으로 향하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갈 수 있었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연해주 조선인들의 자치단체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장으로 재임 중인 김하석(金河錫)이 그곳에 있었다. 우연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김하석은 네 청년들에게 블라디보스토크행을 권했다. 그곳에서는 손쉽게 무기를 구매하고, 일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윤준희와 임국정이 동의했다. 그러나 다른 두 청년은 이견을 보였다. 전설의 의병장 홍범도가 본부로 삼은 하마탕을 찾아 북행하자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양쪽에서 심각한 토론이 벌어졌다. 거금을 가지고 어디로 갈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마침내 발각된 범인의 윤곽
용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서는 발칵 뒤집혔다. 현금 호송대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경관대 11명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사건 현장과 주변을 세밀하게 수색했다. 범인이 누군지, 어디로 도주했는지 추론할 단서가 필요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사건 현장에서 60m 떨어진 농경지에서는 구식 엽총의 총신이 발견됐고, 서북쪽 100m 지점 산기슭에 버려진 우편물 행낭을 발견했다. 재암골, 남양동, 동량 같은 사건 현장 부근 조선인 마을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틀에 걸친 노력이 헛수고였다.
일본 관헌들은 무차별적으로 수사를 확대했다. 평소 반일 성향을 보이던 조선인 마을과 인물에 대해 아무 근거 없이 야만적인 압박을 가했다. 북간도 주요 도로와 고개에서는 오가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반일 성향의 명문 중학교 소재지는 가혹한 구타와 수색의 대상이 됐다. 명동학교 소재지 장재촌, 창동학원 소재지 와룡동이 곤욕을 겪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별 증거 없이 구타하고 수색해 한동안 청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의 교통이 두절되기도 했다.
그뿐인가. 일본은 청국 정부의 북간도 행정 책임자인 연길도윤에게 범인 체포에 협력해줄 것을 요구했다. 연길도윤은 요구에 따랐다. ‘포고 제2호’를 발표하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일본돈 5원 지폐와 10원 지폐를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청국 관청에 보고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본 관헌의 범인 추적이 급진전을 보인 것은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사무원 전홍섭(31·全洪燮)을 체포하면서다. 경찰은 내부자를 의심했다. 현금 수송은 소수만 아는 극비 사항인데 어떻게 범인이 알았을까? 내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조선인 은행원들이 경찰에 불려갔다. 그 결과 평소 반일 조선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전홍섭이 표적이 됐다.
마침내 전홍섭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궁금해하던 정보들이 입수됐다. 범인의 윤곽이 떠올랐다. 조선은행권 15만원 탈취 사건에 가담한 범인의 이름과 신상이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1월10일 와룡동을 일제 수색한 것은 일본 관헌이 범인 신상을 정확히 파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날 일본 경찰 37명과 청국 관헌 53명은 와룡동을 포위하고 100여 민가를 전부 수색했다. 급기야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 등 가족을 체포하고 범인 소재지를 밝히라며 가혹한 고문을 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계획이 성공?
15만원 탈취 사건의 네 주역이 김하석과 더불어 중국~러시아 국경을 넘은 것은 사건 발생 3일째 되던 날이다. 그들은 하마탕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를 행선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마탕 노선을 주장하던 최봉설과 한상호가 다수결을 존중해 자신의 의사를 철회한 것이다. 그들이 포시에트 항구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기선에 탑승한 것은 사건 발생 4일째 되던 날이다. 밤 9시 기선이 출발하며 뱃고동 소리를 길게 울렸다. 기선에 탑승한 네 청년은 안도감을 느꼈다. 일본 은행을 습격하여 얻은 자금으로 조선독립군을 무장시킨다는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던 계획이 성공한 것만 같았다.⑦(다음회에 계속)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