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평양 ‘단군릉’에서 출토된 사람 뼈에 대해 역사 유물 연대 측정에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전자 상자성 공명법’이라는 방식을 적용해 기원전 3000년께 조성된 단군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평양은 갑자기 ‘고대 문명의 발상지’가 됐다. 사이비역사가들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북한의 연구 성과라는 것은 이처럼 보편적 학문의 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사진은 단군릉 전경. 한겨레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위조품? 사이비역사가들이 기대는 최후의 보루는 조작설이다. 그들은 평양 지역이 낙랑군이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들을 덮어놓고 ‘가짜’라고 단정한다. 대표적인 것이 1993년 평양의 정백동 364호분에서 출토된 ‘초원 4년 현별 호구부’다. 이 유물은 3개의 넓적한 나무판에 붓글씨를 이용해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초원 4년(기원전 45년) 낙랑군에 속한 모든 현의 인구수를 기록한 행정 문서다. 낙랑군 전체 인구 자료가 평양에서 발굴된 것은 낙랑군의 중심 지역이 평양임을 말해주는 명확한 증거다. 평양에서 출토된 이 자료가 ‘낙랑군은 평양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역사가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껄끄러운 존재였는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초원 4년 현별 호구부는 나무판에 글씨를 써 문서를 작성한 ‘목독’ 자료인데, 이덕일 소장은 목독은 휴대가 가능해 요서 지역에 살던 낙랑군 관리가 이것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와 묻혔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동시에 어떤 강연회에서는 초원 4년 현별 호구부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위조품으로, 나중에 파내려고 몰래 묻어놓은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낙랑군을 평양에 두기 위해 일본이 모든 것을 조작했다’는 사이비역사가들의 프레임은 식민사관의 하나인 ‘만선사관’만 제대로 알아도 허위라는 것이 금세 드러난다. 흔히 일제 식민사관은 ‘조선의 영역을 한반도 내에 가두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만선사관은 오히려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하나의 역사 단위로 묶어 이해하려는 역사관이다. 물론 그 목적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 만선사관은 일제의 만주 침략과 밀접하게 연동됐으며, 당시 중국 대륙을 넘보던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제시됐다. 조선인에게 만주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이 있다면, 이미 현실세계에서 조선인을 지배하는 일본에도 만주 지역에 대한 연고권이 있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식민사관이 작동했던 시대적 맥락을 안다면, 일본인들이 엄청난 인력과 재력을 낭비해가며 평양 지역에 낙랑군 유적을 조작했다는 주장은 차라리 ‘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제2의 왕검성 ‘창조’한 이유 이덕일 소장을 비롯한 사이비역사가들은 평양 일대에 존재하는 낙랑군 유적의 성격을 부정하기 위해 북한 학계의 권위를 이용하기도 한다. 수천 기에 이르는 낙랑 유적을 발굴한 주체인 북한 학계에선 정작 이것을 낙랑군 유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남한 학계가 엉뚱하게 거짓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학계가 낙랑 유적을 낙랑군의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학계가 그처럼 무리한 견해를 고수하는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 학계에서 평양 지역 유적을 낙랑군의 것으로 인정하는 견해가 존재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주로 고고학 전공자들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1960년대에 이르러 ‘고조선 수도 왕검성이 요하 유역에 있었다’는 학설을 국가가 공인한 정설로 채택했다. 이에 따라 고조선 중심지에 설치된 낙랑군 역시 자연스럽게 한반도 밖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됐다. 이는 고조선 영역을 광대하게 이해하고 싶은 욕망과 북한의 수도 평양이 한때나마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작동한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이므로, 국가에서 공인된 학설만이 정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낙랑군 평양설’은 북한 학계에서 일체 배제돼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30여 년간 지속되던 북한 학계의 정설에 큰 변화가 발생한 계기는 1993년 단군릉 발굴이었다. 단군릉은 본래 평양시 강동군의 대박산 기슭에 있던 돌방흙무덤이다. 조선시대부터 단군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졌으나, 사실로 믿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북한의 절대 권력자인 김일성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시에 따라 이 무덤의 전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과정에서 해당 무덤은 5세기대 고구려 무덤임이 확인됐다.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 장식 등은 고구려의 왕족이나 유력 귀족의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 학계에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야 어떠하든 이 무덤은 국가 방침에 따라 반드시 단군릉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곳에서 출토된 인골의 의문스러운(?) 연대 측정을 통해 무려 기원전 3000년께 조성된 단군의 무덤이 확실하다는 최종 발표가 이루어졌다. 이후 단군릉은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로 복원됐고, 단군릉이 발견된 평양 지역은 갑작스레 ‘고대 문명의 발상지’가 됐다. 북한은 평양에서 발원한 문명을 ‘대동강 문화’라 명명했고 이어 ‘세계 5대 문명’이라는 선전이 이어졌다. 유적과 유물을 찾아와 제시하라 단군릉 발굴을 기점으로 북한은 30여 년간 이어오던 정설을 뒤집었다. 이제는 평양 지역이야말로 고조선 수도 왕검성이 있던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존재했다는 것만큼은 여전히 용납될 수 없었다. 고대 사료를 볼 때 고조선의 왕검성과 왕검성에 설치된 낙랑군은 다른 지역일 수 없다. 북한 학계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평양에 고조선 수도 ‘왕검성’을 두고 대신 요하 유역에 ‘제2의 왕검성’이 있었다는 논리를 창조했다. 나중에 낙랑군이 설치된 왕검성은 바로 요하 유역 제2의 왕검성이라는 것이다. 북한 학계 외에 어느 나라 학자들도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의 단군릉 발굴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교훈을 준다. 쇼비니즘적 욕망과 정치적 목적성이 학문에 개입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됐는지 하는 점 말이다. 고고학은 유적과 유물로 말한다. 낙랑군이 평양이 아닌 요서 지역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싶다면, 요서 지역에서 낙랑군 유적과 유물을 찾아와 제시하면 된다. 정작 자신들은 아무런 물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평양 지역에서 확인된 수많은 증거물에 대해 ‘조작’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영원히 ‘사이비’ 딱지를 떼기 어려울 것이다. 기경량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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