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힘이 됐다
만화가 주호민의 <셋이서 쑥>
등록 : 2017-08-01 03:56 수정 : 2017-08-04 15:27
군대 다녀오니 학과가 없어지고, 전역한 여단도 사라졌다. 아르바이트했던 대형마트가 망하고, 연재했던 매체들도 차례로 문을 닫았다. 주호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파괴왕’으로 불리는 만화가.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 때, 얼마 전 그가 청와대 앞에 다녀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이건 과학’이라며 그 사실을 즐겼다.
나 역시 그와 작업한 적 있다. 쌍용차, 유성기업, 밀양 송전탑, 제주 강정마을 등 긴 싸움을 하는 ‘섬’들을 서로 잇는다는 취지로 시작된 ‘섬섬 프로젝트’. 만화가와 르포작가가 한 조를 이뤄 장기투쟁 사업장의 이야기를 전하는 <섬과 섬을 잇다>를 작업하면서였다. 1권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2권 기획으로 이어졌고, <섬과 섬을 잇다 2>에 주호민 작가가 참여해 기륭전자 이야기를 전했다. 그렇다면 3권은? 애석하게도 진행되지 않았다. 장기투쟁 사업장이 없어져서일 거라 믿고 싶다.
한 장례식장에서 주호민 작가를 다시 만났다. 집에 오는 길에 차를 태워주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아들 녀석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여서 자연스레 ‘아기’가 주제가 됐고 <셋이서 쑥> 이야기도 오갔다. 작가의 첫째아이 선재가 세상에 나올 때부터 돌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웹툰인데 책으로 출간돼 인기를 끌었다. 나는 괜히 ‘넷이서 쑥’은 안 하시냐며 싱거운 질문을 날렸다가 육아 고충 에피소드만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몇 달 후 아기가 세상에 나왔다. 사람들이 아내가 임신 중일 때가 좋은 때라고 한 말을 믿지 않았는데 이내 믿게 됐다.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가 좋을 때라는 얘기도 곧 공감했다. 산후조리원에서 나와 ‘백일의 기적’ 운운하며 백일만 버티라고 하기에 믿고 기다렸는데, 웬걸! 요새는 다들 돌 지나면 좀 나을 거라고 한다.
백일이 좀 지나 얼이 빠져 있을 즈음 <셋이서 쑥>을 집어들었다. 잠든 아기 옆에서 대기하며 틈틈이 읽었는데, 전부 내 얘기 같았다. 예정일을 가볍게 무시하고 불쑥 찾아온 아기 때문에 허둥대며 산부인과로 향하던 그날 밤부터, 난생처음 알게 된 고통의 모유 수유, 유모차며 카시트며 아기용품을 고심해서 고르고 또 고르던 일 등.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나도 젖이 나왔으면’ 하던 순간! 나 역시 똑같은 생각을 했다. 한술 더 떠 인류사의 남성우월주의는 어쩌면 젖이 나오지 않아 열등감에 빠진 남자가 만든 거대한 음모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했으니.
그렇게 <셋이서 쑥>을 보며 울고 웃고 하니 나갔던 얼이 되돌아왔다. 세상의 모든 고난이 나에게만 주어진 것 같았는데, 막상 다 그렇게 살고 있단 걸 확인하니 어떻게든 또 지내볼 힘이 났다. 공감의 힘이랄까? 이런저런 육아책을 들춰봤지만 아직까지 내게 이만큼 힘이 된 책은 없다. 오늘도 좌충우돌하며 멘붕에 빠져 있을 초보 엄마·아빠에게 강추한다.
정회엽 한겨레출판 인문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