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오계옥 기자
양익준과의 여러 에피스드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 양익준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시사회에 나를 초대했다. 근처 술집에서 배우 몇 명과 뒤풀이를 하던 중 예전에 인터뷰한 감독이 다른 테이블에 있었다. 그분께 실수를 범했던 일이 생각나 사과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분도 계속 일행과 대화 중이었다. 결국 그 자리가 끝날 무렵에야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분은 반가워하신 것도 잠시, 내가 “그때 죄송했습니다”라고 하자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냥 서 있기도, “이 정도로 화를 내실 일은 아니다. 감독님의 잘못도 있다”고 항변하기도 애매한, 그렇다고 자리에 다시 앉기도 뭣한 상황이었다. 그의 짜증을 들으며 서 있는 5분 남짓한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 없었다. 술집을 나서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인지 까닭 모를 눈물이 흘렀다. 옆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양익준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많은 위로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똥파리>를 폭력적인 영화라고 하지만, <똥파리>는 폭력을 성찰하게 하는 영화다. 우리 안의 폭력을, 그 폭력의 비극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힘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영화다.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그냥, 다 같은 사람이잖아요” “같은 사람에게 왜 그래?”이다. 분노조절장애 한국에 필요한 ‘미용고사’ 분노에 가득 찬 질풍노도의 젊은 시기를 보냈던 양익준은 이제 ‘미용고사’를 입에 달고 산다. ‘미안합니다, 용서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네 단어를 자주 사용하면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해낸 것이다. 양익준은 이렇게 말한다. “살면서 쌓인 많은 것들, 화, 분노 이런 것이 실은 대단한 것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따뜻한 사과 한마디에 상당 부분 풀리는 게 아닌가 합니다.” 나도 용기 내서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시도해봐야 할 것 같다. 내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지금 한국은 분노조절장애와 피해의식의 사회가 아닌가 싶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 선수가 부진하다고 “도륙해서 고기로나 써야 한다”는 댓글을 달고, 아파트 도색 작업 중 휴대전화 음악 소리가 시끄럽다고 로프를 끊고, 인터넷 애프터서비스(AS) 기사를 살해하고, 층간 소음 시비로 이웃을 죽이기도 한다. 지금 우리에게 ‘미용고사’의 마음이 필요한 게 아닐까? 문득 양익준이 그립다. 지승호 인터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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