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독립영화, 극장 습격 사건

394
등록 : 2002-01-23 00:00 수정 :

크게 작게

유료관객 찾아나선 <이소룡을 찾아랏!> <사자성어>… 새로운 제작·배급시스템의 서막

독립영화 두편이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나란히 개봉한다. 이제는 인디밴드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스타가 된 ‘크라잉 너트’가 주연한 <이소룡을 찾아랏!>이 1월26일 서울 아트선재센터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개봉하는 데 이어, ‘섹스’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영화 <사자성어>가 28일 라이코스, 코리아닷컴 등 인터넷 극장에서 유료상영을 시작하고 2∼3월 사이 극장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흥미로운 건 제작의 면면이다. <사자성어>에 참여한 4명의 감독들은 현재 독립영화계에서 내로라 하는 ‘거두’들이다. 단편영화로는 보기 드문 완성도와 남다른 감수성을 보여준 <슈가힐>과 <굿 로맨스>를 내놔 최근 충무로가 영입해간 이송희일 감독, <둘 하나 섹스> <돈오> 등 성에 관한 파격적인 접근으로 번번이 등급보류 판정을 받으며 등급보류 규정에 대한 위헌결정까지 받아낸 이지상 감독,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 <샴, 하드 로맨스>에서 엽기성을 넘어 하드코어에 근접한 도발성을 보여준 지하창작집단 파적의 김정구 감독, 그리고 프랑스 유학을 거쳐 오래도록 단편영화를 만들며 탄탄한 실력을 쌓아온 유상곤 감독 등이 총 2억5천만원의 제작비로 네편을 만들었다.

‘삼박자’가 만들어낸 작품


<이소룡을 찾아랏!>은 독립영화계와는 또다른 독립예술가들의 합작품이다. 인디음악의 구심처가 돼온 클럽 드럭이 1억원가량의 제작비를 댔고, ‘문화유목민 집단’ 몽골몽골의 강론씨가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아 록다큐멘터리, 미스터리 구조, 정지 화상의 연속 편집 등을 섞은 실험적인 복합 장르를 만들었다. 몽골몽골은 각기 다른 나라의,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극히 독립적인 예술행위를 하는 집단이다. 여기에 펑크밴드 크라잉 너트가 가세해 음악영화의 면모까지 갖췄다.

일부러 일정을 맞춘 것도 아닌데 두편의 독립영화가 동시에 유료관객을 찾아나선 것을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나 홀로 자본과 인력으로 만들어지는 독립영화는 처음부터 극장개봉을 염두에 두고 제작하기가 곤란하다. 화제속에 개봉됐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고추말리기>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 등도 그랬다. 독립영화 감독이 1인다역의 슈퍼맨 노릇을 해야 하지만, 과점화된 극장 배급망을 뚫고 홍보까지 겸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제작비에 맞먹는 최소 1천만원가량의 마케팅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필름으로 찍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제작비가 억대를 넘어설 수밖에 없지만, 디지털카메라로 만든 <고추말리기>와 <대학로에서…>는 1천만원을 넘지 않았다. 제작비 20억∼30억원에 마케팅비 5억∼10억원 정도는 기본으로 생각하게 된 주류 영화판에서 보면 이건 하품 나올 일이다.

하지만 이들 세 작품은 모두 극장에서 개봉하는 ‘사건’을 만들어냈다. 때맞춰 삼박자가 맞아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인츠닷컴, (주)인디스토리 등 독립영화 고유의 제작·배급시스템을 갖추려는 회사가 앞장섰고, 하이퍼텍 나다·아트선재센터·아트큐브 등 일반 개봉관과 차별화 전략을 꾀하는 극장이 존재했으며,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장편영화 배급지원 사업이 실질적인 힘이 됐다. 웬만한 상업영화보다 재밌고 새로웠던 <죽거나…>는 손익을 쉽게 넘겼지만, 단 1개의 극장에서 개봉한 <고추말리기>와 <대학로에서…>는 2천여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데 그쳤다. 하지만 손해본 건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일관된 이야기다. 인츠닷컴의 김정영 사업부장은 “지난해 <죽거나…>의 극장개봉을 추진할 때, 완성도 높은 독립영화가 독자적으로 배급·개봉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봤는데 이런 시스템이 안정화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독립영화 제작·배급사, 극장, 영진위 지원의 ‘삼박자’ 말고도 젊고 역량있는 감독이 갈수록 양산되고 있고, 와·라·나·고(<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를 묶어 한 극장에서 번갈아 상영하는 방식)의 흥행에 탄력이 붙는 것처럼 관객의 저변도 탄탄해 보인다는 것이다. 독립영화계와는 또다른 공간 속에서 만들어진 <이소룡을 찾아랏!>이 배급사를 찾지 못해 개봉이 연기되다 장·단편 독립영화를 전문적으로 배급하는 인디스토리를 만나 관객과 만나게 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상업영화의 스펙트럼 확대

<사자성어>는 처음부터 ‘독립영화로 만드는 상업영화’를 지향했다. (주)외눈거인의 김일권 프로듀서는 “독립영화 마인드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제작비를 회수하고 재투자가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려는 의도에서 출발해 감독들의 동의를 이끌어냈고, 여기에 상업성이 있다고 본 스타맥스와 KGI증권으로부터 각각 1억원씩의 투자를 받아냈다”고 말했다. 옴니버스를 이룰 네 작품을 각기 찍으면서 스태프와 배우를 공유한 것도 제작비를 줄이는 1차 목적 이외에 시스템화를 꾀하려는 측면이 있다. 김정구 감독의 <하지>의 남자 주인공이 이송희일 감독의 <마초사냥꾼>에서는 조연으로 나오는 식이다. 개봉관 잡기가 어려운 점을 감안해 인터넷을 통한 유료개봉을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새로운 환경을 개척하려는 실험이다.

이런 작업들이 아직은 단발적이어서 저예산을 들여 수익을 올린 뒤 재생산에 들어가는 순환구조를 만들기에는 미흡하지만, 제작과 개봉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80년대의 독립영화는 정치·사회적인 주장을 내는 매체적 성격이 강했지만 디지털 장비의 등장으로 비교적 손쉽게 제작이 가능해지면서 지금은 개인적인 의미가 더 강해졌다. 이렇게 해서 쏟아지는 단편영화 가운데 일부 검증된 감독들이 주류로 진입하고 상업영화들을 만든다. 하지만 거대한 시스템에서 자기 머릿속의 색깔을 분명히 내기에는 역량이 떨어진다. 독립영화의 독자적인 제작·배급구조는 이런 역량을 튼튼하게 쌓아가는 데 큰 구실을 할 수 있다. 상업영화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인디스토리 곽용수 대표)

섹슈얼리티에 대한 4가지 연구

4인4색의 영화 <사자성어>(四者性語)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유상곤 감독의 <바디>(body)다. 소아마비 소녀와 늙은 창녀가 목욕탕에서 만나 몸을 부닥치고 닦아주면서 따뜻한 교감을 나누는 이야기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한 몸들이 한순간이나마 어느 지점에서 상호이해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를 섬세한 영상 속에서 실감할 수 있다. 소아마비 소녀가 육체적으로 결핍을 느끼면서도 자기 몸 속에서 솟아나는 성적 욕구를 느끼는 장면이나, 반대로 과잉된 몸의 거래 속에서 육체도 마음도 피곤한 중년 여성의 일과를 들춰내는 솜씨가 정감있게 다가온다. 이들이 목욕탕에서 마주친 뒤 서로를 의식하게 되고 은근히 서로의 몸을 느끼고 위로받는 장면은 꽤 길지만 아주 정교해서 앞뒤 맥락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를 동성애 코드로만 바라본다면 오히려 그 폭을 좁히는 해석이 될 지경이다.

<원적외선>을 만든 이지상 감독은 번번이 ‘검열’ 때문에 곤욕을 치르느라 이번에는 표현의 수위를 어디까지 할지 고민했다고 하지만 네 작품 가운데 가장 적나라하다. 실제로는 노동일을 한다는 소리꾼을 섭외해 뽑아낸 텁텁한 노래자락을 배경에 깔고 춘향과 몽룡, 변강쇠와 옹녀에게 흥건한 정사를 코믹하게 벌이게 한다. 춘향이가 변사또를 유혹해 질펀하게 놀다가 암행어사로 출두한 몽룡을 농락하는 에피소드 앞뒤로 에로비디오 뺨치게 방사를 벌이게 하는 식이다.

<마초 사냥꾼들>은 커밍아웃한 영화감독 이송희일씨의 정체성이 흠뻑 묻어나는 작품이다. 남성우월주의, 남근중심주의에 대한 조롱이자 경고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정쩡한 여장 남자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춤을 춘다. 공개적으로 마초를 징벌하는 장면인데 이를 안티마초닷컴 사이트를 통해 중계한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들어온 신고를 토대로 마초 사냥에 나서는 이들은 레즈비언 미현, 페미니스트 수희, 드랙 퀸 마리, 게이 기영과 영무 등 성적소수자와 약자들. 여자친구를 성추행했다가 이들의 징벌을 받은 해병대 출신 사내가 옛 군대 동료들과 함께 마초 사냥꾼을 사냥하러 나서면서 긴장감이 조성된다. 의리와 집단의식으로 똘똘 뭉친 해병대 출신들이 여장 남자로 꾸며지는 치욕을 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 ‘전우’를 비웃는 장면 같은 것으로 남성우월주의의 허약한 기반을 풍자한다. 스릴러적 구성을 취해 긴장감을 주려고 하면서 주제는 너무 단선적으로 드러내는 게 흠이다.

<하지>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가장 낮이 긴 여름날을 뜻하는 동시에 이런 대사를 뜻하기도 한다. “(섹스) 할까?” “그럼, 하지.” 맞선에서 만난 평범한 남자와 여자가 쑥스러워하며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한 뒤 자연스레 섹스를 시작한다. 상상으로 가능할 영화 속의 이런 세계에서 섹스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오히려 건조해진 인간관계를 상징할 정도다. 맞선 본 두 남녀는 긴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만나는데,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여자가 남자의 성기를 만지는 게 자연스러운 세상이다. 김정구 감독은 “성욕을 자극하는 섹스장면이 아니라 건조한 섹스를 통해 성욕을 오히려 감퇴시킬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