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영화/ 참을 수 없는 욕망, 그리고 현실

325
등록 : 2000-09-06 00:00 수정 :

크게 작게

큐브릭 영화인생의 마침표 <아이즈…>가 남긴 것은 인간에 대한 서늘한 통찰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스탠리 큐브릭’의 이름에 이어 ‘아이즈 와이드 셧’이라는 제목이 뜨고 나면 한 여인이 등을 돌린 채 옷을 벗고 있다. 대리석으로 깎은 듯한 여신의 몸을 지닌 이 여인은 니콜 키드먼이 연기하는 부유한 상류층 여인 앨리스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은 처음부터 관객을 도발하고 희롱한다. 관객이 욕망을 느꼈던 니콜 키드먼의 몸은 영화 속 남편 빌을 연기하는 톰 크루즈에게는 그저 그런 일상의 풍경이다.

칠순 나이에 인간 내면으로…

화장실에서 요염한 속옷을 입고 “나 어때?”라고 앨리스가 말할 때 그 눈부신 자태에 관객은 까무러칠 지경이지만 남편 빌은 건성으로 “좋아”라고 대꾸할 뿐이다. 두 사람의 눈빛은 마주치지 않는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뉴욕 상류층 선남선녀의 내밀한 화장실 풍경을 엿보는 샛꾼 입장으로 관객을 몰아넣고도, 영화는 아무렇지 않은 듯 툭 처음부터 주제를 던진다. 우리가 엿보는 <아이즈 와이드 셧>의 영화 속 정경은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에게 그것은 심드렁한 일상사일 뿐이다. 가만, 그런데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은 실제로도 부부 사이다. 스탠리 큐브릭은 앨프리드 히치콕과 맞먹는 짓궂은 심술기를 지닌 거장이다. 만인의 부러움을 받는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의 스타 이미지를 희롱하면서 현실과 욕망의 메워지지 않는 간극을 건드린다.


46년 동안 불과 13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좌절한 이상주의의 속껍질을 감추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의 대다수 영화는 걸작 대접을 받았다. 그런 큐브릭이 작품세계를 찍는 마침표로 소소한 부부 얘기인 <아이즈 와이드 셧>을 택한 것은 좀 의외다. 이 영화는 언뜻 형식의 혁신과 거리가 멀고 얘기도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오해를 주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종말론적 풍자와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도가적 명상, <풀 메탈 재킷>의 피아의 구분이 없는 군국주의의 파괴성에 주목한 큐브릭은 칠순의 나이에 사랑을 얻기 위해 쾌락과 고통으로 떠는 인간의 내면으로 돌아갔다.

뉴욕 상류층 부부의 성적 일탈과 환상을 담은 <아이즈 와이드 셧>은 직선으로 쭉 뻗어가는 줄거리 전개가 느리다. 구태의연하다는 느낌을 주겠지만 최면을 걸듯이 이미지를 겹겹이 포개놓았기 때문에 눈이 바싹 긴장하게 된다. 빌 하포드와 앨리스 부부가 빌의 친구 지글러가 주최하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외견상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아보이는 이 부부 내면의 균열된 관계에 조금씩 다가간다. 파티에서 앨리스와 빌은 서로 다른 상대를 만나 히히덕거린다.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파티의 여흥을 지우지 못한 두 사람은 마리화나를 피우고 함께 침대에 들고 앨리스는 지난해 여름 휴가 때 느꼈던 충동, 한 해군장교의 매력에 반해 어느 한순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 남자를 따라가고 싶었던 심경을 고백한다. 갑자기 사망한 환자의 소식을 듣고 집을 나온 빌은 그날 밤 내내 앨리스가 실제로 장교와 정사를 나누었을 것이라는 환상에 시달리고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뉴욕의 밤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 창녀의 유혹. 마치 모든 일이 꿈처럼 스쳐 지나간 뒤 재즈 카페에서 대학 동창 닉을 우연히 발견한 빌은 닉에게서 회원들만 참석할 수 있는 비밀 난교파티의 초대암호를 빼앗아 들고 그곳으로 간다.

현실과 환상의 교묘한 교란

앨리스가 실제로 외간남자와 관계를 맺었다고 믿는 빌의 생각이 환상인지 실제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결혼이라는 가장 안전한 제도 속에서마저 흔들리는 등장인물의 균열된 삶을 되짚어낸다. 부부관계를 마음으로 배반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것이 믿을 만한 관계이고 가치를 의탁할 만한 관계라고 믿고 있는 등장인물의 마음 자체가 이미 이율배반적이며 동시에 초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혼란스런 마음에 취한 빌이 뉴욕의 밤거리에서 겪는 일들과 난교파티조차도 궁극에는 어느 선까지 현실이고 환상인지 모호해지게 된다. 큐브릭은 시의 운율처럼 각운을 맞추며 현실과 꿈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계산된 리듬으로 부숴버린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낯선 남자와 춤을 추다 “무지개가 어디서 끝나는지 아세요?”라고 몽롱하게 읊는 앨리스의 대사는 다음날 저녁 가면을 쓴 난교파티에 가기 위해 빌이 들르는 ‘무지개’라는 이름의 이상한 옷가게 이미지와 겹쳐진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현실의 불안정함을 능숙하게 건드리고 흔들거리게 만드는 판타지다. 이 영화에서 큐브릭은 그가 평생 쫓았던, 표현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응축하고 있다. 제도와 가치와 욕망의 실체는 무지개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것이며 그것을 꿈꾸는 것도 냉소하는 것도 다 웃기는 짓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근사한 화해의 말을 나눈 뒤에 니콜 키드먼이 연기하는 앨리스는 말한다. “이제 우리 X하러 가자.” 그것은 선사의 잠언과 맞먹는 둔중한 충격을 준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노인의 눈으로 찍은 영화답지 않게 무척 관능적이며 그런 영화의 외피에 새겨놓은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이 외면하고 싶을 만큼 서늘하다. 큐브릭은 미국의 이상적인 남성을 대변하는 톰 크루즈를 비정상적인 환상에 휘말려 들어가는 인물로 묘사했으며 히치콕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정숙하고 단정해보이는 니콜 키드먼의 요염한 나체를 처음부터 공개함으로써 이성을 교란시킨다. 특히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특유의 염세적인 암시를 새겨넣은 영화의 결말은 잊기 힘들 것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숨은 이야기, 촬영에서 개봉까지

스탠리 큐브릭은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소설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꿈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71년 한 프랑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토대로 제작비를 많이 들여 대스타가 등장하는 특급 포르노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대상황과 제작여건 때문에 오래 구상만 했던 큐브릭은 결국 아카데미 수상경력이 있는 프레드릭 라파엘과 이 영화의 각본을 공동 각색했다. 19세기 말의 빈을 20세기 말의 뉴욕으로 무대를 옮긴 것을 빼면 비교적 원작을 충실히 화면에 옮긴 <아이즈 와이드 셧>은 큐브릭의 악명 높은 비밀주의 때문에 숱한 억측을 낳았다. 심지어 톰 크루즈가 여장을 하고 집단 난교를 벌이는 장면을 촬영했다는 소문도 비교적 신빙성 있게 언론에 돌아다녔다.

영국의 파인우드 스튜디오에 뉴욕 맨해튼 거리의 세트를 짓고 들어간 <아이즈 와이드 셧>의 촬영 동안에 영화 내용을 비밀에 부치기로 유명한 큐브릭은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미리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했다. 큐브릭이 현장에 있는 사진이 언론에 노출되자 큐브릭은 촬영장의 담벼락을 더 높이도록 제작사에 요구했다. 그러나 촬영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배우 하비 카이틀은 2주일씩이나 기다려 오디션을 받는 정성을 보여 참가한 <아이즈 와이드 셧> 촬영 6개월 만에 ‘예술적인 의견의 불일치’를 이유로 들어 현장을 떠났다. 단역으로 출연한 제니퍼 제이슨 리도 큐브릭의 재촬영 요구를 받았지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신작 <엑시스텐즈>의 촬영 일정과 겹쳐 불응하는 바람에 중도 탈락했다. 두 사람의 자리는 영화감독 시드니 폴락과 <최선의 의도>에 출연했던 마리 리처드슨이 대신 메웠다. 스타 배우인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도 <아이즈 와이드 셧>의 15개월 촬영기간 동안 큐브릭식 연기연출방법을 혹독하게 익혔다. 크루즈는 곧잘 밤에도 현장에 불려나갔고 심지어 어떤 장면은 100번을 다시 찍었다. 큐브릭은 또 “톰, 나를 자극시켜 보게나. 내가 자네를 스타로 만들어주겠네”라고 말했다. 몸살을 앓고 돌아온 니콜 키드먼에게 큐브릭은 오히려 체중이 불어난 것 같다고 나무랐다.

마침내 완성된 영화의 1차 편집판을 큐브릭은 톰 크루즈 부부, 워너브러더스의 공동회장이었던 테리 시멜과 로버트 댈리가 볼 수 있도록 뉴욕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비밀 시사가 열린 3일 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큐브릭이 과연 완전히 최종편집을 끝낸 것인지 의문을 표했다. <빌리지 보이스>의 짐 호버먼은 최종편집과 음악을 큐브릭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아이즈 와이드 셧>을 큐브릭의 영화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워너와 같은 계열사인 <타임>이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칭찬한 것을 두고 후안무치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워너의 회장 시멜은 “큐브릭의 최종편집이 틀림없다”고 장담했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제작비가 6500만달러나 든 이 영화가 과격한 노출장면 때문에 혹시 NC-17(17살 미만 절대 관람불가)로 분류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일부 장면을 디지털로 합성해 노출 수준을 완화시켜 R등급을 받았지만 홍보문구까지 직접 챙기는 것으로 유명한 큐브릭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났을지 의문이다. 한국에서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체모 노출로 등급위에서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던 이 영화는 체모 노출장면을 가리는 조건으로 마침내 개봉한다. 화면에 손을 대느니 개봉하지 않는 쪽을 택했던 큐브릭은 어쩌면 지금도 하늘에서 눈을 부릅뜨고 못마땅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