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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발랄해진, 따뜻해진 노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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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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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지배하던 시절, 시청자의 가슴을 두드리는 청춘의 사랑 <화려한 시절>

사진/ '빠다'란 별칭의 민주를 사랑하는 철진. <화려한 시절>은 상쾌하면서도 뭉클하게 시정차의 가슴을 두드린다.
에스비에스 <화려한 시절>(극본 노희경, 연출 이종한, 토·일 밤 8시50분)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으면 이같은 문구를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다. “청춘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아름답다.” 과연 그런가?드라마의 주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이 말에 혹자는 고개를 주억거릴 터이고 또 일부는 도리질을 칠 터다. 아마도 긍정하는 쪽은 이미 인생의 후반전에 접어들어 청춘을 회고의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들일 것이다. 만약 바로 지금 ‘리얼타임’으로 혼란과 격정이 교차하는 그 시기를 관통하고 있다면 ‘아름답다’는 정의에 순순히 동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

드라마가 ‘화려한 시절=청춘’을 비추는 시점은 70년대, 가난이 모든 걸 지배하던 시기다. 주인공은 가난하지만 희망이 있고 가족도 있어 행복한 이들로, 가진 것이라곤 젊음과 패기뿐인 두 형제 석진(지성)과 철진(류승범), 그리고 두 형제의 사랑을 받는 ‘빠다’란 별칭의 민주(박선영), 철진을 졸졸 쫓아다녀 ‘철진 껌딱지’로 불리는 버스안내양 연실(공효진) 등이다. <화려한 시절>은 이들 네 청춘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중심으로 그 시대 서민들의 다양한 군상을 오밀조밀하게 보여주며 잔잔한 인기를 끌고 있다. 1월20일 24회를 방송했으니 50부작의 이 드라마는 이제 중반부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시청률 20% 전후의 성적을 거둬왔는데 이 정도면 작품성과 인기를 모두 품에 안았다고 말하기에 계면쩍진 않다.


방송 전이나 지금이나 이 드라마가 관심을 모으는 주요 동인은 작가 노희경에게 있다. <내가 사는 이유>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이상 문화방송), <거짓말> <바보같은 사랑> <슬픈 유혹>(이상 한국방송) 등을 통해 ‘컬트 드라마 작가’란 별칭을 얻은 노희경은 방송가에서 손꼽히는 신뢰도 높은 ‘브랜드’다. 그의 드라마에 매료당한 시청자들은 커뮤니티를 형성해 방송이 끝난 뒤에도 휘발되지 않는 여운으로 남기고 있다. 줄을 쳐가며 대본을 읽으면서 주옥 같은 대사를 가슴에 새긴다는 이도 있고, 연기자의 목소리만 따로 녹음해 듣고 또 들으며 곱씹는다는 이도 있다.

그런데 <화려한 시절>은 이상열기를 낳은 노희경 작품의 변신을 보여준다. 방송 전 그는 “<바보같은 사랑>이 1%의 시청률로 추락했을 때 참 슬펐다”고 얘기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드라마를 통해 소통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리고 <화려한 시절>의 등장인물들을 모두 행복하게 그리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그래서일까. 이 드라마는 노희경의 작품답지 않게(?) 인기가 좋고, 신랄한 맛 대신 온기가 넘쳐난다. 주인공을 둘러싼 서민 군상들은 정겹고 흥겹기가 이를 데 없다. 등장인물 가운데 그나마 차가운 매력을 지닌 민주도 방송 초반엔 <우리가…>의 재호(배용준)처럼 정체를 위장해 대학생으로 행세하며 신분상승의 욕망을 분출했지만 결국은 사랑이란 놀라운 바이러스 덕분인지 착실한 아가씨로 변모해 눈물겨운 순애보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양공주의 딸인 민주와 가난한 엘리트 고시생인 석진의 러브스토리는 신파조의 상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

복고, 그 이상의 힘

대신 이 드라마에서 청춘의 긍정적인 속성을 벅찰 만큼 생동감 있게 표출하고 있는 인물은 철진과 연실이다. 형의 애인인 줄 모르고 ‘빠다’(민주)에게 “너 없으면 못 산다”고 사랑을 호소하는 철진의 거침없는 직설화법, 그런 철진에게 온갖 구박을 당하면서도 자존심 재지 않고 애정을 표시하는 연실의 당당함 등은 상쾌하면서도 뭉클하게 시청자의 가슴을 두드린다.

미숙하지만 솔직하게 인간관계와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것, 그것이 화려한 시절이라 부를 수 있는 청춘의 미덕이 아닐까. 이들 덕분에 <화려한 시절>은 단순히 ‘나도 그땐 그랬지’라며 반추하는 것으로 끝내기에는 뒷맛이 오래 남는 퇴행적인 복고 이상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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