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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웅의 시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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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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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권력·몰락의 서사시… 중국사의 영웅들을 재조명하는 <패자> <패권> <여인천하>

사진/ 남자를 누르고 권력의 자리에 오른 여인들. 그들은 후대의 남성 사가들에 의해 폄하되기도 했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온갖 종류의 새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해도 그 매력이 사그라지지 않는 게 영웅담이다. 간난신고의 운명을 딛고 일어나 중원을 제패한 영웅이든, 하늘이 결정한 운명 앞에 결국 무릎을 꿇는 몰락한 영웅이든, 영웅들의 이야기는 가지런히 뛰고 있던 독자의 맥박에 어느 순간 작은 균열을 만들어놓는다. 영웅의 시대는 갔지만 한 시대의 영웅은 인간의 상상력에 마르지 않는 샘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남성 사가에 의해 강등된 여황제

최근 발간된 <패자>(覇者), <패권>(覇權), <여인천하>(솔출판사 펴냄)는 역사 자체가 릴레이 영웅담에 가까운 중국사의 영웅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일본의 출판 명문 고단샤(講談社)가 창사 90주년을 기념해 1997년 기획한 <중국의 군웅> 한국어판으로, 2000년 <영웅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완역됐던 전체 10권 가운데 일부를 단행본으로 새롭게 발간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중국 역사소설가 진순신(陳舜臣)과 대규모 집필진이 완성한 <중국의 군웅>은 <사기> <삼국지> <초한지> 등 ‘이십오사’(二十五史)를 기본 토대로 중국 고대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영웅 32명의 생애를 재현한 열전 형식의 글이다.


이번에 소개된 세권 가운데 우선 눈길을 끄는 책은 최근 인기있는 드라마와 같은 제목의 <여인천하>다. 한(漢)고조 유방의 아내로, 유방의 죽음 뒤 한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던 여후, 중국 사상 유일하게 스스로 황제가 된 유일한 여성인 무칙천, 그리고 ‘미인’의 대명사로, 그러나 당의 몰락을 재촉한 ‘요부’로 후세에 전해지는 양귀비, 세 사람의 삶을 조명한다.

여기서 지은이는 일반적으로 ‘측천무후’로 부르는 무칙천을 ‘여제 무칙천’, 즉 황제로 자리매김한다. 대부분의 저작물에서 지칭하는 ‘측(칙)천무후’란 “그녀가 고종의 황후였다는 사실만을 표면에 세워” 당나라의 적통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후대 역사가들이 그의 지위를 강등시킨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방관리의 둘째딸로 태어난 무조(무칙천)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태종이 죽자 그의 아들 고종의 후궁이 된다. 당시 왕이 죽으면 후궁들은 비구니가 되어 죽을 때까지 세상으로부터 유폐됐다. 왕의 사생활을 시중에 새어나가게 하지 못하려는 정치적인 고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후궁으로 있을 당시 별다른 사랑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고종과 모종의 끈을 맺고 있던 무조는 예외적으로 운좋게도 궁궐 입성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무조는 온갖 권모술수를 구사해 이미 있던 황후를 없애고 황후 자리에 오른 뒤 병약하던 황제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자신의 지위에 위험이 될 수 있는 반대파들을 가차없이 멸족시키면서 권력을 다진 무후는 자신의 아들인 태자 홍마저 없앴다. 평소 명민함으로 자신에게 거침없이 간언을 하며 자신의 위치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 태자가 된 현 역시 역모를 꾸몄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몰아붙여 결국 그의 나이 63살에 중국 역사를 통털어 전무후무한 여황제로 등극한다.

무칙천은 과연 중국 최악의 마녀이자 악귀였을까? 지은이 역시 공포의 밀고정치로 널려 알려진 무칙천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임은 인정한다. 그러나 46년의 통치기간 동안 나라 안팎의 위세가 잠시라도 동요한 적 없다는 사실과 당조 300년을 통틀어 그 판도가 최대로 확장되었던 것이 무칙천 치세하였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항우에게 쫓기던 유방이 급한 마음에 함께 수레를 타고 가던 자식 둘을 두번이나 길바닥으로 내던졌듯이 자신의 목숨과 권력 유지를 위해 친자식이나 육친도 모살하는 예는 제왕들에게서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무칙천의 경우는 여자이기 때문에 ‘진통을 겪고 낳은’ 친자식도 죽인 그 ‘잔인성’이 특히 선전되었다”는 것이다.

완벽한 무사 항우의 비극

사진/ 중국역사를 주름잡은 영웅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양귀비, 항우, 여제 무칙척, 유방.
천하의 미인이자, 천하의 요부로 후대에 남은 양귀비에 대한 평가에도 남성중심적 시각을 벗어나려는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아들의 부인이었던 양귀비를 현종이 후궁으로 취하면서 두 사람이 누린 엄청난 사치와 영화, 그리고 비극적 최후를 묘사하는 작품이 많이 나왔지만 모두 “양귀비는 나라를 뒤흔들고 기울게 한 여인이다”라는 관점에 서 있다. 문장가들이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남성 주도의 사회에서, 남성들 자신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해온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양귀비는 “권력에 농락당한 젊은 미희에 불과”했을 뿐, 나라의 존망을 뒤흔든 ‘안록산의 난’을 초래한 최고 책임자는 현종이라는 게 지은이의 결론이다.

<패권>은 진(秦)말기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 의기투합했다가 결국 서로의 가슴에 칼끝을 겨눠 “두 영웅은 양립할 수 없다”는 역사의 진실을 보여준 항우와 유방의 삶을 그린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배경과 모습, 그리고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뼈대있는 무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항우는 8척(약 185cm)의 장신으로 어릴 때부터 패기와 용맹을 떨친 야심가였다. 반면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유방은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별달리 하는 일 없이 장가도 가지 못한 채 술집을 전전하는 한량이었다. 전장에서 항우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적군을 얼어붙게 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무사였지만 유방은 지인들에게조차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다 생각되면 두말없이 그대로 줄행랑을 치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다만 겁쟁이로 비칠 정도의 신중함과 무리없는 성격, 그리고 출신 배경에서 연유하는 사람에 대한 차별없음은 항상 그의 주변에 따르는 무리를 만들었다.

중국 고대사회 읽는 재미

초창기 잘 훈련된 군사를 이끌고 있는 항우는 승승장구했던 반면, 농민과 부랑자들로 구성된 오합지졸 군대를 이끌던 유방의 군대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포로 수십만명을 그 자리에서 생매장시킬 정도로 성격이 다급하고, 가장 가까운 참모조차 믿지 못했던 항우는 결국 유방의- 실은 유방이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참모들의- 지략에 말려들어 결국 사면을 둘러싼 유방의 군대가 부르는 초(楚)노래(四面楚歌)를 들으며 자결을 준비해야 했다. 천하를 제압한 유방은 한(漢)의 시조가 됐고, 항우는 몰락한 영웅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완벽한’ 무사로서 항우는 <삼국지>의 관우의 모델이 되어 그 비극성으로 인해 더욱 매력적인 영웅으로 남아 있다.

시리즈의 첫편에 해당하는 <패자>는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에 이어 두 번째로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진(晉)의 문공과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오(吳)왕 부차와 월(越)왕 구천, 그리고 군웅이 할거했던 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천하를 통일해 중국 최초로 황제가 된 진(秦)의 시황제를 소개한다. 각권의 첫장에는 역법, 한시, 전족 등 중국 고대사회의 이해를 위한 에세이가 담겨 있어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시리즈의 나머지 권들도 조만간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 각권 8천원.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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