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필름의 고향, 충무로를 기리며…

325
등록 : 2000-09-06 00:00 수정 :

크게 작게

추억만 남아있는 한국영화의 산실…시대를 풍미한 원로들은 어디로 갔나

시대를 풍미한 원로들은 어디로 갔나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 안. 베레모를 눌러 쓴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들에서 한껏 멋을 부린 젊은 이들로 가득하다. 문을 열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눈인사가 지나간다. 한쪽 테이블에서 두툼한 시나리오 뭉치를 펼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양아치 냄새 폴폴 나는 배우 지망생이 일어나 괜스레 다방 안을 한 바퀴 돈다. 다방이 문 열 무렵 들어와 계란 노른자를 띄운 커피 한잔을 시킨 부스스한 몰골의 감독 지망생은 끝이 다 떨어진 종이에 만년필로 끼적대며 문 닫을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온몸을 금붙이로 휘두른 지방 흥행사 앞에서 제작자의 애타는 한숨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60년대 영화인들의 사랑방,스타다방

(사진/충무로에서 탄생한 역대 흥행작들.60년대 <미워도다시한번>(정소영감독·68년 맨위). 70년대 <겨울여자>(김호선감독·77년 가운데). 80년대<깊고 푸른밤>(배창호감독·85년) )

이제 원로가 된 영화인들과 영화지망생들은 충무로3가, 영화사들 사이에 자리잡았던 스타다방을 잊지 못한다. 한국영화의 전성기라 불리는 60년대 스타다방은 영화인들의 사랑방이자 계약이 성사되는 사무실이었고 새로운 인력을 수급하는 시장이기도 했다.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의 연구생으로 있을 무렵부터 연습이 끝나면 스타다방으로 직행했습니다. 물론 그것도 커피값 50원이 주머니에 있을 때만 가능했지만요. 스타다방만 가면 영화판의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저같은 배우 지망생들은 가서 감독이나 제작가 눈에 띄려고 무진 애를 썼지요. 스타다방 앞은 소녀들에서 시골에서 도시락까지 싸온 촌로들이 배우들을 구경하려고 언제나 북적였습니다. <맨발의 청춘>을 찍고 스타다방에 갔을 때 사람들이 제 주위에 몰려들자 ‘야, 이제 나도 인기배우구나’ 하고 실감할 정도였으니까요.” 60년대 청춘영화붐과 함께 뜬 트위스트 킴(64·본명 김한섭)씨의 회고다.


서울시 중구 충무로3가. 한국전쟁 이후 한국영화와 동고동락해온 이 좁은 거리는 한국영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한국영화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지금 이 거리의 영화적 기능은 퇴역한 군인처럼 쇠락했지만 여전히 충무로라는 이름은 한국영화의 대체명사로 살아 있다. 젊은이들은 여전히 ‘충무로 입성’을 꿈꾸고, 영화인들은 ‘충무로판’에서 성공과 좌절을 경험한다.

50년대 중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말이 없이 앞만 보고 다녔다. 전쟁의 악몽은 여전히 사람들을 쫓아다녔고 사람들은 정신적 공황상태를 치유해줄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조미령을 한국 영화사의 1대 춘향이로 등극시킨 <춘향전>(1955)이었다. <춘향전>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한국영화가 기지개를 켜면서 충무로는 탄생했다.

충무로는 일제시대부터 문화예술인들의 거점이었던 명동 옆에 위치하면서 땅값은 더 싸고 사방이 국도극장과 수도극장(현 스카라극장), 단성사 등 대형극장으로 둘러싸여 영화인들이 모이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주거지역으로, 당시까지 남아 있던 일본식 적산가옥은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일하는 감독과 제작자들에게 편리한 업무 구조이기도 했다. 기술집약적인 영화산업의 특성도 영화인력을 한곳으로 묶는 데 작용했다. 한국영화가 발흥해서 안정기로 들어선 60년대 초까지 충무로3가의 좁은 골목은 80여개의 영화사가 빼곡이 들어섰다. 몇년 전 고인이 된 김인걸씨가 58년 세웠던 ‘한국배우전문학원’에는 스타의 꿈을 품고 상경한 풋내기 배우 지망생들로 가득 찼다.

한국영화사료수집가인 정종화(58)씨는 60년대 충무로의 활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빌딩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건물 하나에 10여 개의 영화사가 들어섰습니다. 한 사무실을 두세 영화사가 같이 쓰기도 했고요. 영화사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다들 다방에 가서 문을 닫는 밤 10시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휴대폰은 커녕 전화도 귀할 때라 충무로에 매일 나오지 않으면 정신없이 돌아가는 영화판을 따라갈 수 없었으니까요. 다방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고스란히 근처 대폿집으로 옮겨 술을 마시다가 통금시간이 되면 술병 들고 근처 여관으로 가는 날도 많았지요 ”

한국영화가 황금기를 구가했던 65년부터 70년까지 충무로도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63년 박정희 정권의 폭력적인 영화법 시행으로 영화사들이 10개 안팎으로 정리됐지만 여전히 이름을 빌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로 붐볐고 근처에는 수십개의 다방과 식당, 술집과 여관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전성기의 흔적으로 남은 다방과 여관

(사진/1956년 총2천석을 갖춘 국내최대규모로 개관한 대한극장.대형극장가운데 마지막으로 멀티플랙스 채비를 하기 위해 지난 5월 문을 닫았다(위). 70~80년대 피카라디,당성사와 함께 종로 트로이카를 구축했던 허리우드극장.97년 3개관으로 재개관했다)

대표적인 영화인들의 집결지로 스타다방 외에 청맥다방, 벤허다방, 초원다방 등이 언제나 시네마 천국을 꿈꾸는 이들로 들끓었다. “매일 아침이면 끝이 다 해진 시나리오 원고를 들고 제작자를 찾기 위해 다방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다방에 가면 이름은 잘 몰라도 눈에 익은 얼굴들이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얼굴이 안 보여서 마담한테 물어보면 죽었다는 대답을 듣기도 하고, 메가폰 한번 못잡아보고 젊은 날을 충무로 다방에서 보낸 청춘들도 허다했지요.” 58년 <공처가>로 충무로에 입성한 뒤 78년까지 90편의 작품을 만든 김수용(71) 감독은 그때 얼굴만 스쳐갔던 감독 지망생들의 어깨 한번 두드려주지 못한 게 아직도 못내 미안하다고 한다.

대원호텔, 동신여관, 라이온스여관 등 여관도 80여개나 들어섰다. 자가용 승용차가 귀했던 시절, 새벽촬영을 떠나기 위해 촬영진은 전날 여관에 모였다. 여관에서는 시나리오를 확보한 제작자들이 지방의 흥행사들을 모아놓고 마치 자신이 배우인 양 감정을 총동원해서 독회(讀會)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지방 흥행사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가난한 제작자들이 입도선매로 제작비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관에서 흘러나오는 스캔들도 충무로 사람들 사이에서 빠지지 않는 입담거리였다. “여배우와 여관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걸려 소문에 시달리고 가정불화까지 이른 감독이나 제작자도 많았지요. 배우하려고 충무로를 어슬렁거리다 부유한 흥행사들의 후처나 기둥서방으로 자리잡은 처녀 총각도 많았고….” 김 감독은 충무로 여관에서 벌어진 비사만 써도 책 한권을 될 거라며 웃는다. “그래도 그때는 다들 한식구 같았지. 차비만 달랑 들고 나와도 아는 사람만 만나면 밥도 얻어먹고, 흥행에 실패해서 축 늘어져 있으면 다들 지나가면서 격려도 해주고, 또 선뜻 다시 해보자고 나서는 제작자들도 많았어요.”

60년대 후반 충무로에서는 일년에 200여편의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잘 나가는 영화사는 연초 신문에 십여편에 이르는 일년치 촬영 스케줄을 광고로 내면서 위세를 자랑했다. 흥행감독과 인기배우는 겹치기 촬영도 다반사였다.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신성일씨는 500여편의 출연이라는, 한국영화의 미래에도 깨지기 힘들 출연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70년대 텔레비전 수상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충무로의 뜨거웠던 체열은 식기 시작한다. 영화업 등록제를 허가제로 바꾸고 시설과 촬영기재 등에서 엄격한 허가기준을 정해 충무로 영화사를 14개로 줄여버린 73년 영화법 개정은 충무로에 찬물을 부은 격이었다. 외화유출을 막고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만든 외국영화 수입권은 우리 영화발전에 족쇄가 됐다. 제작자들은 수입권에만 매달려 극장개봉을 애당초 포기한 날림영화 제작에 급급했다. 한국영화계의 르네상스 때 정점에 서 있던 신필름이 75년 문을 닫았다. 충무로를 배회하던 배우지망생들은 뜨기 시작한 방송사로 몰려갔다. 71년에서 81년까지 서울에서만 40개의 극장이 문을 닫았다.

80년대까지 질기게 이어진 한국영화의 불황은 85년 개정영화법으로 타개국면에 들어섰다. 영화사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다시 바뀌자 충무로에서는 86년 한해에만 130개의 영화사가 들어서면서 다시 활기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80년대 말 비디오시장 확장을 위해 영화업계에 들어선 대기업이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제작판에 들어서면서 충무로는 결국 회생불가능의 몰락에 이르게 된다.

삼성, 대우, 현대 등 대기업에서 대자본으로 젊은 영화인들을 대거 영입하자 충무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 130여 영화사 가운데 100개 이상이 문을 닫았다. 한해 500억∼600억원의 적자를 감수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대기업이 IMF를 맞으면서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이미 영화판은 합리적으로 영화를 공부한 신진영화인들이 장악했고 영화사들은 강남으로 대거 이전했다.

87년 충무로에 설립돼 아직 충무로를 지키고 있는 시네월드의 이준익(41) 대표는 대기업 진출 직후 충무로를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유했다. “한국영화판은 ‘애비 없는 자식’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기업이 들어오면서 낡은 영화제작방식이 사라지고 유능한 인력들이 많이 들어와 새로운 활력이 생긴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외국처럼 50∼60년대 감독들이 존경받으면서 신세대들에게 정신적인 유산을 남기는 전통이 사라진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충무로의 영화, 그 현재적 의미는

(사진/정부의 영상산업 육성책으로 97년 문을 연 경기도 양수리 서울종합촬영소. 60~70년대 제각기 촬영장을 운영하던 영화사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세트 촬영을 한다)
이제 충무로는 더이상 영화인의 거리가 아니다. 90년대 중반 이후 충무로는 사진작가와 출판인들의 터로 변했다. 영화사들이 들어섰던 극동빌딩 뒤편 좁은 골목에는 인쇄소, 그래픽 센터, 그리고 출력소들이 옛날 영화사들이 서있던 자리에 들어섰다다. 그 옛날 영화인들의 쉼터였던 다방도 모두 사라지고 대신 세련되게 장식한 커피숍들이 등장했다. 대원호텔은 대원오피스텔로 바뀌었다. 아직도 60년대 충무로를 기억하고 있는 곳은 몇몇 식당들 뿐이다. 새벽부터 촬영준비에 바쁜 제작진에게 뜨거운 밥을 퍼주던 대원호텔 옆 보은집과 장호집, 그리고 설렁탕집 제일옥과 스카라 극장 뒤 사랑방칼국수집만이 옛날의 향수를 잊지 못해 가끔씩 들르는 나이든 영화인들을 따뜻하게 반길 뿐이다. 젊은 영화인들에게 밀려난 원로들은 요즘도 일주일에 한두번씩 충무로에 나오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한다. 60년대에는 없었지만 극동빌딩 지하의 극동커피숍이나 충무로 역 앞 맥주집 베어가든은 원로 영화인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다. 스크라 극장 앞 카페 파티에도 화려했던 시절의 파티를 회고하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이라도 충무로에 들를 수 있는 원로영화인들은 행복한 편이다. 차비가 없어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체의 반 이상 되기 때문이다.

트위스트 김도 설렁탕이나 칼국수를 먹으러 충무로에 이따금 들른다고 한다. “가끔 충무로에 들르면 꼭 만나는 얼굴이 있어요. 60년대 제작부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친군데 늘 충무로 한구석을 서성이거나 앉아 있는 모습을 부딪쳐요. 그러면 만원, 이만원씩 차비하라고 주면서 헤어지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영 착잡해집니다.”

한국영화가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는 요즘, 충무로 거리는 영화사의 한 귀퉁이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지금쯤이면 충무로의 영화를 기억하는 가난한 원로 영화인에 대한 영화계의 따뜻한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이장호 감독이 기억하는 충무로

충무로! 오랜만에 그 거리를 거닌다. 쌍룡빌딩 안에 있는 외환은행에 들러 독일에 유학하고 있는 아들에게 생활비를 보내는데 여기에 오면 죄송한 마음으로 저절로 어깨가 축 늘어진다. 영화 <미스코뿔소 미스터코란도>의 제작비 전액을 지원해준 쌍룡그룹의 김석원 회장에게 은혜를 갚지 못한 죄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당부했던 말이 마음 깊이 남아 양심에 걸린다. “연예계에 여러 차례 지원해 보았지만 보람이 없었다. 나로서는 마지막 기대이니 꼭 성공해서 좋은 결과가 있기 바란다.” 그러나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기대를 나의 무능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기가 죽은 채 쌍룡빌딩 옆 골목으로 들어선다. 영화제작의 원로 차태진 선생이 운영했던 ‘설미옥’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갑다. 노부인께서 아직도 직접 경영하고 계시는지? 설미옥을 끼고 오른쪽으로 접어든다. 40여년 전, 당시 유일했던 한국배우전문학원이 있던 자리,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신성일씨와 그리고 패션디자이너 앙드레김, 영화감독 정인엽씨가 한국배우전문학원 출신이다. 그 건너편, 나로서는 별로 역사가 깊지도 않는, 14년 전, 영화 <무릎과 무릎사이>와 <어우동>을 만들었던 태흥영화사가 있던 낡은 건물. 지금은 건물 전부가 인쇄소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나는 2년 가까이 혈기 왕성한 40대 초를 보냈다.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과 50:50의 좋은 조건으로 <무릎과 무릎사이>, 그리고 <어우동>을 만들어 내 생애 최초로 거금을 손에 쥐었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 근처 어딘가? 학생 시절의 아주 흐릿한 기억 속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한번 찾아왔던 적이 있는 신영균씨가 살던 집이 있을 터인데 골목 모습이 하도 달라져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다. 신영균씨 역시 지금은 야당 국회의원이어서 요새 젊은이들은 그가 왕년에 한석규보다 더 인기 높았던 슈퍼스타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몇 발자국 못가서 ‘사랑방칼국수’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도 여전한 모습. 한때 가난한 영화인들로부터 충무로에서 돈을 번 곳은 ‘사랑방칼국수’와 촬영기사 안창복씨의 ‘카메라 대여점’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부러움을 샀던 곳이다. 그만큼 싸고 맛있었던가?

곧 작은 광장(?)이 나온다. 한때 스타다방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는 충무로 영화판 사거리다. 문득 아는 얼굴이 마치 환상처럼 걸어온다. 환상이 아니다. 영화판 선배 김진문 사장. 악명만큼 공과도 많은 한국영화 역사에 닳고 닳은 얼굴, 반갑다. 충무로 한복판에서 우연치 않게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눈다. 그는 검은색으로 머리를 물들였는데 자란 만큼 흰머리가 드러났고 나는 모양을 낸다고 앞머리만 희게 탈색했는데 자란 만큼 갈색이 드러났다. 그나 나나 충무로에서 닳고 닳은 신세, 이젠 실세가 아니다.

충무로가 달라졌듯이 우리의 영화(榮華)도 달라졌다. 좌로 가면 청맥다방과 청맥녹음실, 그리고 한국영화제작자조합 사무실이 있던 곳, 영화판의 거물들이 각기 자기의 이익을 위해 거칠게 언성을 높이고 멱살잡이를 밥먹듯 했던 곳, 문화와 예술에 대해 무지했던 역대 정권들이 한국영화판을 대기업으로 바꾸어보겠다고 영화법도 바꾸고 영화진흥책도 만들어 애를 썼지만 결코 고집스러운 충무로 영화판을 독립프로덕션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했다. 결국 스물 몇개의 독립프로덕션만 독과점으로 돈은 벌게 했지만 대기업은커녕 땅장사 졸부로 만드는 데 그치고 말았던 충무로. 배고픈 엑스트라가 가득했던 충무로, 단역과 가난한 스탭들이 할 일 없이 커피를 축내던 충무로, 가끔은 환각처럼 돈 번 제작자나 인기 톱스타가 뜬금없이 나타나기도 했던 충무로. 옹기종기 영화사란 영화사는 몽땅 모여 있던 충무로, 그러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현란한 색의 인쇄소들의 낯선 모습만 분주하다.

누가 충무로를 영화인에게서 빼앗았는가? 그래도 철없는 영화판 술주정뱅이들은 실험실의 모르모트처럼 시행착오를 하는지 밤이면 추억의 충무로를 향해 깨닫지 못하는 사이 몰려든다. 슬픈 충무로의 밤이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