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이끈 젊은이들은 누구인가… <헐리웃 문화혁명>에 실려 있는 적나라한 뒷이야기들
콜럼비아영화사의 이사회 때 마리화나가 돌려지고, 워너브러더스에서는 오후 5시가 되면 마리화나 냄새가 1층까지 스며나올 정도가 됐다. 워너의 제작자 중 한명이었던 샌포드는 “마리화나와 LSD를 즐기는 것은 일종의 자산이었다. 우리는 모두 히피들이었다”고 한다. 이게 정말 가능했던 일일까? <프리미어> 편집자를 거쳐 <아메리칸 필름> 편집장을 맡았던 피터 비스킨드가 1998년에 출판한 <헐리웃 문화혁명>(시각과 언어 펴냄, 2만9500원)을 보면 이 정도는 ‘약과’다. ‘어떻게 섹스·마약·로큰롤 세대가 헐리웃을 구했나’라는 부제처럼, 60년대 보헤미안적 청년문화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이 할리우드를 접수한 70년대에는 마약을 들이키는 일이나 닥치는 대로 섹스를 해대는 일이 아주 일상적이었고, 이들은 상상 가능한 온갖 영화들을 마구 만들면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시대를 열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이건 미국식 문화혁명이었다.
스튜디오 제작관행을 뒤집다
스튜디오들이 처음부터 이랬을 리 없다.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폭스, 워너, 파라마운트를 틀어쥐고 있는 경영진의 나이는 63살에서 92살까지의 노인들이었다. 이들의 제작방식에서 연출가의 위치는 시각장애인이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월급을 받던 연출가들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배우가 정확한 지점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임무였다. 촬영이 끝나면 연출가는 제작에서 손을 뗐다. 만드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건 제작자뿐이었다.” 청년이 극영화를 연출한다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변화의 출발은 돈이었고, 변화의 뿌리는 프랑스 누벨바그였으며, 변화의 기폭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원제 <보니와 클라이드>, 1967)와 <이지 라이더>(1969)였다. 1969년은 3년 동안 이어진 침체의 출발점으로 1946년 주당 7820만명이었던 관객 수는 1971년 주당 1580만명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반면 안토니오니의 <블로우 업>(확대) 같은 모더니즘 영화가 인기를 끌자 스튜디오들은 절박한 위기감에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때맞춰 결정타를 날려준 게 워런 비티가 연출하고 주연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데니스 호퍼와 피터 폰다가 함께 만든 <이지 라이더>였다. 이들 작품이 시사회를 가졌을 때 스튜디오 간부들의 반응은 이런 쓰레기는 처음 봤다는 식이었고 대다수 언론과 평자들 역시 혹평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폴린 카엘 같은 일부 평자들의 호평에 힘입어 뒤늦게 대대적인 흥행을 낳았다. 그뒤는 혼란이었다. “<이지 라이더> 이후에는 모든 것이 변화한 것 같았다. 과거처럼 모방이나 베끼기가 쉽지 않았고 닭이 알을 낳듯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중역들이 거의 매일같이 해고당했다.” 마약에 취해 만든 <이지 라이더>
스튜디오가 무정부 상태에 빠지면서 “건달에 가까운 게으름뱅이들과 병역기피자들을 위한 빈민가였던” 영화학과 출신들이 줄줄이 스튜디오로 입장했다. <대부>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또 반문화운동, 반전운동에 참여하던 이들이 제작자로 한몫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건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시대를 열어젖힌 영화들이 거의 ‘개판’에 가까운 상태에서 만들어졌다는 증언들이다. <이지 라이더>의 데니스 호퍼는 마약에 취해 사느라 영화를 연출하고 연기한 게 기적에 가깝다는 식이다.
662쪽에 이르는 이 두툼한 책에는 70년대의 할리우드를 바꿔놓았던 감독, 제작자들의 적나라한 사생활이 그만큼의 적나라한 언어로 ‘도배질’돼 있다. 선정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동안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경이적인 세계가 담겨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변화의 출발은 돈이었고, 변화의 뿌리는 프랑스 누벨바그였으며, 변화의 기폭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원제 <보니와 클라이드>, 1967)와 <이지 라이더>(1969)였다. 1969년은 3년 동안 이어진 침체의 출발점으로 1946년 주당 7820만명이었던 관객 수는 1971년 주당 1580만명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반면 안토니오니의 <블로우 업>(확대) 같은 모더니즘 영화가 인기를 끌자 스튜디오들은 절박한 위기감에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때맞춰 결정타를 날려준 게 워런 비티가 연출하고 주연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데니스 호퍼와 피터 폰다가 함께 만든 <이지 라이더>였다. 이들 작품이 시사회를 가졌을 때 스튜디오 간부들의 반응은 이런 쓰레기는 처음 봤다는 식이었고 대다수 언론과 평자들 역시 혹평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폴린 카엘 같은 일부 평자들의 호평에 힘입어 뒤늦게 대대적인 흥행을 낳았다. 그뒤는 혼란이었다. “<이지 라이더> 이후에는 모든 것이 변화한 것 같았다. 과거처럼 모방이나 베끼기가 쉽지 않았고 닭이 알을 낳듯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중역들이 거의 매일같이 해고당했다.” 마약에 취해 만든 <이지 라이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