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결과 숨기기·논문 베끼기 다반사… N광선 발견·상온핵융합 반응 등은 검증 안 돼
최근 축산기술연구소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다. 지난 2000년 이후 농가에서 체세포복제를 통해 태어난 41마리의 복제소를 대상으로 지난해 10월부터 최근까지 유전자검사를 실시한 결과, 이중 4마리만이 진짜 복제소였다는 것이다. 체세포복제가 시도된 대리모 암소가 모두 838마리였으므로 이중에서 사산을 제외한다면 실제 복제가 최종적으로 성공된 비율은 0.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전에도 한 대학병원에서 체세포복제를 통하여 인간 배아복제를 성공했다고 주장했다가 이후 논란이 일자 논의 자체가 슬그머니 종결되었다.
객관적이라는 과학에서도 수많은 날조와 배신이 등장한다. 과학적 날조의 원조격은 기원전 2세기경의 그리스 천문학자인 히파라쿠스일 것이다. 그는 바빌로니아 문서에서 얻은 자료를 자신이 관측해서 얻은 양 날조해 출판했다.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미 역시 자신의 상상 속의 바람을 마치 관측된 결과인 양 한편의 정교한 소설을 썼다. 그의 날조는 무려 1500년 동안이나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갈릴레오 역시 자신의 실험을 과장하였으며, 미적분으로 유명한 베르누이의 정리는 사실 그의 아들의 결과물이다. 베르누이는 이 결과를 담은 자신의 책의 출판일을 아들이 그 사실을 발견한 날보다 앞선 것으로 조작하여 자식의 명성을 가로챘다.
엉터리 체세포 복제소… 공명심이 날조 불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실험에서 좋은 결과만을 기대한다. 때론 나쁜 결과는 숨긴 채 좋은 것만을 발표하고 싶은 유혹도 받게 마련이다. 전하량 측정에 성공한 천재 물리학자 밀리칸이 좋은 예이다. 그는 시카고대학 조교수 시절 자신이 고안한 실험장치에서 측정한 38번의 전하량 측정에서 ‘쓸 만한 측정치’만 남기고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버렸다. 한편 같은 연구주제로 탐구중인 비엔나대학의 펠릭스 에른하르트는 그런 사실은 자신이 주장하는 부전자(副電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밀리칸은 1913년 자신이 새롭게 ‘정밀하게’ 측정한 58회의 실험결과를 공표하면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이 단일 전하량을 주장했다. 에른하르트 연구팀은 이후에도 깔끔하지 못한 모든 오리지널 실험결과를 있는 그대로 공개했다. 오랫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이들의 승부는 밀리칸의 노벨상 수상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이에 낙담한 에른하르트는 결국 정신병에 걸리는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밀리칸이 죽은 뒤 과학사가들이 조사한 밀리칸의 실험노트를 보면 그는 무려 140번의 실험결과 중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58번의 ‘멋진 결과’만 골라서 발표한 게 발견됐다. 자신의 주장을 우기기 위하여 데이터를 조작하는 일은 사실 매우 빈번하다. 특히 명예욕에 눈먼 경우 이런 일은 쉽게 자행된다. 1981년에 와서야 에른하르트가 주장한 부전하(Fractional electron)의 존재에 대한 스탠퍼드대학 물리학자들의 실험이 <사이언스>에 발표돼 관심을 끌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과학적 업적에 대한 날조는 금전적 이익과 학계 내의 권력확보 등이 얽히면서 복합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2차대전 이전의 과학자들이 단순히 자신의 명예욕을 목표로 일을 벌인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1971년 슬론 케트링 암연구소에서 일어난 실험날조는 전형적인 예이다. <타임>의 표지인물로 이름을 날린 연구소장 로버트 굳의 연구팀에 35살의 젊은 섬머린이라는 박사가 합류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저명한 대가 아래에서 연구한 섬머린의 연구논문에는 항상 굳도 공저자로 표기되었다. 굳 역시 젊고 유능한 섬머린 덕택에 많은 논문에 이름을 올리고 학문적 입지를 넓혀나갔다. 이에 고무된 섬머린은 실험실에 찾아온 기자에서 자신이 개발한 피부이식법을 부풀려 설명하고 말았다. 섬머린의 발언은 곧바로 <뉴욕타임스>에 크게 소개됐다. 단숨에 스타급 과학자로 떠오른 섬머린은 뒷감당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자신이 완성했다는 실험을 다른 학자들 앞에서 재현하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험의 재현에 실패한 섬머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학계에서 어물쩡 넘어갈 리 없었다. 결국 그는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굳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 그의 사전인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이때 섬머린은 공개실험한 데이터를 조작하게 된 것은 새로운 연구비 획득을 위한 압박, 명성에 대한 집착과 굳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껴 공개 실험한 데이터를 조작했다고 변명했다. 과학적 표절과 날조의 역사에서 엘리아스 알사브티도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무려 3년 동안 60여편의 논문을 교묘하게 표절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저널에 발표하고 다시 그들을 참고문헌으로 하는 새로운 논문을 생산하는 수법으로 미국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심지어 오리지널 논문이 발표되기도 전에 자신이 표절한 논문을 다른 곳에 발표하는 기민함을 보이기까지 했다. 단기간에 엄청난 논문을 발표해 명성을 얻은 그도 결국은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그는 논문에서 엄밀한 심사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학문적 사기를 감행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얼마 전 인간유전자 서열을 밝힌 사이언스 논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논문의 첫 페이지는 수십명의 공저자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한 페이지 전부를 채우고 있다. 한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모든 저널에서, 그 저널의 모든 논문에서 그 모든 저자의 존재여부, 모든 참고문헌의 존재여부를 심사위원들이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최상위급 저널을 제외한 대부분 저널 출판사들의 구조가 저널의 판매가격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당 상당한 가격의 게재료를 저자에게 부담시키는 왜곡된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엄밀한 심사와 검증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때로는 한 집단 전체가 환각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프랑스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브볼로가 발견했다고 주장한 N광선 사건이다. 뢴트겐이 발명한 X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인 N선을 그가 소개하자마자 여기저기서 N선의 실재와 그 활용에 대한 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1903년에서 1906년, 이 4년 동안 무려 300편의 N선 관련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N선은 전혀 실재하지 않는 가공의 상상물이었다. 아마 브볼로가 저명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논문의 표절이 진화하는 전 과정 추적 이런 일은 요즘도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상온핵융합 반응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우스운 일들이 벌어졌다. 국내 연구자들이 앞다퉈 우리나라에서도 그 실험을 반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장단을 맞춘 것이다. 이에 정부가 나서서 상당한 연구비를 배정해 격려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 정리한 보고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N선이나 상온핵융합 소동에 동참한 학자들은 대부분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단지 목표에 대한 자신의 바람과 실제적인 현실을 구분하는 데 서툴렀기 때문에 이런 소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과학계의 추문에 관련된 사건은 수두룩하다. 화석을 조작한 필드타운인 사건이라든지 백인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각 인종과 유인원 두개골의 용량데이터를 조작한 머튼의 조작사건처럼 악의적으로 인종차별적 의지를 과학에 적용한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정치적 이념을 등에 업고 무려 25년간이나 날조를 저지르며 저명한 학자를 강단에서 몰아낸 소련 식물학자 루이센코 사건은 이념이 과학을 간섭할 때 얼마나 비참한 결과가 벌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학생들의 논문이나 보고서나 프로그램 등의 표절 여부을 검사해주는 국내외 웹사이트도 있다(http://www.plagiarism.org/, http://www.gyosuclub.com/). 머지않아 단순히 표절검사에 그치지 않고 그 표절물들이 진화하는(?) 전 과정을 추적하여 조직원 전체를 일망타진할 수 있는 시스템도 나올 전망이다.
조환규/ 부산대 교수·컴퓨터과학

사진/ 우리나라 한우 가운데 가장 우수한 형질을 가진 수소의 복제 송아지(위). 오른쪽은 유전공학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모습(SYGMA).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실험에서 좋은 결과만을 기대한다. 때론 나쁜 결과는 숨긴 채 좋은 것만을 발표하고 싶은 유혹도 받게 마련이다. 전하량 측정에 성공한 천재 물리학자 밀리칸이 좋은 예이다. 그는 시카고대학 조교수 시절 자신이 고안한 실험장치에서 측정한 38번의 전하량 측정에서 ‘쓸 만한 측정치’만 남기고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버렸다. 한편 같은 연구주제로 탐구중인 비엔나대학의 펠릭스 에른하르트는 그런 사실은 자신이 주장하는 부전자(副電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밀리칸은 1913년 자신이 새롭게 ‘정밀하게’ 측정한 58회의 실험결과를 공표하면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이 단일 전하량을 주장했다. 에른하르트 연구팀은 이후에도 깔끔하지 못한 모든 오리지널 실험결과를 있는 그대로 공개했다. 오랫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이들의 승부는 밀리칸의 노벨상 수상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이에 낙담한 에른하르트는 결국 정신병에 걸리는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밀리칸이 죽은 뒤 과학사가들이 조사한 밀리칸의 실험노트를 보면 그는 무려 140번의 실험결과 중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58번의 ‘멋진 결과’만 골라서 발표한 게 발견됐다. 자신의 주장을 우기기 위하여 데이터를 조작하는 일은 사실 매우 빈번하다. 특히 명예욕에 눈먼 경우 이런 일은 쉽게 자행된다. 1981년에 와서야 에른하르트가 주장한 부전하(Fractional electron)의 존재에 대한 스탠퍼드대학 물리학자들의 실험이 <사이언스>에 발표돼 관심을 끌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과학적 업적에 대한 날조는 금전적 이익과 학계 내의 권력확보 등이 얽히면서 복합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2차대전 이전의 과학자들이 단순히 자신의 명예욕을 목표로 일을 벌인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1971년 슬론 케트링 암연구소에서 일어난 실험날조는 전형적인 예이다. <타임>의 표지인물로 이름을 날린 연구소장 로버트 굳의 연구팀에 35살의 젊은 섬머린이라는 박사가 합류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저명한 대가 아래에서 연구한 섬머린의 연구논문에는 항상 굳도 공저자로 표기되었다. 굳 역시 젊고 유능한 섬머린 덕택에 많은 논문에 이름을 올리고 학문적 입지를 넓혀나갔다. 이에 고무된 섬머린은 실험실에 찾아온 기자에서 자신이 개발한 피부이식법을 부풀려 설명하고 말았다. 섬머린의 발언은 곧바로 <뉴욕타임스>에 크게 소개됐다. 단숨에 스타급 과학자로 떠오른 섬머린은 뒷감당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자신이 완성했다는 실험을 다른 학자들 앞에서 재현하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험의 재현에 실패한 섬머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학계에서 어물쩡 넘어갈 리 없었다. 결국 그는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굳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 그의 사전인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이때 섬머린은 공개실험한 데이터를 조작하게 된 것은 새로운 연구비 획득을 위한 압박, 명성에 대한 집착과 굳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껴 공개 실험한 데이터를 조작했다고 변명했다. 과학적 표절과 날조의 역사에서 엘리아스 알사브티도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무려 3년 동안 60여편의 논문을 교묘하게 표절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저널에 발표하고 다시 그들을 참고문헌으로 하는 새로운 논문을 생산하는 수법으로 미국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심지어 오리지널 논문이 발표되기도 전에 자신이 표절한 논문을 다른 곳에 발표하는 기민함을 보이기까지 했다. 단기간에 엄청난 논문을 발표해 명성을 얻은 그도 결국은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그는 논문에서 엄밀한 심사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학문적 사기를 감행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얼마 전 인간유전자 서열을 밝힌 사이언스 논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논문의 첫 페이지는 수십명의 공저자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한 페이지 전부를 채우고 있다. 한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모든 저널에서, 그 저널의 모든 논문에서 그 모든 저자의 존재여부, 모든 참고문헌의 존재여부를 심사위원들이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최상위급 저널을 제외한 대부분 저널 출판사들의 구조가 저널의 판매가격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당 상당한 가격의 게재료를 저자에게 부담시키는 왜곡된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엄밀한 심사와 검증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때로는 한 집단 전체가 환각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프랑스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브볼로가 발견했다고 주장한 N광선 사건이다. 뢴트겐이 발명한 X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인 N선을 그가 소개하자마자 여기저기서 N선의 실재와 그 활용에 대한 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1903년에서 1906년, 이 4년 동안 무려 300편의 N선 관련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N선은 전혀 실재하지 않는 가공의 상상물이었다. 아마 브볼로가 저명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논문의 표절이 진화하는 전 과정 추적 이런 일은 요즘도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상온핵융합 반응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우스운 일들이 벌어졌다. 국내 연구자들이 앞다퉈 우리나라에서도 그 실험을 반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장단을 맞춘 것이다. 이에 정부가 나서서 상당한 연구비를 배정해 격려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 정리한 보고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N선이나 상온핵융합 소동에 동참한 학자들은 대부분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단지 목표에 대한 자신의 바람과 실제적인 현실을 구분하는 데 서툴렀기 때문에 이런 소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과학계의 추문에 관련된 사건은 수두룩하다. 화석을 조작한 필드타운인 사건이라든지 백인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각 인종과 유인원 두개골의 용량데이터를 조작한 머튼의 조작사건처럼 악의적으로 인종차별적 의지를 과학에 적용한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정치적 이념을 등에 업고 무려 25년간이나 날조를 저지르며 저명한 학자를 강단에서 몰아낸 소련 식물학자 루이센코 사건은 이념이 과학을 간섭할 때 얼마나 비참한 결과가 벌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학생들의 논문이나 보고서나 프로그램 등의 표절 여부을 검사해주는 국내외 웹사이트도 있다(http://www.plagiarism.org/, http://www.gyosuclub.com/). 머지않아 단순히 표절검사에 그치지 않고 그 표절물들이 진화하는(?) 전 과정을 추적하여 조직원 전체를 일망타진할 수 있는 시스템도 나올 전망이다.
정재승의 과학으로 세상읽기 ![]() 일러스트레이션/ 차승미 |
조환규/ 부산대 교수·컴퓨터과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