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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대중을 배신한 과학의 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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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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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결과 숨기기·논문 베끼기 다반사… N광선 발견·상온핵융합 반응 등은 검증 안 돼

사진/ 우리나라 한우 가운데 가장 우수한 형질을 가진 수소의 복제 송아지(위). 오른쪽은 유전공학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모습(SYGMA).
최근 축산기술연구소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다. 지난 2000년 이후 농가에서 체세포복제를 통해 태어난 41마리의 복제소를 대상으로 지난해 10월부터 최근까지 유전자검사를 실시한 결과, 이중 4마리만이 진짜 복제소였다는 것이다. 체세포복제가 시도된 대리모 암소가 모두 838마리였으므로 이중에서 사산을 제외한다면 실제 복제가 최종적으로 성공된 비율은 0.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전에도 한 대학병원에서 체세포복제를 통하여 인간 배아복제를 성공했다고 주장했다가 이후 논란이 일자 논의 자체가 슬그머니 종결되었다.

객관적이라는 과학에서도 수많은 날조와 배신이 등장한다. 과학적 날조의 원조격은 기원전 2세기경의 그리스 천문학자인 히파라쿠스일 것이다. 그는 바빌로니아 문서에서 얻은 자료를 자신이 관측해서 얻은 양 날조해 출판했다.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미 역시 자신의 상상 속의 바람을 마치 관측된 결과인 양 한편의 정교한 소설을 썼다. 그의 날조는 무려 1500년 동안이나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갈릴레오 역시 자신의 실험을 과장하였으며, 미적분으로 유명한 베르누이의 정리는 사실 그의 아들의 결과물이다. 베르누이는 이 결과를 담은 자신의 책의 출판일을 아들이 그 사실을 발견한 날보다 앞선 것으로 조작하여 자식의 명성을 가로챘다.

엉터리 체세포 복제소… 공명심이 날조 불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실험에서 좋은 결과만을 기대한다. 때론 나쁜 결과는 숨긴 채 좋은 것만을 발표하고 싶은 유혹도 받게 마련이다. 전하량 측정에 성공한 천재 물리학자 밀리칸이 좋은 예이다. 그는 시카고대학 조교수 시절 자신이 고안한 실험장치에서 측정한 38번의 전하량 측정에서 ‘쓸 만한 측정치’만 남기고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버렸다. 한편 같은 연구주제로 탐구중인 비엔나대학의 펠릭스 에른하르트는 그런 사실은 자신이 주장하는 부전자(副電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밀리칸은 1913년 자신이 새롭게 ‘정밀하게’ 측정한 58회의 실험결과를 공표하면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이 단일 전하량을 주장했다. 에른하르트 연구팀은 이후에도 깔끔하지 못한 모든 오리지널 실험결과를 있는 그대로 공개했다.

오랫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이들의 승부는 밀리칸의 노벨상 수상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이에 낙담한 에른하르트는 결국 정신병에 걸리는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밀리칸이 죽은 뒤 과학사가들이 조사한 밀리칸의 실험노트를 보면 그는 무려 140번의 실험결과 중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58번의 ‘멋진 결과’만 골라서 발표한 게 발견됐다. 자신의 주장을 우기기 위하여 데이터를 조작하는 일은 사실 매우 빈번하다. 특히 명예욕에 눈먼 경우 이런 일은 쉽게 자행된다. 1981년에 와서야 에른하르트가 주장한 부전하(Fractional electron)의 존재에 대한 스탠퍼드대학 물리학자들의 실험이 <사이언스>에 발표돼 관심을 끌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과학적 업적에 대한 날조는 금전적 이익과 학계 내의 권력확보 등이 얽히면서 복합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2차대전 이전의 과학자들이 단순히 자신의 명예욕을 목표로 일을 벌인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1971년 슬론 케트링 암연구소에서 일어난 실험날조는 전형적인 예이다. <타임>의 표지인물로 이름을 날린 연구소장 로버트 굳의 연구팀에 35살의 젊은 섬머린이라는 박사가 합류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저명한 대가 아래에서 연구한 섬머린의 연구논문에는 항상 굳도 공저자로 표기되었다. 굳 역시 젊고 유능한 섬머린 덕택에 많은 논문에 이름을 올리고 학문적 입지를 넓혀나갔다.

이에 고무된 섬머린은 실험실에 찾아온 기자에서 자신이 개발한 피부이식법을 부풀려 설명하고 말았다. 섬머린의 발언은 곧바로 <뉴욕타임스>에 크게 소개됐다. 단숨에 스타급 과학자로 떠오른 섬머린은 뒷감당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자신이 완성했다는 실험을 다른 학자들 앞에서 재현하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험의 재현에 실패한 섬머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학계에서 어물쩡 넘어갈 리 없었다. 결국 그는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굳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 그의 사전인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이때 섬머린은 공개실험한 데이터를 조작하게 된 것은 새로운 연구비 획득을 위한 압박, 명성에 대한 집착과 굳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껴 공개 실험한 데이터를 조작했다고 변명했다.

과학적 표절과 날조의 역사에서 엘리아스 알사브티도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무려 3년 동안 60여편의 논문을 교묘하게 표절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저널에 발표하고 다시 그들을 참고문헌으로 하는 새로운 논문을 생산하는 수법으로 미국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심지어 오리지널 논문이 발표되기도 전에 자신이 표절한 논문을 다른 곳에 발표하는 기민함을 보이기까지 했다. 단기간에 엄청난 논문을 발표해 명성을 얻은 그도 결국은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그는 논문에서 엄밀한 심사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학문적 사기를 감행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얼마 전 인간유전자 서열을 밝힌 사이언스 논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논문의 첫 페이지는 수십명의 공저자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한 페이지 전부를 채우고 있다. 한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모든 저널에서, 그 저널의 모든 논문에서 그 모든 저자의 존재여부, 모든 참고문헌의 존재여부를 심사위원들이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최상위급 저널을 제외한 대부분 저널 출판사들의 구조가 저널의 판매가격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당 상당한 가격의 게재료를 저자에게 부담시키는 왜곡된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엄밀한 심사와 검증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때로는 한 집단 전체가 환각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프랑스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브볼로가 발견했다고 주장한 N광선 사건이다. 뢴트겐이 발명한 X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인 N선을 그가 소개하자마자 여기저기서 N선의 실재와 그 활용에 대한 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1903년에서 1906년, 이 4년 동안 무려 300편의 N선 관련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N선은 전혀 실재하지 않는 가공의 상상물이었다. 아마 브볼로가 저명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논문의 표절이 진화하는 전 과정 추적

이런 일은 요즘도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상온핵융합 반응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우스운 일들이 벌어졌다. 국내 연구자들이 앞다퉈 우리나라에서도 그 실험을 반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장단을 맞춘 것이다. 이에 정부가 나서서 상당한 연구비를 배정해 격려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 정리한 보고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N선이나 상온핵융합 소동에 동참한 학자들은 대부분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단지 목표에 대한 자신의 바람과 실제적인 현실을 구분하는 데 서툴렀기 때문에 이런 소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과학계의 추문에 관련된 사건은 수두룩하다. 화석을 조작한 필드타운인 사건이라든지 백인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각 인종과 유인원 두개골의 용량데이터를 조작한 머튼의 조작사건처럼 악의적으로 인종차별적 의지를 과학에 적용한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정치적 이념을 등에 업고 무려 25년간이나 날조를 저지르며 저명한 학자를 강단에서 몰아낸 소련 식물학자 루이센코 사건은 이념이 과학을 간섭할 때 얼마나 비참한 결과가 벌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학생들의 논문이나 보고서나 프로그램 등의 표절 여부을 검사해주는 국내외 웹사이트도 있다(http://www.plagiarism.org/, http://www.gyosuclub.com/). 머지않아 단순히 표절검사에 그치지 않고 그 표절물들이 진화하는(?) 전 과정을 추적하여 조직원 전체를 일망타진할 수 있는 시스템도 나올 전망이다.

정재승의 과학으로 세상읽기

진공청소기 100년의 역사

일러스트레이션/ 차승미
철 지난 과학잡지를 뒤적이다보니 진공청소기가 발명된 지 벌써 100년이나 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영국의 발명가 세실 부스가 공기를 빨아들이는 ‘흡입식 진공청소기’를 발명한 해가 1901년. 그보다 30년 앞선 해에도 강한 바람을 내뿜는 ‘방출식 진공청소기’가 있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사노동의 자동화를 가장 실감나게 느끼게 해준 테크놀로지가 바로 세탁기와 진공청소기가 아닌가! 물론 부스가 처음 진공청소기를 발명할 때만 해도 마차에 펌프를 장착한 ‘거대한 기곗덩어리’여서 말이 끌고 다녀야 할 정도로 그 크기가 컸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 기침에 시달리던 발명가 제임스 스펭글러가 자신의 기침이 먼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집안의 먼지를 없애기 위해 휴대용 진공청소기를 개발했다고 한다. 소형 진공청소기는 발명되자마자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한가하게 만들면서 현대 가정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 처음으로 진공청소기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공청소기는 여성들의 가사노동 부담을 얼마나 덜어주었을까. 페미니스트 과학사회학자들의 대답은 의외로 실제적인 가사분담 해소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테크놀로지가 발전할수록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청소의 예만 보더라도 그렇다. 예전에는 카펫을 털고 햇볕에 너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었는데, 진공청소기가 나온 이후 그 일은 고스란히 여성들의 몫이 되었다. 또 진공청소기가 나오면서 여성들에게 ‘깨끗한 집에 대한 요구’가 더욱 강해졌고, 청소기로 청소를 한 뒤에도 물걸레질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청소시간 자체는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세탁기 덕분에 옷 하나를 빨래하는 데 걸리는 수고는 줄었지만, 옷을 자주 빨아 입어야 하는 문화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진공청소기 회사들이 내보내는 상업광고는 집안에 엄청나게 많은 먼지가 있는 것처럼 과장해 현대인들의 먼지 강박증을 부추기기도 했다.

물론 진공청소기의 등장에는 긍정적인 부분도 많다. 비염이나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먼지가 집안에서 줄어들면서 좀더 위생적으로 바뀌었고, 남성들도 쉽게 청소를 하게 된 점은 긍정적인 점이다. 또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가사노동 시간 자체는 늘었다 하더라도 노동강도에서는 다소나마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다.

앞으로 100년 뒤 집안에서의 청소문화는 과연 어떻게 바뀌게 될까. SF소설가가 아니라도 20년 이내에 청소로봇이 청소를 대신하는 날이 올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공청소기 자체에 인공지능이 내장돼 있어 집주인이 없는 사이 집안 구석구석을 돌며 먼지를 빨아들이고 물걸레질을 하는 날이 오는 것도 시간문제이리라. 하지만 청소로봇이 ‘점점 은밀한 형태로 여성을 가사노동의 굴레에 가두는 테크놀로지의 후예’가 되지 않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연구교수 jsjeong@complex.korea.ac.kr



조환규/ 부산대 교수·컴퓨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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