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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수요일 밤 ‘노가다’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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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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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400회 맞는 <수요예술무대>…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중간지대라는 독특한 색깔

사진/ <수요예술무대>는 해외 유명 뮤지션들이 꼭 거쳐가는 것이 관례처럼 정착됐다.
문화방송의 <수요예술무대>(매주 수 밤 12시30분)는 어쩐지 능청맞아 보인다. 남들이 현란한 비주얼 가수로 화끈한 승부수를 던지거나, 봐주든 아니든 아예 고상하게 클래식에 침잠할 때,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중간지대라는 색깔을 골랐고 재즈나 클래식에서 늘 정상급 음악가만을 택해 무대에 세우는 전략을 능청스럽게 해왔다. 게다가 누가 더 어눌한지 경쟁하는 듯한 재즈 뮤지션 김광민씨와 가수 이현우씨를 MC로 앞세워 조용조용히 자기 위상을 높여온 것도 그렇다. 또 이 프로그램으로 청춘을 다 보낸 한봉근 PD는 이현우씨처럼 느낌있는 미남이면서도 김광민씨의 단아한 재즈음악 같은 섬세함을 은근히 던져주는데, 다들 프로그램 이미지와 절묘한 궁합을 이루고 있다. 이 희귀 프로그램이 1월16일로 방송 400회를 맞는다. 시청률 5% 안팎으로 9년2개월 동안 ‘힘겹게’ 장수하면서 국내 대중음악계의 아주 귀한 보금자리로 뿌리를 굳혔다는 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해외 유명 뮤지션의 ‘필수 코스’

너무 고급 취향이 아니냐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지나온 역사를 보면 물위에 뜬 백조의 고달픈 다리가 떠오른다. 이렇다할 공연장이 많지 않은 여건에서 1천명 이상을 모아 라이브 무대를 꾸미는 건 무대 못질부터 조명까지 모두 새롭게 만들어내는 ‘노가다의 나날’이었다. 이런 경우도 있다.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리허설을 하려는데, 삭발한 학생회 간부들이 몰려와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학내문제로 학교와 학생들이 대립된 상태였는데 학교쪽의 일처리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당장 다음날이 방송이라 사정을 호소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철수한 장비를 들고 가까운 문화체육관으로 달려간 뒤 음악가와 청중까지 ‘급히 모셔와’ 가까스로 펑크를 막아내기도 했다.


아무래도 가장 큰 품은 섭외에 드는데 해외 유명 뮤지션의 경우는 그들의 스케줄에 맞추느라 혼이 다 빠질 지경이다. 한번은 재즈의 명인 칙 코리아가 내한공연을 오는데, 공연 전날 밤에 와서, 다음날 오후 3시·7시에 공연하고, 그 다음날 새벽에 출국하는 일정이었다. 유일한 시간은 공연날 오전이었다. 섭외는 물론이고 공개방송을 하기에 힘든 시간이었지만 결국 해냈다. 그나마 이런 경우는 행복하다. 영국의 흑인 재즈 보컬 알자로가 한국에 잠시 들렀다가 일본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어렵게 섭외를 마쳤다. 숙명여대에서 2천명의 관중을 모아놓고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데 영 소식이 없어 확인해보니 런던에서 비행기를 못 탔다는 게 아닌가. 도리없이 MC 김광민씨의 콘서트로 대신해야 했다. 이런 역사를 거치면서 바비 맥퍼린, 팻 메스니, 허비 행콕, 윈튼 마셜리스, 스콜피온스, 사라 브라이트먼, 리 릿나워 등 해외의 쟁쟁한 뮤지션들이 국내에 들를라치면 꼭 이 프로그램을 거쳐가는 게 관례처럼 정착됐다. 해외에서는 이 프로그램이 ‘Wednesday’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게 음반 직배사들의 전언이다.

박정현·이현우를 키운 무대

<수요예술무대>에는 국내 뮤지션도 무대에 오른다. 단, 아무나 오르지는 못한다. 실력있는 라이브 가수만이 가능하다. “가수 유재하와 만날 술먹으며 형아우하면서 친하게 지내다가” 그의 음반 프로듀서를 했을 정도로 음악에 ‘정통한’ 한 PD에게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앞으로의 가능성이 더 기대되는 국내 뮤지션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우림의 김윤아, 윤도현 밴드, 박정현씨를 꼽는다.

이 프로그램의 한계는 국내 대중음악계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 해외 유명 뮤지션이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내에서 아무나 무대에 세울 수는 없는데 방송은 꼬박꼬박해야 하고, 김광민씨와 이현우씨를 ‘대타’로 세워 공연시키는 것도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말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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