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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동네보스, 왕보스에 투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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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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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사료로 드러난 박정희의 68년 ‘이북 응징’ 요구와 뒤틀린 한-미관계

사진/ 68년 4월 박정희와 존슨의 만남.(69 보도사진연감)
지난 1월9일 청와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 관련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1302건의 통치사료를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자료들이 아직 연구자들에게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신문지상에 보도된 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1968년 이북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인 1·21사태와 그 이틀 뒤에 발생한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직후인 1968년 2월5일 박정희 대통령이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 편지에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해선 그들의 침략행동이 반드시 적절한 응징을 받게 된다는 교훈을 보여줘야 한다”고 군사적 응징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존슨은 대북 군사행동을 취하기에는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 당시 한-미 정상간에 오간 편지의 내용은 이미 학계에 알려진 것이지만, 원본이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런데 이 편지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밀월관계를 이어 오던 한-미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하는 분기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베트남전 전략파트너로의 격상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절체절명의 과제는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아직 최고회의 의장이던 1961년 10월, 박정희는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을 하게 되었는데, 일부 외국 언론들은 이 회담을 종주국 황제의 식민지 총독에 대한 면접시험이라고 비꼬았다. 이때는 아직 미국이 베트남전을 완전히 떠맡기 전이었는데, 박정희는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견하겠다는 제안을 먼저하여 미국의 환심을 샀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 미국은 ‘좀더 많은 깃발’이라는 정책을 내걸었다. 한국전쟁 때처럼 유엔을 동원한 개입이 불가능하자 미국은 그 대신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맹국들을 가능한 한 많이 끌어들여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 전쟁이라는 명분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에는 몹시 실망스럽게도 미국이 동참을 요청한 동맹국 25개국 중, 이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나라는 한국과 대만밖에는 없었다. 이 두 나라는 모두 분단국으로 독자적인 방위능력이 의문시된다는 점에서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선택이었다. 특히 대만이 베트남전에 참전할 경우 중국을 극도로 자극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베트남 민중의 전통적인 반중국감정을 자극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이 때문에 대만은 ‘좀더 많은 깃발’을 원하던 미국의 뜻에 따라 깃발 하나를 더 들고 있을 정도의 20명 남짓한 병력을 보내는 데 그쳤다.

이렇게 되자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역할은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베트남전에 개입하면서 이 전쟁이 백인종의 황인종에 대한 ‘인종침략전쟁’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기 위한 ‘이데올로기 전쟁’이라는 허상을 만들고자 했던 미국에 베트남 민족과 같은 아시아 인종인 한국군의 참전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처음 박정희가 미국에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할 때에는 생색내기의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동맹국들의 저조한 참여 때문에 한국군의 역할은 증대될 수밖에 없었고, 한국은 미군을 제외한 베트남전에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타이, 필리핀, 대만, 스페인 등 6개국의 파병 병력 총합의 거의 3배에 달하는 5만여명의 대부대를 파견하게 된다. 그 결과 적어도 베트남전에 관한 한 한국의 위치는 미국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전략파트너로 격상되었다. 물론 한국은 민족주의의 열풍이 불고 있던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미국의 앞잡이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되었지만.

군사쿠데타와 나이트클럽 영업권 싸움

사진/ 미국이 가장 골치아파하는 베트남전에 박정희만큼 적극적으로 나서준 사람이 없었기에 해방 이후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이때만큼 좋았던 적은 없었다. 65년 10월 맹호부대의 파월 환송 퍼레이드.(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연인원 30만명의 대군을 파병하면서 박정희는 미국과의 교섭에서 실상 많은 것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아니, 박정희는 오히려 “미국이 어려운 틈을 타서 우리가 타산적으로 나간다면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라는 입장을 보였으니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정작 인색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려주는 대가로 미국은 모호한 표현으로 가득 찬 ‘브라운 각서’와 부통령 험프리의 립서비스만을 남발했을 뿐이다. 1966년 2월 한국을 방문한 험프리는 “우리는 우방이며 우리는 친구다. 오늘의 한국은 미국과 한국을 합친 것만큼이나 강하고, 오늘의 미국은 한국과 미국을 합친 것만큼 강하다. 북한이 남침을 강행하면 우리는 이것을 미 본토에 대한 침공으로 간주하여 즉각 응징할 것”이라는 성명을 남기고 귀국했다. 1970년 2월 미 상원 외교위원회의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상원 외교위원장이던 플부라이트 의원은 이 성명을 가리켜 “미국 역사상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미사여구로 가득 찬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것 중 특기할 것은 지금은 불평등협정으로 비판이 가득하지만, SOFA, 즉 흔히 한미행정협정이라 불리는 협정이 1967년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SOFA가 제정되기 전까지 7만명에 달하는 미군은 그들의 범죄행위를 규제할 아무런 법률도 없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에서 활개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에서부터 푸에블로호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전후하여 박정희가 보인 행동과 심리를 보면 요즈음 한창 유행하는 조폭들의 세계를 떠올리게 된다. 엄숙하기 짝이 없는 국가주의자들이야 일국의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조폭에 비유하는 것에 펄쩍 뛰겠지만, 세계 굴지의 석학인 찰스 틸리(Charles Tilly)가 1985년 ‘조직범죄로서의 전쟁 만들기와 국가 만들기’란 논문을 발표한 이래 국가의 통치행위를 조직범죄집단의 행동과 비교하여 보는 것은 이미 사회과학계에서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 학계의 동향을 빌리지 않더라도 군사반란을 일으켜 총을 거꾸로 들고 나라를 접수한 짓거리나 사시미칼을 들고 쳐들어가 나이트클럽의 영업권을 접수한 짓거리나 규모만 빼면 무엇이 다르다고 할 것인가?

박정희는 한국이라는 자신의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구축한 보스였지만, 미국과 소련이라는 왕보스가 각각 자신의 세력권을 구축하고 대결하는 냉전시대의 국제질서에서 보면 작은 동네의 새로운 보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의 박정희에게 베트남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물론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왕보스 미국이 한국에 한 요구는 처음에 베트남 파병을 자청할 때 박정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부담이었지만, 정통성을 결여한 박정희는 정권유지를 위해 미국의 지원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그 부담을 기꺼이 졌다. 다른 조직들의 보스들은 끼어들기를 꺼려하는 판에 왕보스가 가장 골치아파하는 문제에 자신의 수하들을 최일선에 대규모로 풀어놓은 박정희로서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지위와 발언권이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할 만했다. 실제로 미국 대통령 존슨은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극진하게 환대했으며, 해방 이후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이때보다 좋았던 적은 없었다.

1·21사건의 배경은 베트남전?

사진/ 북한으로 끌려가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1·21 사건 이틀 만에 또다시 초대형 사건이 벌어지자 박정희는 미국에 '이북응징'을 요구했지만 베트남전의 전황이 극히 불리한 마당에 존슨이 이를 들어줄리 없었다.(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그러던 차에 발생한 것이 바로 1·21사건이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1월21일 이북의 특수부대 124군 부대요원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청와대 코앞의 세검정까지 진출했다가 1명이 생포되고 나머지는 전원 사살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생포된 김신조는 전국에 생방송된 기자회견에서 남파목적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고 말해 충격을 더해 주었다. 1·21사건의 발생배경을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북이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주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 같다. 실제로 이 사건 이전에 심각하게 논의되던 한국군의 베트남전 추가파병은 쑥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1·21사건은 굳이 조폭의 세계에 비유하지 않더라도 반대파에서 경쟁상대 조직의 보스를 없애기 위한 기습작전이었다. 박정희로서는 당연히 이북을 응징하기를 원했고, 자신의 뒤에 있는 왕보스 미국이 이를 지원해주리라고 생각했다.

1·21사건의 충격이 한창이던 1월23일 또다른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이북이 이번에는 미국의 최신예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끌고 간 것이다. 이북은 이를 푸에블로호가 이북의 영해를 침범했기 때문에 정당하게 나포한 것이라 주장했고, 미국은 공해상에서의 납치라고 주장했다. 미군 정보함이 나포 또는 납치된 것은 미 해군 역사 176년에 처음 있는 일로 미국 역시 처음에는 이북에 대한 군사공격을 포함한 다양한 대책을 강구했다. 미국은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바다에 출동시킨 데 이어 항공모함 2척을 추가 배치하고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공군전투기 361대를 이남으로 전진배치했다. 그러나 상황은 미국에 불리했다. 군사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푸에블로호가 공해상에서 납치됐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미국은 이를 입증할 수 없었다. 더구나 비록 이북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푸에블로호 함장 부커 중령은 푸에블로호가 이북의 영해를 침범하여 스파이 활동을 벌였다고 시인했다. 국제사회에서도 여론은 미국의 이북 영해 침범을 기정사실화하는 등 미국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미국은 공습의 지원 아래 육상공격을 하는 방안, 동해를 통해 공격하는 방안 등 10여 가지 대응방안을 마련했지만 막상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군사행동을 통해 이북을 응징하려면 이북에 억류되어 있던 승무원 82명(원래 83명이었으나 1명은 교전 중 사망)의 목숨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1968년 가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여론이 고조되어가고 있던 판에 이런 도박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푸에블로호 사건 발생 1주일 뒤인 1월30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이른바 테트(음력설) 공세에 나선 것이다. 당시 근 50만명의 미군과 5만의 한국군이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베트콩들의 테트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트남전에서의 전황이 극도로 불리하게 돌아가는 마당에 미국이 또 하나의 전쟁을 한반도에서 시작할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이북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포기하고 그토록 싫어하고 경멸해 마지않던 이북과 2월1일부터 동등한 자격으로 비밀협상에 들어가게 된다.

박정희의 '과음과 엉뚱한 행동'

지난 1월9일 공개된 박정희와 존슨간의 왕복서한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정희로서는 미국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 1·21사건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푸에블로호 사건만을 해결하기 위해 이북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로 나가는 데 격분했다. 더구나 미국과 이북의 비밀교섭에서 한국 정부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2월5일 존슨에게 편지를 보내 이북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요구했고, 다음날 한국 정부 수뇌부는 포터 미 대사와 본스틸 유엔 사령관을 불러 판문점 협상에의 한국 대표 참가, 미국과의 공동보복 등을 미국에 요구하고 한국은 단독조치도 불사한다고 통고했다.

한국이 미국에 내밀 수 있는 카드란 베트남에 파병중인 한국군의 철수였다. 그러나 이 카드는 “그러면 우리는 주한미군을 빼내어 베트남에 투입하겠다”는 미국의 방침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미국은 이북과 10개월에 달한 협상 끝에 이북의 요구에 굴복하여 푸에블로호가 이북의 영해를 침범한 사실을 시인하고 이에 대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죄했다. 이북은 12월23일 82명의 생존승무원과 시체 1구를 판문점을 통해 돌려 보냈지만, 선체와 장비는 돌려주지 않았다. 최근 이북은 푸에블로호를 대동강에 전시하고 있다. 미국은 승무원이 귀환한 다음 사죄를 취소했지만, 이 사건은 이북의 콧대를 한껏 세워주었다.

이북과의 비밀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우려한 것은 박정희의 독자행동이었다. 만에 하나 박정희가 이북에 대해 군사적인 행동을 감행한다면, 이북과 미국 사이의 협상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미국은 한반도에서 원치 않은 또 하나의 전쟁에 휘말려들게 되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1월 미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존슨은 “지나치게 호전적”(too belligerent)인 박정희의 “과음과 엉뚱한 행동”(heavy drinking and erratic behavior)을 크게 우려했다. 서울을 방문한 사이러스 밴스 미국 대통령 특사-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받아본 1월14일치 아침신문은 우연히도 그가 8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는 “박정희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모든 명령을 내릴 것이고 장성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조치를 연기할 것이다. 박정희가 (술자리에서) 내린 지시에 관해 다음날 아침 언급하지 않으면 장성들은 전날 밤 그가 내린 명령들을 잊어버린다”고 보고했다. 밴스는 또 박정희가 만취상태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자신의 보좌관들에게 재떨이를 던진 일이 종종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재떨이 사건 등 ‘육박전’이라 불린 박정희의 부부싸움 때문에 육영수 여사가 상처를 입어 공식석상에 나서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필자도 학교친구들로부터 들을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었다. 또 윌리엄 포터(William J Porter) 주한 미 대사도 워싱턴에 전문을 보내 “박 대통령이 당장 북한을 공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거의 비이성적이 돼 있다”고 보고했다.

한국판 게이트의 원조, 코리아게이트

사진/ 한-미관계를 냉각시켰던 '코리아게이트'의 주인공 박동선(맨오른쪽)씨. 나름대로 미국에 대해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박정희는 미국의 행정부와 의회 지도자들에게 한국식 로비를 벌였다.(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박정희의 이런 행동은 왕보스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지 못한 동네 보스의 불안한 심리가 표출된 것이었다. 왕보스의 가장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며 몸바쳤는데, 자신의 목숨을 노린 이북의 기습행위를 왕보스는 전혀 고려해주지 않다니! 미국은 한국에 추가 군원 1억달러를 제공하고 한국 공군에 팬텀전폭기를 제공하는 한편, 박정희의 3선개헌 시도를 묵인함으로써 박정희를 달래주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박정희의 불안심리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더구나 새로이 들어선 미국의 닉슨 정권은 한국 정부와의 아무런 사전협의 없이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를 통고했다.

이에 박정희는 미국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의 행정부뿐 아니라 의회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상대로 한국식 로비를 벌이게 되었다. 요즈음 지긋지긋하게 듣는 OOO게이트는 원래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것이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처음 쓰인 것은 바로 박동선을 동원한 박정희의 로비가 코리아게이트라 불리게 되면서였다. 한편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표방하면서 나름대로 핵개발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러나 박정희가 개인적으로 미국에 배신감을 느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미국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태도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그는 미국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미국의 태도변화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대미의존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심한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미국과의 연계만이 자신의 살길이라는 생각에 미국을 붙잡기 위한 수단으로 핵개발을 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을 뿐이다.

뱀발 최근 공개된 자료들은 청와대 내의 한 창고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를 보면 정조의 화성행차 당시의 수라상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반찬의 종류와 재료까지 꼼꼼히 기록한 기록문화의 왕국이었다. 그러던 나라가 어쩌다가 이런 귀중한 사료들을 먼지만 쌓이게 두다가 ‘발견’해야 하는가? 그리고 연구자들은 언제까지 우리도 틀림없이 갖고 있는 자료들을 보기 위해 미국의 아카이브(국립문서보관소)를 기웃거려야 하는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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