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동양철학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오랑캐란 단어에서 멸시와 비하의 차별적 시선을 감지하는 건 자연스럽다. 오랑캐의 사전적 정의부터가 기분나쁘다. 왕의 교화를 못 받은 미개한 종족(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여기서 오랑캐란 당연히 벗어나야 할 야만의 상태다. 그런데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을 말한다?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이상수 지음, 길 펴냄, 033-661-7738, 1만2천원)이 그렇다고 반문명적 삶의 원시성을 찬미하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류의 문명비판서는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진정한 문화적 태도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고 따진다. 오늘 그것은 세계를 문명과 오랑캐로 나누는 이분과 배제의 논리를 벗어날 때 형성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은 중심권보다 주변의 오랑캐족에게 더욱 열려 있다는 게 이 책의 핵심적 전언이다.
오랑캐의 즐거움은 자유로움
지은이가 말하는 오랑캐의 즐거움이란 중원의 사고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중원의 사고는 오랑캐에겐 진리가 가능할 수 없다는 폭력을 포함하기 일쑤다. 반대로 오랑캐의 사유는 진리는 하나라는 일체의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데서 출발한다. “오랑캐의 관점에 서서 사유한다는 것은 역사를 자기중심으로 조직하는 일을 포기하는 걸 뜻하며, 자기중심적인 사유로 형이상학을 만들어내는 일을 포기하는 걸 뜻한다.”(333쪽) 오랑캐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중심의 논리와 달리 볼 수 있는 능력인 상상력이 해방되며 사유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다. 책 제목이 낯익은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2000년 9월부터 1년여간 <한겨레21>에 매주 연재된 <이상수의 동서횡단>을 모아 펴낸 것으로, 책 제목은 마지막 50회째 연재물의 제목을 그대로 살렸다. 연재 당시 지면의 제약 때문에 논지를 충분히 풀어내지 못한 부분에 각주를 달거나 보충하는 수준에서 다듬었다. 또 50회분을 ‘거대한 논쟁의 서막’, ‘공자, 중용의 철인’, ‘노자의 급진적 관용철학’, ‘묵자, 사랑의 사회과학’, ‘손자의 전쟁과 평화’, ‘휘갑’(마무리) 등으로 나눠 묶었다. 그런 구획을 따라가며, 이 책에선 주로 논쟁의 방식으로 이뤄져온 서양철학과 대비되는 동양철학의 덕쟁 개념을 중심으로 동양적 사유의 특성을 다채롭게 펼쳐보인다. 이 때문에 일단 여기서 오랑캐의 사유는 덕쟁의 동양적 사유로 읽힌다. 근대 이래 전일적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는 서양의 이성중심적 논리에 밀려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된 채 동양에서조차 쇠락의 길을 걸어온 동양철학의 사유에 담긴 잊혀진 상상력의 가능성을 새로이 보듬어 살피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양의 논리가 결코 그 자체로 오랑캐의 사유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동양철학 그 자체도 이미 중국 중심의 화이관을 안에 품고 있으며, 오랑캐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런 동양철학의 전통적 화이관마저 해체해 새롭게 재구성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반계급 주류를 지배했던 소중화 의식의 허구성을 돌아볼 때 이러한 또 한겹의 비판적 성찰을 더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오랑캐의 사유란 밖의 중심주의를 배격하는 것 못지않게 안의 중심주의와도 결별하는 일이다. 안과 밖의 중심주의 배격
동양철학 안에서도 철저한 비주류로 묻혀졌던 흐름들을 현재적 시야 안으로 새로이 끌어들인 작업은 그래서 가능했을 것 같다. 지은이는 노자사상을 급진적 관용철학으로 재해석하고 사상 최대의 좌파집단 묵가의 치열한 사상적, 실천적 고투를 되살려내며, 흔히 권모술수의 화신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손자의 사상을 평화학의 맥락에서 재평가한다. 오랑캐의 눈으로 볼 때 우리 사유의 지평이 얼마나 풍요롭게 뻗어갈 수 있는가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지금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의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사진/ 중심의 논리를 벗어날때 사물은 달리 보인다. 그럼으로써 노자의 사상은 급진적 관용철학으로 재해석된다.
지은이가 말하는 오랑캐의 즐거움이란 중원의 사고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중원의 사고는 오랑캐에겐 진리가 가능할 수 없다는 폭력을 포함하기 일쑤다. 반대로 오랑캐의 사유는 진리는 하나라는 일체의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데서 출발한다. “오랑캐의 관점에 서서 사유한다는 것은 역사를 자기중심으로 조직하는 일을 포기하는 걸 뜻하며, 자기중심적인 사유로 형이상학을 만들어내는 일을 포기하는 걸 뜻한다.”(333쪽) 오랑캐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중심의 논리와 달리 볼 수 있는 능력인 상상력이 해방되며 사유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다. 책 제목이 낯익은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2000년 9월부터 1년여간 <한겨레21>에 매주 연재된 <이상수의 동서횡단>을 모아 펴낸 것으로, 책 제목은 마지막 50회째 연재물의 제목을 그대로 살렸다. 연재 당시 지면의 제약 때문에 논지를 충분히 풀어내지 못한 부분에 각주를 달거나 보충하는 수준에서 다듬었다. 또 50회분을 ‘거대한 논쟁의 서막’, ‘공자, 중용의 철인’, ‘노자의 급진적 관용철학’, ‘묵자, 사랑의 사회과학’, ‘손자의 전쟁과 평화’, ‘휘갑’(마무리) 등으로 나눠 묶었다. 그런 구획을 따라가며, 이 책에선 주로 논쟁의 방식으로 이뤄져온 서양철학과 대비되는 동양철학의 덕쟁 개념을 중심으로 동양적 사유의 특성을 다채롭게 펼쳐보인다. 이 때문에 일단 여기서 오랑캐의 사유는 덕쟁의 동양적 사유로 읽힌다. 근대 이래 전일적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는 서양의 이성중심적 논리에 밀려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된 채 동양에서조차 쇠락의 길을 걸어온 동양철학의 사유에 담긴 잊혀진 상상력의 가능성을 새로이 보듬어 살피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양의 논리가 결코 그 자체로 오랑캐의 사유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동양철학 그 자체도 이미 중국 중심의 화이관을 안에 품고 있으며, 오랑캐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런 동양철학의 전통적 화이관마저 해체해 새롭게 재구성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반계급 주류를 지배했던 소중화 의식의 허구성을 돌아볼 때 이러한 또 한겹의 비판적 성찰을 더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오랑캐의 사유란 밖의 중심주의를 배격하는 것 못지않게 안의 중심주의와도 결별하는 일이다. 안과 밖의 중심주의 배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