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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노를 저어라 ‘대중’의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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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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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추리물·SF 등 ‘펄프 장르’가 한국에서만 유독 천대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팔리거나 혹은 죽거나. 대중문화의 운명이 이렇다. 대중이 잘 사주면 그만큼 흥하고 외면하면 망해간다. 우리의 대중문화에는 묘한 게토들이 형성돼 있다. 외국에서 잘 나가는 판타지, SF, 추리물 등 ‘펄프 장르’가 이곳에서는 유독 천시받으며 소수로 남아 있고, 반대로 작가주의 상품들은 너무 ‘고고해서’ 고립돼 있다. 상반돼 보이나 정작 같은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재조명이, 특히 대중과의 따뜻한 소통이 필요해보인다.

지난 1월1일 개봉한 <반지의 제왕>은 개봉 첫날 좌석점유율 97%를 기록하며,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황금가지에서 출판된 <반지의 제왕>도 영화가 화제가 되면서 판매고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판타지의 유행이 돌아온 것일까? 아니 시작된 것일까?

냉대받는 대중소설의 걸작들


한국에서 판타지란 아주 익숙하고도, 또 낯선 장르다. 출판시장에서 판타지가 차지하는 몫은 거의 10%에 달한다고 한다. 정통적인 판타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우혁의 <퇴마록> 등장 이후 판타지를 중심으로 한국 대중소설의 양적 성장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박차를 가했고, 출판사 자음과 모음은 판타지 소설을 연이어 출간하며 출판시장을 휩쓸었다. 게임분야에서 한국이 가장 앞서 있는 분야인 온라인 게임의 주력 장르도 <드래곤 라자>를 비롯한 판타지 장르다. 젊은 세대에게 판타지는 가장 익숙한 장르의 하나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판타지는 여전히 낯선 장르다.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이전에 판타지영화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개봉했던 <던전 드래곤>도 완전히 실패했다. 판타지 소설이 출판시장에서 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그건 팬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만들어 그 장르를 발전시켜나가는 현상, 곧 팬덤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까지 <반지의 제왕>의 판매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수많은 판타지의 팬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반지의 제왕>과 함께 세계 3대 판타지로 꼽히는 U.K. 르귄의 <어스시> 시리즈는 잠깐 나오다가 중단되었고, C.J.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그 수많은 판타지 팬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한국에서 판타지 붐은 출판이 아니라, 넷에서 시작했다. 동호회에 글을 올리고,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격려와 호응을 해주고, 거기에 힘을 얻어 다시 글을 올리는 과정이 반복되며 엄청난 인기를 모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우혁과 이영도 같은 스타 작가가 등장했고, 곧 영향력을 출판시장으로까지 넓혔다. 이들의 성공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간극을 좁히는 데까지 이르렀다. 소설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소설을 써서 올리는 것이 보편화된 것이다.

그러나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같은 유장하고, 완만한 문장을 넷상에서 읽어나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대중소설이 유난히 취약하다. 추리, SF, 공포, 환상, 판타지 등의 대중적인 장르는, 한국에서는 마니아들만이 찾는 소수 장르다. 미국에서는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는 스티븐 킹도 한국에서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딘 쿤츠, 클라이브 바커 등의 작가들은 더 심하다. 미국의 경우 스티븐 킹, 존 그리샴, 마이클 크라이튼 등의 대중 작가가 출판시장을 끌고 나간다. 하지만 이 작가들은 한국시장에서 한때의 유행일 뿐이었다. 추리소설은 외국의 출판계에서 큰 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추리소설은 찬밥 신세다. 한때 김성종이란 인기 작가도 있었지만, 지금은 유명무실하다.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을 내도 아예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는다. 추리소설이라고 광고를 하면 오히려 독자가 좁혀지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대중소설에 대한 이해가 앝다는 것이다. 아니 대중소설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통로가 별로 없다. 추리소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가장 빠른 방법은 고전과 걸작들을 접하는 것이다. 하지만 책이 없다. 해문출판사에서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을 내왔고, 최근 추리물의 고전들을 내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셜록 홈스나 루팡이 등장하는 작품을 읽고 싶어도 아이들용으로 축약된 작품밖에 구할 수가 없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만이 겨우 나와 있는 등 하드 보일드의 고전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 덕에 추리소설 하면, 애거사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의 고전적인 밀실 추리 정도를 떠올리는 것이 고작이다. SF쪽 사정도 비슷하다. SF의 고전들을 냈던 시공사의 그리폰 북스의 판매고는 권당 2천부. 더이상 늘지도 않고, 더이상 줄지도 않는다. 최근 그리폰 북스도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돌고 있다. 지금까지 출간된 SF의 고전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니 대중소설에 대해 이해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실체를 만날 수가 없으니까.

동호회에 갇혀 버린 펄프 장르

물론 누구나 대중소설의 고전을 읽고, 거기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대중적인 작품들만 읽어도 무리는 없다. 하지만 요즘 외국에서 나오는 대중소설들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않고 있다. SF나 판타지, 추리소설에 관심을 갖게 되고, 파고들려 해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원서를 찾아서 읽는 것은 극소수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한정된, 일정한 경향의 작품들만 계속 읽어서는 발전이 없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한국 판타지가 더이상 발전하지 않는 이유는 고전을 출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고전이 아니라, 지금 외국에서 출간되는 판타지의 수작들이 출간되기만 해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한국의 판타지는 지금의 수준에서 그대로 만족해버린다. 동호회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팬덤의 덫에 갇혀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괴테의 ‘외국어를 공부해야 모국어의 소중함과 뛰어난 점을 알게 된다’는 말처럼,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대중소설들을 애초에 싸구려라고 폄하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외국에서 이른바 ‘펄프 장르’가 인정받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에서는 20세기 초반부터 모험과 공상적인 이야기를 담은 대중잡지가 등장했고, <어메이징 스토리>나 <블루 북> 같은 잡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에도 범죄소설을 담은 <블랙 마스크>, 호러와 판타지를 담은 <위어드 테일즈> 등 장르마다 몇 종류의 대중잡지가 등장해 독자들을 흥분시켰다. 여기에 담긴 소설들은 말 그대로 ‘대중’소설이었다. 우리가 대중적인 영화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듯 액션과 사랑, 음모와 복수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가 담긴 소설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주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할 의도로 쓰여지던 소설 속에서, 차츰 문제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SF와 범죄소설의 대가들도 모두 이런 대중잡지에 글을 연재하면서 명성을 쌓아갔다. 그리고 범죄소설의 레이먼드 챈들러, SF의 U.K. 르귄이나 레이 브래드버리 등 수많은 작가들이 문학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동시에 60년대 이후 SF나 추리소설의 기법을 활용한 순문학의 등장은 더이상 낯선 것이 아니었다. 순문학은 대중문학의 ‘대중적’인 기법을 차용했고, 대중문학은 순문학의 기교와 영혼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모든 순문학이 영혼의 정수가 아닌 것처럼, 모든 대중문학은 쓰레기가 아니었다. 순문학이건 대중문학이건 수작과 걸작이 전해주는 감동과 전율은 동일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출판사에서 추리소설과 SF소설 등을 많이 출간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지금 영화계에서는 그런 방법을 쓰고 있다. 지난해의 조폭영화 유행에 이어 올해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예스터데이> <아 유 레디> 등 SF와 판타지 성향의 작품들이 쏟아져나온다. 과거와는 달리, 현재의 젊은 관객에게는 이런 ‘공상’적인 장르가 거부감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해도 수익을 뽑는 데 큰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출판계의 상황은 좀 다르다. 그리폰 북스의 판매부수가 2천부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출판사로서는 수지가 맞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인 출판사에 손해를 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물론 투자, 라는 개념에서 장기적인 포석을 깐다면 좀 다른 문제이겠지만.

대중화를 위해 가야 할 길

음반사 중에 ‘시완 레코드’란 곳이 있다. 마니아 팬을 거느리고 있던 DJ이자 음악평론가인 성시완이 만든 음반사이다. 80년대부터 ‘아트록’이란 장르를 열심히 전파해온 성시완은 아트록 음반을 직접 라이선스로 출시하기 위해서 ‘시완 레코드’를 만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타인에게도 들려주기 위해서 직접 음반사를 차린 것이다. 아트록은 외국에서도 소수 마니아들이 듣는 음악이기 때문에 음반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구한다 해도 고가였다. 그러니 일반인이 아트록에 관심이 생겨도, 방법은 라디오에서 녹음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시완 레코드’에서 라이선스 음반을 출시하면서 아트록은 물론이고 브리티시 포크의 명반들까지도 직접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시완 레코드의 음반은 여전히 소수에게만 팔리지만, 그 의미는 분명하다. 소수 마니아들에게 소비되는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드는 방법은, 그 재미와 가치를 다수에게 전파하는 것뿐이다. 시완 레코드의 선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트록’은 여전히 마니아를 위한 음악이고 사멸해가는 장르다. 하지만 이른바 펄프 장르는 차원이 다르다. 아트록과 달리, SF나 추리는 한국에선 소수 마니아용으로 취급당하지만 외국에서는 너무나 대중적인 장르다.

펄프 장르의 대중화와 소수가 즐기는 작가주의적인 장르를 알리는 경우는 좀 다르다. 요즘 유행인 미국과 유럽의 만화 출간 붐을 보자. 서구에서 이들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만화와는 다르다. 일본만화와 구분하기 위해서도, 일본만화를 따로 ‘망가’라고 부를 정도다. 이 ‘그래픽 노블’은 한컷의 그림 자체를 대단히 중시하고, 마치 그림에 텍스트가 얹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림으로 읽는 소설인 셈이다. 모두 컬러로 그려지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와 예술적인 노력도 막대하고 또 그만큼의 인정도 받는다. 마블 코믹스 등에서 출간하는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영웅물은 대중적인 ‘펄프’로 취급되지만, 그것 또한 만만한 것은 아니다. 영웅물의 대가로 손꼽히는 알렉스 로스나 앨런 무어가 그린 <배트맨> 시리즈 등은 어떤 작가들의 그래픽 노블 못지않은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런 그래픽 노블의 출간은 그것을 대중적인 장르로 만들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그 예술적 가치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있다.

한국에서 펄프 장르의 주류 진입은, 한국 문화산업의 엔터테인먼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판타지 소설의 질적 성장이 답보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0%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재미로 읽는 책을 원하는 세대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 일본의 출판사 가도카와서점은 80년대 ‘엔터테인먼트 출판’, ‘한번 보고 버리는 책’, ‘미디어 믹스’ 전략을 통해 일본 문화산업을 주도하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변신했다. 마찬가지로 현재 정체상태에 있는 한국 출판산업의 탈출구는 ‘대중소설’이 될 수밖에 없다. 책의 엔터테인먼트화는 어쩔 수 없는 세태의 흐름이다. 그것은 한국영화계에서 이미 거치고 있는 길이다. 시장을 키우기 위해서는, 다수의 관객을 확보하는 전략으로 나아가야 하고 기업을 거대화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미 추리나 SF 같은 장르의 소설들을 굳이 ‘펄프’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미 대중화된, 주류소설이다. 일본의 주요 문학상 중 가장 권위있는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은 각각 순문학과 대중소설에 주어진다. 그런데 일본 작가 중에서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면 책이 팔리지 않기 때문에 수상을 거부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미 무게 중심은 아쿠타가와상보다는, 나오키상으로 넘어간 것이다.

독자가 지키고 만들어가는 장르

사진/ 우리 사회에서는 추리소설의 고전을 접할 기회가 없다. 고작해야 애거사 크리스티나 앨러리 퀸 정도다.
한국에서 SF나 추리, 판타지 장르의 약세는 유난히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고, 현실에 무게를 두는 사회적인 풍토 탓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문화산업이 아직 덜 여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중심적 대중문화인 영화부터, 문화산업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거기에 맞추어 ‘펄프 장르’ 역시 주류로 진입해갈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국내 판타지 소설의 파탄에서 보듯이, 문제는 양적 성장이 아니라 질적인 비약이다. 그 책임은 생산자만이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있다. 게다가 요즘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구분이 점점 엷어지는 시대다. 소비자의 게으름과 태만이, 쉽게 대중문화를 부패시킬 수 있는 것이다. 펄프 장르가 중요해지는 이유는 거기에도 있다. 대중적이고, 세태를 쉽게 반영하는 만큼 쉽게 부패할 수 있기 때문에. <반지의 제왕>은 톨킨의 팬인 피터 잭슨과 50년간 책을 읽어온 독자들이 만들어낸 영화다. 그들의 힘이 <반지의 제왕>을 지켜왔고, 또 뛰어난 영화로 빚어낸 것이다. 이른바 ‘펄프 장르’는, 독자가 지키고 만들어가는 장르인 것이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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