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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영화 “<쉬리>가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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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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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부터 부진의 늪에서 허우적… <공동경비…> 앞세운 하반기는 일단 청신호

(사진/한국 영화는 이번 추석에 오명을 씻을 것인가.<공동경비구역 JSA>는 일단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
2000년 상반기 한국영화계는 과연 어떤 성적을 거뒀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99년 <쉬리>의 흥행 돌풍이 그리울 따름이다. 지난해 40%를 넘었던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올해 상반기엔 24.7%로 뚝 떨어졌고, 올 상반기 한국영화 관객수는 7월2일까지 약 297만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10%가량 줄어들었다. 상반기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관객이 몰린 작품은 불과 손꼽을 정도로 한국영화는 상반기 동안 부진에 부진을 거듭했다.

올 상반기 한국영화 흥행은 초반기 잘 나가다가 봄철부터 극심한 침체를 맞았다. 특히 본격적으로 수입된 일본영화들이 한국영화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관객을 불러모은 점은 올 상반기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이다. 또한 최근 몇년 동안 계속 이어졌던 주목받는 신예들의 데뷔가 올해는 자취를 감춰버린 점도 특징이다.

<박하사탕>으로 출발은 나쁘지 않았는데…


상반기 선보인 영화들 가운데 관객수(이하 괄호 안은 서울관객임) 20만명을 돌파한 영화는 겨우 5편. <반칙왕>을 제외하곤 모두 관객수 30만명 언저리에 걸쳐 있다. 할리우드 직배영화도 지난해에 비해 7%가량 점유율이 떨어졌지만, 대신 일본영화가 9.8%의 시장점유율을 보이며 상당한 영향력을 보였다. 세계 4대 국제영화제 수상작만으로 제한했던 98년 1차개방 때와 달리 개방범위가 크게 넓어진 지난해 2차개방의 여파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작품이 바로 지난해 연말 개봉해 해를 넘기며 인기를 모았던 <러브 레터>. ‘오겐끼데스까?’(잘 지내세요?)라는 대사를 유행시키면서 7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러브 레터> 이후로도 <철도원> <사무라이 픽션> <쉘 위 댄스> 등의 일본영화들이 모두 20만 고지를 넘겼다. 20만명 이상 흥행작 편수만 따지면 한국영화와 맞먹는 성적이다.

올해 한국영화의 출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새해 벽두 개봉한 <박하사탕>(31만1천명)은 “진실의 영화”라는 평단의 호평에 그치지 않고 ‘두번 보기 운동’을 벌이는 관객의 적극적인 반응까지 부르며 개봉 초기보다 극장수가 늘고 상영기간이 늘어났을 정도로 선전했다.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2번이나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뒤 천신만고 끝에 개봉한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도 관객수 30만명을 넘겼다. 상반기 한국영화 중 유일하게 50만명이 넘는 흥행성적을 올린 <반칙왕>(81만7천명)은 경쟁이 치열한 성수기인 설 연휴 3일 동안 서울 23개관에서만 11만 관객을 불러모았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조용한 가족>에 비해 좀더 대중적인 소재와 장르를 선택한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은 개봉 1주 만에 관객수 20만을 육박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아메리칸 뷰티>(31만8천명)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앞세운 <비치>(21만6천명)가 뒤를 쫓았지만, <반칙왕>은 멀찌감치 앞서가며 독주를 계속해 결국 올 상반기 최고의 흥행작이 됐다.

아쉬운 점은 신인감독들의 부진이다. 새해 직전 개봉해 안정감 있는 연출력으로 주목받았던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50만6천명), 신선한 생기를 불러넣었던 민규동, 김태용 감독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5만6천명)를 잇는 눈에 띄는 작품은 없었다. 제목처럼 아이러니한 설정이 주목을 받았던 장문일 감독의 <행복한 장의사>(7만5천명)는 웃음과 슬픔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해 쓰러졌다.

또 하나 올 상반기 화제는 우노필름의 지독한 흥행부진이었다. 신인감독들의 재기작을 잇따라 내놓았던 우노필름은 단편 <지리멸렬>으로 인정받은 봉준호 감독이 만화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플란다스의 개>(4만명)를 포함, 상반기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흥행에 실패했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10만명)이나 강력한 배급망을 보유한 시네마서비스가 제작했던 <주노명 베이커리>(4만1천) 등도 흥행에서 참패했다.

메이저 투자사는 오히려 증가

(사진/올 여름 유일하게 관객을 모든 <비천무>.졸작이라는 악평에도 불구하고 76만명을 불러 모았다)
초반 상승세였던 한국영화는 극장 비수기인 봄철에는 극심한 침체에 빠졌다. 시장까지 위축돼 충무로 안팎에서 ‘위기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편지>의 기세를 몰아 3년 만에 극장을 찾은 이정국 감독의 <산책>(7천명)을 비롯해 함량미달인 <천일동안…>(1만명), <신혼여행>(4만2천명), <진실게임>(1만명), <그림일기>(1천명) 등이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다. 데뷔 전부터 각광받던 유학파 변혁 감독의 <인터뷰>(16만7천명)가 그나마 선전했지만 뒷심부족으로 20만명도 넘기지 못했다. <인터뷰>는 평단으로부터 깔끔한 연출과 세련된 형식이 돋보인다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지만 심은하와 이정재 투톱스타를 잠식해버린 모던한 스타일이 관객을 사로잡지 못했다. 5억5천만원으로 만든 김기덕 감독의 저예산영화 <섬> 역시 남성 평론가들과 여성 평론가들의 논쟁을 부르면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배급망도 탄탄했지만 3만5천명이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하지만 <섬>은 개봉 이후 일본과 프랑스에 수출돼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침체된 시장상황 속에서도 시네마서비스와 워버그핀커스, 우노필름과 로커스, 강제규필름과 KTB가 결합하는 등 상반기에 메이저 투자사들은 오히려 늘어났다. 무모한 투자가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만 하반기에 기대할 만한 작품이 제작될 수 있는 여건이 꾸준히 조성된 점은 그나마 올해 하반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쉬리>를 빼면 시장점유율이 예년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통계도 ‘위기론’이나 ‘거품론’이 너무 성급한 진단 아니냐는 비판의 근거가 됐다.

여름철 극장가는 봄철의 부진에서 조금 벗어나 회복세를 보였다. 지난해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주유소 습격사건>처럼 대박을 기록한 영화는 없었지만 <나인야드>(28만)와 <헌티드 힐>(23만6천) 등 외국영화들이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는 동안 한국영화는 <동감>(제작사 집계 36만명)과 <아나키스트>(24만8천명)가 예상외의 롱런을 하면서 어느 정도 부진에서 벗어났다. <동감>은 유지태라는 브랜드 하나만으로 5월부터 여름방학까지 버텼고, 20억원이 넘게 들어간 제작비를 과연 뽑아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던 <아나키스트>도 지방 극장가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수렁 속 한줄기 빛, <죽거나…>

(사진/<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여름 극장가에서 단연 빛나는 수작이다. 신예 류승완감독의 실험성에 관객은 높은 좌석점유율로 답했다)
한해 농사를 좌우하는 여름방학시즌은 늘 그랬듯 할리우드 대작들이 대박경쟁을 벌이는 시즌. 특히 올해는 할리우드의 양대 블록버스터인 <글래디에이터>와 <미션임파서블2>이 모두 관객수 100만명을 넘기며 흥행을 휩쓸었다. 이들 두 영화는 서울에서만 30∼40개 극장에서 개봉되면서 한국영화들을 밀어냈다. 80년대의 간판스타였던 배창호 감독이 고군분투해 만든 <정>은 고작 2천명을 모았다. <정>은 많은 평론가들이 높은 점수를 줬지만 흥행은 최악을 기록해 올해 가장 안타까운 작품으로 꼽힐 정도였다. 관객은 98년 데뷔작 <여고괴담> 한편으로 재능을 인정받았던 젊은 박기형 감독의 <비밀>(2만명)에도 무심했다. 올 여름 유일하게 관객이 몰린 국산영화는 <비천무>. 정통 무협영화를 내세우며 40억원 이상의 제작비를 투여한 블록버스터답게 영화적으로 졸작이라는 악평에도 불구하고 76만명을 불러모았다. 다른 국내 영화 가운데에서는 <가위>(33만명)와 <미인>(21만명)이 그런 대로 성공한 편이다. 반면 일본에서 자국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웠던 <춤추는 대수사선>과 <링2>는 각각 38만명과 28만명을 동원하며 또다시 선전했다.

그러나 올 여름 한국영화계가 완전히 최악이었던 것은 아니다. 수렁에서 건진 작지만 알찬 수확들이 있었다. 관객수 7만5천명으로 흥행성적은 주목받을 정도가 못됐지만 16mm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유승완 감독)는 관습을 비틀고 장르를 이어붙인 돋보이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스탭과 배우 모두 무보수로 가세하고, 수익구조를 내기 위한 실험적 시스템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언론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기도 했다. 좌석수 200∼300명선의 소규모 극장 4곳에서 7월15일 조촐하게 개봉했지만 주말 90%, 평일 60% 이상 좌석점유율을 기록하면서 나중에는 35mm판으로 바뀌어 상영됐을 만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그 자체로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전반적인 침체에 빠진 한국영화가 과연 추석시즌과 함께 시작되는 하반기에는 어떤 성적을 거둘까? 하반기 개봉을 앞둔 영화들 가운데는 특히 많은 제작비를 투자한 대작들이 많아 특히 흥행결과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단 하반기 분위기는 좋은 편이다. 상반기 투자자들이 늘면서 지난해보다 많은 영화가 제작될 전망이어서 내년 상반기를 포함한 하반기 한국영화가 도약할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물론 시장점유율은 제2의 <쉬리>가 없는 한 내려갈 전망이지만 영진위는 점유율이 30% 미만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스크린쿼터 날짜수를 지켜야 하는 극장들이 하반기에 한국영화를 잡기 위해 몰릴 것이라는 점도 하반기를 다소 희망적으로 점치는 요인이다.

추석시즌, 다시 한번 붙어보자!

(사진/ 위쪽부터 <시월애>, <단적비연수> )

일단 추석에 선보이는 한국영화 가운데에는 대박 가능성이 높은 영화가 끼어 있다. 서울 40개 극장에서 개봉하는 명필름의 <공동경비구역 JSA>다. <공동경비구역…>은 남한과 북한 병사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상반기 안티스타시스템으로 최적의 캐스팅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박하사탕>과는 정반대로 송강호, 이병헌, 신하균, 김태우, 이영애 등 다섯명의 스타들이 서로 다른 호흡과 리듬을 맛나게 버무려놓았다. 같이 추석에 개봉하는 <시월애>도 주목거리다. 이정재와 전지현 두 톱스타가 시간을 뛰어넘어 사랑을 하는 멜로물로, <유령>으로 잘 알려진 홍경표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은 것도 기대되는 점이다.

한편 추석을 겨냥하고 있는 외국영화 가운데 가장 강자로 예상되는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보다도 <원초적 본능>의 폴 버호벤 감독이 만든 <할로우 맨>이다. 9월2일 개봉한 <할로우 맨>은 투명인간 이야기에 호러와 슬래셔 장르를 배합한 블록버스터다. 이 밖에 화려한 액션영화임을 내세우는 할리우드 잠수함영화 과 프랑스에서 99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택시2>와 함께 때늦은 감이 있는 일본산 공포영화 <토미에 리플레이> <소용돌이> 등도 미리 극장을 잡고서 추석을 기다리는 다크호스들이다. 흑인들의 삶을 통해 심도깊게 인종문제를 다루어온 존 싱글턴 감독의 <샤프트>는 피부색깔로 규정된 할리우드의 뿌리깊은 캐릭터 도식을 과감하게 바꾸어놓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지만 흥행여부는 미지수다.

어쨌든 쾌조의 스타트를 잇지 못한데다 여름 내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완패한 한국영화로서는 이번 추석이 오명을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물론 하반기의 흥행지수가 내년 이후 한국영화 상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진할 경우 앞으로 한국영화 제작상황의 도약 가능성을 깎아내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공동경비구역 JSA>와 <시월애>가 앞으로 개봉을 기다리는 강제규필름의 <단적비연수> 등 올해 마지막 스퍼트를 준비할 한국영화들에 순조롭게 바통을 넘겨줄 것인지 더욱 주목된다.

이영진 기자/ 한겨레 씨네21부ant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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