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탕진잼이 시사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 잠시 역사가 탕진을 어떻게 그려왔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탕진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가 아닐까 싶다. 17세기 렘브란트 그림으로도 유명한 성서 속 이야기는 부모의 사랑, 나아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을 비유하고 있지만, 그에 대비되는 아들의 모습은 많은 재산을 탕진한 패자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자본주의 이전부터 존재했던 ‘탕진잼’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화가로 꼽히는 렘브란트가 ‘돌아온 탕자’를 모티브 삼아 그린 것은 당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관련 있어 보인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이전 전통주의적 사고는 필요한 만큼 돈을 벌고, 그 이상은 노동하지 않는 데 있었다. 가톨릭교회와 결별한 이후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던 프로테스탄트교는 근면성실한 노동과 그 결과로서 부의 축적을 신의 선택을 나타내는 지표로 삼아 자본주의 정신을 발전시켜나갔다. 다시 말해 ‘노동’이라는 계획되고 통제된 행위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었고, 이를 삶의 목적으로 여김으로써 합리적 자본주의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칼뱅주의 같은 프로테스탄트교 문화에서 이런 양상은 짙게 나타나는데, 주목할 점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금욕주의도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노동과 부를 축적해 신의 소명에 다가가지만 그것이 전부일 뿐 과도한 소비 등 부를 향유하는 부차적 행위는 경시되었다. 부의 축적을 추구하면서 금욕적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은 일면 배치되어 보인다. 하지만 실상 노동이 구원으로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라고 전제했을 때, 소비를 포함해 노동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를 배제하는 사고방식으로서 금욕주의는 이해 가능하다. 탕진을 경계하는 금욕적 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국가저축위원회(British National Savings Committee)의 프로파간다(선전·선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국가저축위원회는 전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영국 국민에게 과소비를 자제하고 저축을 늘리도록 권고했다. 경직된 사회에서 소비는 개인의 해방구 삽화가 필립 보이델은 국가저축위원회에서 과소비 예방 포스터 제작을 의뢰받아 ‘돈 벌레’(money grub)라는 캐릭터를 창안했다. 이후 이 캐릭터에 ‘탕진 벌레’(squander bug)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등 여러 작가가 변형해 대중화되었다. 과소비 예방 포스터에는 장바구니에 돈 벌레 또는 탕진 벌레가 기생하며 소비자에게 ‘더 많은 것을 사라’고 종용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처럼 무분별한 소비를 죄악시하는 금욕주의적 시각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성장주의를 추구하거나 물가상승률을 경계하는 국가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실정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전 한국 사회에서도 저축과 근검절약은 보편타당한 사회 미덕이었다. 그에 반해 탕진은 그야말로 해서는 안 되는, 또 쉽사리 할 수도 없는 행위로 간주됐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탕진을 경계하는 사회 분위기는 통제 혹은 관리와 관련 있다. 근대의 합리성에 따라 개인은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했고, 자신의 삶을 계획적으로 꾸려나가야 했다. 이와 반대로 본능의 욕구를 따르는 것은 미개하고, 개인의 삶을 망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태도라 여겼다. 하지만 현대사회가 고도의 복잡성을 띠는 가운데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끊임없이 통제·관리하는 이전 방식은 점차 실효성을 잃었다. 더군다나 저성장과 신자유주의적 경쟁은 사회계층 간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고, 경직된 사회 안에서 소비는 개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해방구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탕진이라는 사회적 금기는 앞서 살펴본 신의 선택이나 국가와의 계약이라는 존재론적 명분이 의미를 잃은 오늘날 탕진잼과 같은 형태로 변형된 것인지 모른다. 탕진잼에서 탕진은 과거와 같이 모든 재산을 소진함을 의미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이 가진 것 이상으로 소비하는 과소비의 의미도 아니다. 그보다는 마땅히 재산이라 할 만한 것도 없고, 일정한 돈을 모아 집과 같은 더 큰 재화와 교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약간의 여유자금을 필수 품목이 아닌 재화를 소비하는 데 지출하는 ‘(현실)타협적 탕진’의 의미를 띠고 있다. “순수한 소비갈망은 사실 어떤 계급에게는 사회 이동의 면에서 중대한 실패를 보상하는 것일 수 있다. 소비충동은 사회계급의 수직적인 서열에서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보상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특히 하층계급의) ‘과소비’ 갈망은 지위를 추구하는 요구의 표현인 동시에 이 요구의 실패를 체험한 데서 나오는 표현일 것이다.” 일찍이 장 보드리야르는 1960년대 프랑스 소비문화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위와 같은 분석을 내렸다. “소비를 학습하고 소비에 대한 사회적 훈련을 하는 소비사회”의 화려한 모습 뒤로 사회적 안정에서 멀어진 이들의 허탈감과 저항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내일의 불확실성을 이겨내는 것 2016년 말 한국의 20~30대에서 회자되는 탕진잼에서도 이와 유사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자신에게 허락된 범위에서 최대한 소비함으로써 탈금욕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 이를 다른 ‘탕진재머’(탕진잼을 향유하는 이들)와 공유하고 ‘탕진력’(탕진하는 능력)을 인정받음으로써 내일의 불확실성을 이겨내려는 것. 한정된 예산에서 사사로운 물건을 모조리 사들여 일순간일지언정 억눌린 소비욕망을 발산하는 것. 소소하게 탕진한다고 해서 별반 달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주인 없던 물건들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암울하게 보일 수 있는 상황을 재미로나마 위로하는 것. 탕진잼은 오늘도 불안한 세대의 파토스(pathos)를 담아 가상의 별 주변을 떠돌고 있다. 강보라 영상학 박사·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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