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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림 같은 음악, 미소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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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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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이야기>의 음악을 만든 이병우씨…바다 속 심연에서 울리는 타악기 소리를 들어보라

사진/ (김종수 기자)
“어렸을 적, 입을 벌리고 TV만화를 보면 가족들이 제 입을 닫아주곤 했습니다. 이번 작업을 맡게 되었을 때 여러 사람과 작업을 할 테니 입을 꼭 다물어야지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밤 입을 약간 벌린 채 화면을 보며 미소짖고 있는 나를 인식하고는 약간은 당황했지만 곧 어떤 추억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참 많이 닮았다. 느리고 조용한 말투, 좀처럼 변하지 않는 선한 얼굴. 그리고 O.S.T 앨범 재킷에 짧게 적어놓은 글까지.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의 음악을 만든 이병우(37)씨는 아름답지만 달콤하지 않고, 어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아이들의 이야기인 이 작품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어떤 날’을 기억하시나요


<마리이야기>는 10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99년 가을 돌아와 처음 떠안은 작업. 그 사이 개인독주회와 오케스트라 협연 등으로 분주히 움직이면서도 밥을 먹을 때나, 운전할 때, 샤워할 때까지 그를 붙잡아 두었던 일이다. “늘 그렇지만 시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죠. 이성강 감독님이 원하는 바에 최대한 다가가려고 노력하긴 했는데 결과가 어떤지는 판단 못하겠어요.” <마리이야기>에서 음악은 극적 효과가 아닌 그림의 일부처럼 다가온다. 이씨가 “마지막까지 힘들었다”고 표현하는, 주인공 남우가 환상으로 들어가는 장면의 타악기 소리는 침묵의 소리라고 표현해야 적당할 만큼 바다 심연의 정적을 아름답게 표현해냈다. 회화 같은 이병우의 음악과 음악 같은 <마리이야기>의 그림들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이’ 만난 셈이다.

대중에게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씨가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신화처럼, 전설처럼 남아 있는 듀오 ‘어떤 날’의 멤버였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스물두살의 나이에 베이시스트 조동익씨와 결성한 ‘어떤 날’이 발표한 두장의 앨범은 지금까지도 전문가들이 다섯손가락 안에 꼽는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지금 들어보면 꼭 오래 전에 찍었던 촌스러운 사진을 보는 느낌이에요. 부끄럽지만 즐겁죠.” 들국화의 첫 앨범에 수록됐던 ‘가요같지 않은’ 가요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나 91년 양희은씨가 발표한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도 이씨의 손끝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89년 첫 번째 독집을 내자마자 그는 오스트리아 빈국립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클래식 기타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94년 졸업 뒤 잠시 국내에서 활동하다 96년 다시 미국으로 가서 99년까지 기타 공부를 계속했다. 10년 동안 클래식 연주를 공부하고 온 그가 클래식 전문연주자로 활동하지 않는 건 의아해보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 유학을 다녀온 건 아니에요. 클래식이 너무 좋아서 공부하러 갔지요. 제가 생각하는 음악에는 경계선이 없습니다.” 95년 발매했던 4집 음반에서 그는 창작곡들과 16세기 음악가 존 다울랜드의 곡들을 함께 녹음했다. 그의 방식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범주 안에서 어디 속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공포물 <메모리즈>에선 어떤 음악이?

지난해에도 그랬지만 그는 올해도 영화음악을 만들고, 오케스트라와 정통 클래식 협연을 연습하며, 클래식만도 대중음악만도 아닌 독주회를 만들어갈 계획이다. 그리고 해를 넘겨 미뤄온 5집 앨범도 올해는 마무리할 계획. “지난해 5집 음반 곧 나올 거라고 말해놓고 거짓말이 돼서 너무 민망하고 쑥스럽네요. 도중에 앨범 컨셉이 바뀌었거든요.” 기타와 전자음악을 섞어보려고 하다가 기타 솔로 창작으로 가기로 했다. 해외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 편이 나을 거라는 결론을 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씨는 올 3월이 목표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또 거짓말 되면 어쩌지?” 한다. 이씨는 독집 준비와 함께 또다른 영화음악 작업으로 다시 바빠질 예정이다. 학교다닐 때부터 친한 친구인 김지운 감독의 신작 <메모리즈>의 음악을 맡았다. <마리이야기>에서 유리알처럼 맑았던 그의 음악이 정통 공포물인 김 감독의 신작에서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진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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