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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젠 개천에서 용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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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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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배층에 숨통을 터줬던 대학입시, 그러나 갈수록 약화되는 계층 이동의 기능

사진/ 수능시험장의 풍경. 입시제도는 "모든 사람에게 불평등해질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신화에 기초하여 사회적 불평들을 정당화하고 있다.(김종수 기자)
해마다 겨울철이 되면 온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대학입시이고,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수능시험이 갑자기 어려워져 2000년보다 평균점수가 60∼70점가량 떨어지고 보니, 2002년 입시에서는 과외 열기가 한층 더 심해질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도 나온다. 입시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생겨난 지도 십수년은 되건만, 불행히도 그런 사람이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전통시대 향교의 붕괴

수십년째 해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는 입시를 보면, 우리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나쁜 패턴이 자꾸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는 혼탁한 우리 사회에서 나름대로 공평성을 유지해온 대학입시가 점점 더 가진 자들, 배운 자들의 잔치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입시의 혼탁과 과열화가 공교육의 붕괴를 수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전통사회에서 공교육의 붕괴현상을 살펴보자. 우리의 역사를 보면 고려시대에는 국자감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이 있어 공교육의 최고기관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미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 등 12공도가 융성하였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서원이 전국 방방곡곡에 설립되면서 중심적인 교육기관으로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공교육 기관인 향교는 지방관이 파견되는 1고을당 1개씩 모두 329개소가 설립된 반면, 서원은 고종대에 이르면 무려 1173개소에 달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널리 설립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에만 하더라도 건국의 주체들은 모든 민을 교육시킨다는 포부를 갖고 관학교육(官學敎育) 진흥정책을 폈다. 그러나 향교를 통해 교육받은 평민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내줄 사회적 지위나 대우는 준비되지 않았다. 하층계급이나 신분으로부터 재주있는 사람들을 적당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신분제도의 골간을 유지하는 중요한 방편이지만, 평민층을 대대적으로 교육시킨다면 이는 또한 신분제 자체를 동요시킬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 때문에 조선의 엘리트들은 향교교육을 내실화하는 데에 극히 소극적이 되었고, 향교의 교수나 교관의 파견도 점차 흐지부지되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영남지방의 경우 그래도 향교의 기능이 늦게까지 유지되었지만, 경기와 충청지방에서는 향교의 쇠퇴가 급속히 이루어져 양반으로서 향교의 교생이 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양반 유생들이 향교를 떠나 서원으로 몰리자 향교의 질은 더욱 떨어지고, 교생(校生)의 신분도 더욱 하락하게 되었다. 이제 향교의 주된 기능은 공자와 맹자에 대한 제사와 교육기능에서 지방의 부유한 농민들이 군역(軍役)을 회피하는 수단이요, 지방관에게는 이들 피역자들을 통해 치부하는 수단이 되고만 것이다. 지방의 향교에 정원 외의 학생으로 대부분 군역을 회피할 목적으로 적을 둔 액외교생(額外校生)이 1읍당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1천명이나 되었다 하니, 향교가 얼마만큼 군역 기피자들의 온상 역할을 하였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한편 과거제도가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집안과 지위를 가진 자들의 잔치로 전락해간 것 역시 오늘의 현실과 유사점이 있다. 혈통이 아니라 능력본위로 인재를 구하려는 것은 국왕에게는 언제나 절실한 문제였다. 전통시대의 과거제도는 바로 유교적 이상에 따라 인재를 구해 나라를 다스리려는 이념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상은 늘 혈통과 뼈대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귀족이나 양반세력에 의해 침해되곤 했다.

과거 급제자, 몇몇 씨족에만 집중되다

사진/ 수능시험장 밖의 풍경.(김종수 기자)
우리나라의 지배 엘리트들은 유난히 뼈대를 중시했다. 신라의 골품제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의 지배 엘리트에게 혈통의 상징은 곧 뼈대였다. 지금도 뼈대있는 집안이란 말이 자주 쓰이고, 심지어 멸치가 문어에게 자기네는 뼈대있는 집안이라고 큰소리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이다. 골품제란 바로 뼈대, 즉 출생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인 반면, 과거제는 이 뼈대 대신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한다는 제도이다.

과거제도의 기본적인 전제는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이라는 공개경쟁의 시험절차를 통해 사회계층적 신분이나 출신지역에 상관없이 인재를 구한다는 것이다. 과거제도가 점차 뿌리를 내려가면서 지배 엘리트 내에서도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을 얻는 음서제도보다는 공개적인 경쟁인 과거제를 통해 자신의 교양과 능력을 인정받음으로써 벼슬을 구하는 것을 더 명예롭게 여기는 현상이 생겨났다. 조선시대에도 문음제(門蔭制), 또는 음서제(蔭敍制)가 광범위하게 실시되었지만, 정승이 되기 위해서는 점차 문과의 급제가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지배층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가문에서의 출생이라는 귀속적 요인뿐 아니라, 과거의 급제라는 성취요인 또한 요구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경향은 한편으로는 유교적 이념과 이상주의의 전파에 따라 능력본위의 과거제가 정착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과거제가 천하의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잃고 기존 지배층의 사회진출을 추인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배층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와 문화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과거제에서도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500년을 통해 문과에 합격한 1만5천여명을 분석해보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씨족은 모두 750개로 적지 않은 숫자이다. 그러나 이 중 하위 560개 씨족이 배출한 급제자 수를 합해야 전체의 10% 정도일 뿐, 상위 36개 씨족이 전체 급제자의 50%를 점할 정도로 과거 급제자는 몇몇 개의 특정 씨족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수를 본관별로 보면 왕실의 후예인 전주 이씨가 873명인 것을 비롯해 안동 권씨 359명, 파평 윤씨 332명, 남양 홍씨 329명, 안동 김씨 315명, 청주 한씨 287명, 광산 김씨 265명, 밀양 박씨 261명, 연안 이씨 250명, 여흥 민씨 244명, 진주 강씨 221명, 반남 박씨 215명, 경주 김씨 202명, 동래 정씨 198명 등 200명 이상의 대규모 급제자를 낸 씨족이 적지 않다. 그러나 중국 명·청시대를 보면 우리나라의 대과에 해당하는 진사(進士) 급제자 5만1695명 중 4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씨족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반면 조선의 경우 씨족 전체가 아니라 한 개인의 후손에서 문과 급제자가 50명 이상 배출된 경우도 드물지 않다.

왜 임시과거가 정규과거보다 더 많았나

사진/ 창경궁에서 재현된 과거시험. 조선시대 과거제가 본래 취지와 달리 가진 자들의 잔치로 전락해간 것은 오늘의 현실과 유사성이 있다.(이정용 기자)
과거시험이 갈수록 서울의 특권층에 유리하게 운영되었던 또다른 증거는 정규과거보다 임시특설의 과거가 오히려 더 자주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진사과나 조선의 문과는 모두 3년마다 한 차례씩 시험을 치르는 식년시(式年試)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 정기시험인 식년시 이외의 특설과가 거의 시행되지 않았던 반면, 조선의 경우는 500년간 식년시가 163회 시행된 반면,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 등 각종 명목으로 비정기적으로 치러진 문과는 모두 581회나 되었다. 이는 정규시험인 식년시가 전체 과거의 22%인 반면, 비정규적으로 실시된 과거가 78%였고, 급제자 수로 보면 정기 과거가 41%, 비정기 과거가 59%의 합격자를 배출한 것이 된다. 비정기적인 과거가 자주 시행되었다 함은 지방의 선비들에게는 극히 불리한 것이었다. 이들 임시 과거들은 지역별 향시(鄕試)를 치르지 않고 처음부터 서울에서 1차와 2차, 또는 1차만의 시험으로 급제자를 가렸기 때문에 시골 선비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기회 자체가 충분히 부여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과 달리 조선의 과거시험이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특권 지배층에게 후광을 더해주는 역할로 전락한 이유는 조선의 왕권이 중국 천자의 권한만큼 강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요(遼), 금(金), 원(元), 청(淸) 등 북방으로부터의 정복왕조가 들어서면서 기존의 특권 귀족층이 뿌리부터 잘려나가는 숙청을 당했다. 그런 반면 우리의 경우는 후기 신라 이래의 귀족 엘리트들이 나말여초, 여말선초의 전환기를 거치면서 살아남아 세를 유지하였다. 이들 엘리트 집단은 조선시대에 유교이념이 전면화되면서 유교적 이념에 기초한 과거제를 적극 수용하여 과거 골품제 시기의 귀족들과는 달리 귀족적 성격과 관료적 성격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양반층의 특권을 강화하여간 것이다. 조선의 왕권은 양반 사족층의 귀족화 경향을 억제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고, 따라서 천하의 인재를 공평히 구한다는 명분하에 권문세가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에서 중요한 기능을 했던 과거제는 조선에서는 오히려 양반들의 귀족화를 추인하는 장치가 되고만 것이다.

해방 이후 교육은 우리 사회에서 인격연마의 장이기 이전에 사회적 계층 이동의 통로였다. 특히 8·15 이후 교육열이 폭발하면서, 부모들은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자식들을 교육시키려고 했다. 이런 교육수요에 따라 학생 수 및 학교 수 역시 급증했다. 1945∼60년 기간 중·고등학생 수는 10배 이상, 대학생 수는 13배 증가했는데, 이같은 급성장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1961년 당시 총인구대비 대학생 수는 프랑스에는 뒤지지만 영국을 앞설 정도였으니, 당시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은 최후진국이나 교육의 규모만큼은 선진국 수준에 육박했던 것이다.

한국사회 교육열의 뒷면

지난 수십년간 한번도 식은 적이 없는 교육열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전혀 일리없는 이야기라 할 수는 없지만, 이 교육열의 뒷면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교육이 계층상승의 주된 통로였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같은 형제자매 내에서도 딸들은 오빠이든, 동생이든 큰아들을 위해 희생되어 식모로, 차장으로, 공순이로 돈벌러 가야 했던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교육이 마치 자신의 장래를 해결해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인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교육열이 교육을 받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구 때문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영국의 사회사학자인 도어(Dore)에 따르면 후발국일수록, 근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교육열이 뜨거우며, 부족한 인적 자원의 충원을 위해 학교교육의 중요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도어의 연구는 일본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우리 사회의 교육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 한국에서의 대학입시는 학생선발 기능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단지 극단적인 학벌주의 아래서 한 차례 시험으로 결정되는 운명이 평생을 신분처럼 따라다니게 된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입시제도는 능력본위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개개인들이 같은 기간 연마한 실력을 똑같은 문제를 풀어 시험받고, 그 결과에 따라 상이한 대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한다. 즉 이 제도는 “모든 사람에게 불평등해질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신화에 기초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있다. 또 입시제도만큼 우리 사회의 기성질서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제도도 없을 것이다. 이북 공산집단의 남침위협이 국민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지만 실제 사람들에게 더 규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입시제도다. 어찌 한 가정이 생활패턴을 바꾸어 모든 생활을 고3 위주로 하게끔 할 수 있으며, 멀쩡한 사모님을 파출부로 내몰며, 10년 뒤의 과외비 충당을 위해 유치원 때부터 적금을 들게 만들 수 있을까? 미국의 경우는 기성제도의 유지에 크게 기여하는 방법의 하나가 좋은 차와 집을 미리 주고, 이를 갚게 하는 할부금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할부금의 노예가 되어 딴 생각 못하고 이를 갚아나가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 같은 풍부한 물질적 바탕을 갖고서 사람들을 포섭할 수 없었던 우리 사회에서 입학시험은 일반인들을 기존 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장치였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과외열풍으로 대표되는 교육열은 피지배계급이 지배체제를 수용하고 나름대로 생존전략을 모색하는 적응방식이기도 하다.

교육열이 한국사회의 보수화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대학시험이 썩어빠진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공정성이 유지되어왔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의 입시문제 누출이나 부정입학으로 얼룩지기는 했으나, 입시, 또는 고시는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가장 공정성이 유지된 부분임에 틀림없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팔자가 필 수 있다는 신화, 바로 그 신화가 이 불합리한 교육열을 지탱해온 비결의 하나였다.

시골에서 좋은 대학 가는 건 어려워지고…

사진/ 54년 3월 연희대 입시장 모습. 해방 직후 교육열이 폭발하면서 45~60년간 대학생 수는 13배 이상 증가했다.(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신화는 위협받고 있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과외를 받아야 하고, 과외를 받으려면 엄청난 돈이 든다. 입시제도는 능력본위주의라는 신화에 기초하여 출발했지만, 여기서 능력이란 개인의 학습능력만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적 능력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개천은 오염이 심해서인지 미꾸라지도 살기 힘들어져버렸다. 이제 시골에서, 가난한 집에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과거 80년대에 명문대학에서 민중지향적 학생운동이 성행한 것도 실제로 학생들 중 상당수가 바로 기층 민중 출신들이었고, 이들이 학내문화를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즈음 명문대학에서 가난한 집 출신들을 보는 것은 20년 전에 비해 쉬운 일이 아니다.

지배층이 아무리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려 해도 신분제 사회에서 능력있는 사람들이 어찌 지배층에서만 나올 수 있을까? 조선시대에도 후기로 갈수록 중인층이나 서얼들의 성장이 눈부셨다. 한 사회가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배제할 때, 그 사람들은 한을 품고 그 사회에 대해 등을 돌리게 된다. 조선이 망해갈 때 많은 사람들이 나라가 망함을 슬퍼했지만, 자신들을 억압해온 낡은 인습과 사회제도가 무너지는 것을 환영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개화파와 독립협회를 거쳐 친일의 길로 나간 재주있는 사람들이 유달리 많은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계층 이동의 주요한 통로였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대학입시의 결과는 교육의 계층 이동의 기능이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막히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21세기의 한국사회는 교육을 대신하여 어떤 통로를 준비할 것인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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