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가 생각났다. 까무잡잡한 피부, 양쪽 뺨에 깊게 팬 볼우물, 서글서글한 눈매. 그는 거친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1시간 가까이 속사포처럼 억울한 사연을 쏟아냈다. 믿었던 하청업체 사장은 임금을 떼먹고 줄행랑쳤고, 체불임금 받아내겠다고 집단행동을 벌였더니 다른 하청업체로 고용 승계도 안 됐다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5살 딸 두고 떠난 아빠
사실 한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5월 말, 경상남도 거제에서의 짧은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시끄러운 때에 부당하게 해고된 비정규직, 임금 체불된 노동자의 사연은 차고 넘쳤으므로.
7월 초,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접하곤 괜스레 가슴이 싸했다. 혹시나 했는데 ‘사고 소식’ 유인물 속에 그가 있었다. 까무스름한 흑백사진 속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혹시 내 기사 탓이었을까, 내가 기사만 쓰고 잊고 있었던 탓일까, 죄책감이 밀려왔다.
처음으로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봤다. 숨지기 일주일 전 바꿔놓은 사진에는 그를 쏙 빼닮은 딸이 웃고 있었다. 다섯 살 딸아이의 엄마인 나는, 다섯 살 딸아이의 아빠가 흘렸을 눈물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를 세상에 홀로 남겨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억울함, 슬픔, 분노의 크기는 얼마큼일까. 그날 이후 그의 얼굴은 점점 더 또렷해지다가, 내 마음속 어딘가에 까만 점처럼 박혔다.
9월의 어느 날 새벽, 그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가 생각났다. “내 동네랑 넘의 동네에서 자는 건 다르데예.” “비싼 땅에 와서 자니까 잠이 허벌나게 잘 와부러.” 사투리가 새벽 찬 공기를 갈랐다. 그들도 그처럼 거제에서 일하는, 억울한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다.
삼성중공업 하청업체 ㅊ사가 7월 말 폐업하면서 노동자 260여 명은 임금과 퇴직금 27억원을 떼일 처지에 놓였다. 특히 퇴직연금 계좌가 깡통이 된 탓에 적게는 1천만원부터 많게는 5천만원까지 저마다 뭉칫돈이 물렸다. ㅊ기업 사장은 원청이 기성금을 깎은 탓에 경영이 어려워졌다며 삼성중공업을 탓하고, 삼성중공업은 하청업체 경영 부실은 원청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며 모르쇠다. 여기저기에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들은 8월17일부터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정문 앞에서 노숙농성 중이다. 급기야 9월4일에는 서울 한남동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집 앞까지 달려왔다.
“거리로 안 나올 수가 없어요. 노후자금으로 쓸 퇴직금이었는데, 노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컴컴해요.” 남편은 거제조선소 정문 앞 거리에서, 아내는 이재용 부회장 집 앞 거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남편은 정년을 불과 2년 앞둔 만 58살. 취업 준비 중인 아들 뒷바라지도 해야 하니, 부부는 함께 싸울 수밖에 없다. 1박2일 상경 농성에 따라온 아내들은 음식을 바리바리 챙겼다. 휴게소에서 먹을 점심은 미역국, 저녁은 시래깃국, 다음날 아침은 김치를 송송 썰어 넣은 라면. “목청 돋우려면 잘 먹어야 하니까.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니까.”
한가위에도 그들은 거리에서 밥을 먹는다. 고향에 가는 대신 농성장에서 합동차례를 지내기로 했다. 올해 들어 소리 없이 잘려나간 조선소 하청노동자 수는 수천 명에 이른다. 지난 9월6일 100개 시민사회단체가 뭉쳐 ‘조선하청노동자 대량해고 저지 시민대책위원회’를 꾸렸다. 특정 업종, 그것도 하청노동자만을 위해 시민단체들이 뭉친 건 처음이다.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
명절 밥상을 앞에 두고, 문득 거리에 있을 그들이 다시 생각날 것 같다. 동생의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겠다며 23일간 곡기를 끊었던 유성기업 노동자 고 한광호씨의 형, 설을 앞두고 해고되어 겨울, 봄, 여름 그리고 다시 가을이 오기까지 거리농성을 벌이다가 단식 중인 티브로드 하청업체 해고 노동자들, “인간 대접을 받고 싶다”며 삭발·단식 농성 중인 김포공항의 청소노동자 어머니도.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