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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만화, 상실감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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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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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가 연주하는 현실과 판타지의 변주곡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1월11일 개봉)가 3년 작업 끝에 완성됐다. 그동안 <마리이야기>는 버거워보일 정도로 많은 기대를 받아왔다. 지난 99년 <덤불 속의 재>라는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경쟁부문에 진출했다는 경력이 보태졌기도 하지만, 그 눈길의 상당부분은 이성강 감독에게 쏠렸다.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에다 허세가 아닌 작가의식은 <마리이야기>가 침체를 넘어 암울해보이기까지 하는 국내의 창작 애니메이션에 어떤 마침표를 찍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3D의 3차원 이미지를 2D로 재손질해 회화적 느낌을 얹어주는 컴퓨터 작업 방식이나, 한적한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바닷가 소년 남우와 신비의 소녀 마리의 만남을 그리는 판타지 러브스토리라는 내용도 화젯거리였다.

우정으로 치유돼 가는 소년의 상처

완벽한 충족이 가능한 종류의 기대감이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염두에 둔다면 <마리이야기>는 국내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좌표가 되기에 충분해보인다. 일단, 경박하게 요란스럽지 않은 이런 ‘만화영화’가 예전에 있었을까 싶다. 기술과 정성이 함께 묻어나는 은은한 그림체는 어느 순간 지독한 사실주의를 고집한다. 밝게 갠 하늘이건 폭풍우 치는 어둠 속이건 어촌 풍경은 실사 카메라와 경쟁하듯 실감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무엇보다 모더니즘 영화를 보는 듯한 일상에 대한 차분한 묘사나 실제 배우들에게 연기를 시킨 듯한 사실적인 인물들이 예전의 ‘만화영화’에는 없었다. 물론 잊을 만하면 판타지가 끼어든다. 소년 남우가 집에서, 등대에서, 마당에서 꿈꾸듯 빠져드는 묘한 판타지 장면에선, 제작진의 말을 빌리면, “바닷속의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우주 공간의 신비”가 펼쳐진다.


러브스토리 운운하는 건 일단 틀렸다. 차라리 성장영화라고 해야 옳다. 눈내리는 도시에서 어른 남우가 깊은 상념에 젖어든다. 그는 상실감에 우울했고 그래서 판타지를 만났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소년 남우는 바다가 뺏어간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다 곧 도시로 전학갈 단짝친구 준호 때문에 가슴이 허하다. 허름한 횟집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할머니조차 은근히 멀리하는 남우의 또 하나의 단짝은 집없는 고양이. 남우는 그 고양이와 함께 신비한 소녀 마리를 만나고, 마리와의 ‘우정’은 남우의 친구가 만나야 했을 상처를 비껴가게 해준다.

그런데 수시로 교차하는 사실감과 판타지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선택했을 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보다 균열을 일으킨다. 감동의 연쇄반응에 걸림돌이 되는 균열. 이건, 거대하고 푹신푹신한 개와 하늘을 나는 물고기새가 등장하는 판타지 장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가 자꾸 떠오르는 것과 연관돼보인다. 정교한 사실감이 어딘가 빈약한 판타지의 약점을 자꾸 긁어댄다고 할까.

‘결정타’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한국 만화영화’가 상실감과 상처에 대한 기억을 들춰낸 적은 없었다. 게다가 닿지 못하고 자꾸 밀려나고 어긋나는 사랑에 대한 추억도. 현실이 주는 막막한 느낌과 판타지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붙잡으려는 <마리이야기>는 디즈니와 재패니메이션을 어설프게 흉내내지 않는 토종 애니메이션임에 틀림없다.

기타리스트 이병우씨가 맡은 음악과 가수 성시경·유희열씨가 부르는 노래가 아름답게 깔리고, 이병헌·안성기·배종옥·장항선·나문희씨가 목소리 연기에 나섰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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