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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 병원에 가면 웃다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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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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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Q의 기가 막힌 병원놀이…만화가 신정원의 엽기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다

“경고! 비위가 약하신 분이나 식전에는 구독을 삼가하여 주십시오.”

만화 <닥터Q의 신나는 병원놀이>(세주문화 펴냄, 전 3권, 4천원)의 1권 뒷표지에 적힌 말이다. 첫 번째 이야기 ‘엄살씨, 안과에 가다’를 펴보자마자 이게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눈꺼풀에 종기가 난 엄살씨가 닥터Q를 찾아간다. 닥터Q는 고름이 꽉 차 있다며 수술을 권한다. 그런데 “고름을 빼는 수술은 대단히 위험해서 수술을 하는 저나 간호사까지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라고 겁을 주더니 곧바로 수술을 시작한다. 날카로운 송곳으로 사정없이 눈꺼풀을 찌르자 고름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한다. 방으로 넘쳐나던 고름을 창 밖으로 내보낸 뒤 수술 부위에 대한 봉합을 간단하게 해치운다. 호치키스(스테이플러)로 철컥! 닥터Q의 마지막 주의사항은 명쾌하다. “이제 새살이 나오면서 심이 저절로 튕겨나올 겁니다. 호치키스심이 튕겨나오기 전까진 절대 세수를 하시면 안 됩니다. 심이 녹슬면 평생 안 빠질 수도 있거든요.” 치료비는 300만원이다.

권위, 사디즘과 마조히즘


닥터Q의 의술은 갈수록 ‘가관’이다. 내시경 검사를 한다더니 일반 카메라를 입 속으로 태연히 집어넣고, 과도한 위세척으로 환자가 기절하자 뜨겁게 달군 두개의 다리미를 심장 부위에 대고 전기 충격기처럼 사용한다. 또 헛배가 부른 남자 엄살씨에게 임신했다며 대변을 받아낸 뒤 “사랑스런 공주님이네요”라고 우기는 대목에 이르면 그 엽기성은 절정에 이른다.

‘놀라운 광경’은 이 만화 밖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12월27일 문화관광부는 2001년 하반기 ‘오늘의 우리만화’로 4종의 작품을 뽑아 시상했다. 엽기성으로 똘똘 뭉친 <닥터Q…>도 그 속에 들어간 것이다. “일반 극화에서 보기 어려운 단정한 형상화 능력으로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를 잘 표현한 작품.” 만화평론가, 일간지 만화담당 기자, 교수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이 밝힌 선정 이유다. 문화부는 500만원 상당의 비용을 들여 이 작품을 구입해 공공도서관, 문화의 집 등지에 배포할 예정이다.

발칙한 아이디어를 단정한 그림체에 거침없이 형상화한 점이 닮아서인지 이상스럽게도 포르노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던 양영순씨의 <누들누드>가 떠오른다. 그런데 <닥터Q…>의 작가 신정원(31)씨는 뜻밖에도 여자다. 만화를 보면 그 내용이나 말투에서 당연스레 남자의 펜끝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얌전한 말투에 순해보이는 작가의 표정이 작품과 영 딴판인 점도 어쩐지 <누들누드>의 작가와 비슷하다.

“특이한 걸 구상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더러운 걸 결합시켜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환자 엄살씨는 ‘병을 고쳐줄 것이다, 잘해줄 것이다’라고 기대하고 병원을 찾지만 번번이 당하잖아요. 배신당해도 또 뭔가를 기대하고. 일종의 마조히즘이랄까. 의사는 약간 사디즘적이고. 우리가 사는 풍토가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닥터Q는 의사가 아닐 수도 있는 거죠. 정치인일 수도 있어요. 권위의 상징이죠. 사람들에게 잘해주라고 만들어준 권위인데, 절대로 잘하지는 않는 거.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뭔가를 기대하는데 계속 당하기만 하고.”

장난기를 머금은 듯한 말투로 또박또박 자기 이야기를 이어가는 모양새가 그의 불온한 작품과 묘하게 어울렸다. 단행본으로 묶여나온 건 <닥터…>가 처음이지만, 심상치 않은 조짐은 99년 <오즈>에 연재했던 <직장의 꽃>에서 드러난 바 있다. ‘여성을 위한 엽기만화’의 효시라 할 만한 작품인데, 이런 식이다.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얌전해보이는 여자를 성추행한다. 지분거리던 그 남자, 전철에서 내리고 나서 자신의 왼손이 잘려나갔음을 발견한다. 여자는 차분한 표정으로 남자의 손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역을 나선다. 또 이런 작품도 있다. 회사 회식자리에서 부장이 여자직원들을 희롱하자 여자들이 은근슬쩍 술을 많이 먹인다. 만취한 이 남자를 놓고 여자들만의 파티가 벌어진다. 부장을 구어서 나눠먹는….

만화처럼 신씨는 “상상력을 자극시켜주는” 공포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평범한 멜로는 당연히 싫다. 잠시 그의 작품으로 돌아가보자. 다시는 병원에 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꼬박꼬박 병원을 찾는 엄살씨와 함께 등장하는 중요한 조연이 야한 옷차림의 양 간호사다. 닥터Q와 엄살씨가 모두 제정신이 아니지만 양 간호사만은 말짱한 정신인데 그의 숨겨진 이력이 독특하다. 전설 같은 악명을 떨치던 폭력조직 양간이파의 두목 출신이다. 이런 그가 미친 의사 밑에서 일하는 이유가 ‘양 간호사 이야기’편에 부록처럼 담겨 있다. 거기에는 양 간호사가 학창 시절부터 가졌던 오랜 꿈과 그 좌절, 그리고 절망이 코믹하게 그려져 있는데, 어찌어찌하다 만화가가 된 신씨의 이력을 듣다보니 공연히 양 간호사가 떠올랐다.

정리해고 뒤 만화의 길로

“대학 졸업 뒤 광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IMF을 맞아 정리해고됐어요. 이래저래 회사라는 구조에 실망을 많이 했죠. 아이디어가 많아도 광고주의 요구에다 윗사람 때문에 자꾸 사장당하는 경험도 컸고. 점심시간이 정해져 배가 안 고파도 그때 먹어야 하고, 배가 고파도 그때까지 참아야 하고. 그래서 돈이 적게 들고 내 맘대로 마구 할 수 있는 걸 찾다 만화를 생각하게 됐죠.”

고등학교 때 만화동호회를 했고, 대학에서 그림공부를 했기에 비교적 쉽게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 한두권 나오다가 툭하면 끝을 맺지 못하던 일본 해적판 만화를 보면서 혼자서 뒷부분을 상상해보던 버릇은 이야기 구성에 도움이 됐다. 만화는 제정신이 아닐지 몰라도 정작 작가 자신은 제정신이 아닌 걸 무척 싫어한다.

“술을 안 먹는데, 힘들 때 술 먹고 해결하려는 거 굉장히 싫어해요. 늘 제정신으로 세상을 보고 싶거든요. 대학생활 초기에 고연전(그는 고려대 미술교육과 출신이다) 경기를 보러 갔을 때였어요. 화장실 갔다가 경기장에 들어서는데 그 안에서 열광하는 수천명의 사람이 모두 제정신이 아니더라고요. 약간 환각상태에 빠진 것처럼. 그뒤로 다시는 안 갔어요.”

엽기만화를 그리다보면 가장 먼저 자기검열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더럽거나 잔인한 거 그릴 때는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다만 야한 거 그릴 때 조금 걸리더라고요. 비뇨기과를 그리고 싶었는데 성기가 나와야 되잖아요. 성기 가지고 노는 장면이 나와야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좀 곤란하잖아요.”

그가 가장 많이 되풀이한 단어는 ‘실망’이었다. 예컨대, 실망 끝에 아예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게 된 정치가 그렇다. 이런 성향이 다음 작품에 고스란히 담길 것 같다. 2월에 새로 나오는 잡지 <학산>에 연재할 <2029 니플하임>이란 작품은 코믹이 전혀 없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과학문명이 발달한 사회가 아니라 멸망이 한번 지나간 듯한 분위기로 정신적 붕괴상태에 빠진 미래다.

“‘니플하임’은 독일계 신화에서 지옥이란 뜻으로 나와요. 2029년을 신이 인간을 버렸다는 느낌으로 그리려고요. 어둠의 힘이 커서 죽은 자가 산 자 사이에 섞여 다니고. 무겁고 침울하지만 좀 오래 이어가고 싶은 작품이에요.”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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