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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T-브러더스의 ‘첨단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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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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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기본계획에 드러난 발전지상주의… 백화점식 중점 과제로 현실성 의심받아

사진/ 첨단과학 위주의 과학기술 기본계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기본계획은 우주공학(맨위), 생명공학(가운데), 나노기술(맨아래)등 6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최근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이하 국과위)에서 내년부터 5년 동안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의 기본방향을 담은 ‘과학기술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정부는 지난 1년 동안 산학연 전문가와 정부관계자 140명을 망라한 10대 부문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청회를 거쳐서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이번 계획도 신기술 개발과 접목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경제주의적 접근의 기본방향은 마찬가지이지만, 과거와 달리 주목할 만한 부분은 ‘과학기술개발 역량의 강화’ 항목으로 설정한 7개 부문 중에서 ‘부문 4, 국민과 함께하는 과학기술문화 형성’이다.

생명윤리 입법은 진일보한 조치

특히 최근 인간배아복제 문제를 통해 불거진 윤리 문제를 기본계획에 포함해서 ‘과학기술자의 책임성 제고를 위한 과학기술자 윤리헌장을 제정’하기로 한 계획과 ‘생명윤리 관련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명문화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학기술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윤리선언을 하지 못하고 정부가 촉구를 하고 나서는 현 상황이 안타깝지만, 생명공학 분야를 포함한 모든 과학 분야에서 윤리 문제가 중요한 주제로 인식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윤리 불모지대로 통하는 우리의 과학계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생명윤리 관련 입법은 올해 5월에 과학기술부 산하의 생명윤리자문위원회에서 골격을 잡은 생명윤리기본법(가칭)이 내년 정기국회에 상정될 예정이어서 시기적절한 조항으로 판단된다. 물론 앞으로도 법안 내용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벌어지겠지만, 과학기술의 올바른 발전을 위한 최초의 법률적 규율이 이루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큰 진전이 될 수 있다.


그 밖에도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참여의 중요한 제도로 유럽과 일부 선진국에서 실행되고 있는 ‘사이언스숍’(science shop)이 ‘과학지원센터’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었다. 사이언스숍은 한 지역의 대학에 설치해서 주민들이 요구하는 주제를 연구하는 제도로 단순히 지역주민에게 기술을 지원하는 차원을 넘어 과학자들 자신도 무엇이 중요한 연구주제인가를 배워서 과학활동 자체를 사용자-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활동이다. 따라서 과학지원센터라는 명칭은 마치 과학자들이 일방적으로 주민들에게 기술을 베푸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여하튼 국과위가 이번 기본계획에 그동안 시민운동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주장했던 윤리, 입법, 시민참여 등을 부분적이나마 받아들인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기본계획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중점 추진과제’는 여전히 첨단기술개발을 우선으로 한 발전지상주의로 흐르고 있어서 앞에서 언급한 “국민과 함께하는 과학기술문화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질지 우려스럽다. 목표는 2006년까지 과학기술 경쟁력을 현재 21위에서 10위로, 국가경쟁력을 28위에서 15위로, 세계 일류상품을 현재 76개에서 500개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다. 중점 추진과제는 향후 5년간 35조원을 투자해서 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 우주항공기술(ST), 환경기술(ET), 문화기술(CT)의 6개 분야 77개 핵심기술을 집중개발대상 미래유망기술로 선정한다는 것이다.

우선 항간에 T-브러더스라는 별명까지 얻은 6개 분야가 어떻게 선정된 것인지 의문스럽다. 아마도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일부 선진국들의 과학정책에서 채택된 핵심기술이 거의 그대로 채택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올 초에 수립된 일본의 ‘과학기술기본계획’(2001∼2005)은 생명과학, 정보통신, 환경, 나노기술의 4가지를 중점 연구개발 분야로, 영국은 미래우선순위 연구과제로 나노기술, 휴대무선통신, 생체재료, 지속가능 에너지를, 그리고 독일은 바이오, 분자의학, 보건의학, 정보기술 등을 꼽았다(과기부, ‘주요 선진국 과학기술정책 동향’, 2001). 영국과 독일이 나름대로 특성화 개발을 선택한 반면 우리는 가장 많은 분야를 골고루 망라한 셈이다.

균형있는 과학발전의 전망을 세우라

말이 집중개발이지 6개 분야의 77개 기술을 미래유망기술로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것이 정말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인지 자못 의심스럽다. 나노기술은 드렉슬러의 <나노 테크노피아>라는 공상소설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뒤 유명해졌지만 아직까지 현실 적용성의 측면에서 거리가 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고, 항공기술이라면 모를까 우주항공기술 10위권 진입이 현재 상황에서 가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환경기술과 문화기술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환경기술의 개발 목표는 “국민 삶의 질 향상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핵심기술 확보”인데 최근 연일 보도되는 심각한 대기와 하천오염이 과연 신기술이 없어서 벌어지는 일인가? 정말 삶의 질을 향상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신기술 개발보다는 현재 있는 기술이라도 제대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문화기술은 세부항목인 디지털 콘텐츠 개발과 문화재 복원기술이 굳이 문화기술이라 불릴 내용이 아닌데 도대체 무슨 뜻으로 만든 조어(造語)인지 국과위에 묻고 싶다.

국과위와 과기부는 그동안 정부가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거품을 일으켜 벤처기업을 과잉양산하고, 연구에 몰두해야 할 중진 교수들이 줄줄이 실험실에서 사장실로 향하게 만든 최근 사태를 유념해야 할 것이다. 요즈음 터지는 굵직한 ‘게이트’들에 한결같이 첨단기술 벤처기업이 끼어드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기현상이 과학정책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번 기본계획의 실질적인 중심주제인 ‘첨단기술 지상주의’와 ‘단기간 발전 신화’는 생명공학기술보다 더욱 심각한 거품들을 양산할 위험이 크다. 이미 일부 분야에서는 연구실에 있어야 할 교수들이 유명세를 타면서 이리저리 강연회와 정부 위원회에 불려다니고 있다.

기본계획은 국가혁신체제(NIS)와 같은 멋진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려면 기초연구와 그 사회의 사회문화적 배경, 그리고 시민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시스템이 없는 첨단기술 지향주의는 거품을 낳고, 단기간에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무리하게 뿌려지는 거액의 자금은 연구자들을 주식시장으로 내몰고, 눈먼 돈을 노리는 정치꾼과 협잡꾼들이 또다른 ‘첨단기술 게이트’들을 줄줄이 엮어낼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다음해 수능과 논술에 반드시 나올 IT, BT, NT, ST, ET, CT를 외우느라 진땀을 뺄 것이다. 국민의 ‘삶의 질’이나 ‘윤리’는 계획을 장식하는 치장물이 아니다. 균형있는 과학발전이야말로 가장 빠른 발전이며, 부작용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발전이다.

김동광/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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