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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는 윤이상의 대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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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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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남북한 문화교류의 명맥 이어가는 재일교포 2세 음악인 이철우씨

사진/ 작곡가 고 윤이상씨를 만나면서 이씨는 윤씨의 작품 소개와 남북음악교류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이정용 기자)
2000년에는 유난히 뜨거웠고, 2001년에는 유난히 썰렁했다. 2000년에는 모두가 ‘전주곡’이 시작됐다고 흥분했지만 2001년에는 모두가 ‘깜짝 이벤트’였다고 냉소했다. 무엇일까? 남북한 문화교류다. 90년대 초반부터 남북 예술인들의 상호방문이 간헐적으로 이뤄졌지만 ‘활발’이라는 수사를 붙이기 무색하게 문화교류는 ‘전주곡’만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이건 한반도 테두리 안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가까운 일본 땅에서 십여년 전부터 남북한 문화교류가 점선이 아닌 실선으로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88년부터 10회에 걸쳐 진행된 한겨레음악회. 남과 북의 음악인, 총련과 민단의 예술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무대였다. 황병기, 안숙선 등 한국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는 음악인들이 이 무대에서 공연했다.

조선적, 마침내 한국땅 밟다

남북이 긴장과 화해 무드를 반복해온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진행된 이 음악회를 만든 사람은 재일동포 2세 음악인 이철우(63)씨다. 그가 지난해 12월18일 서울에 왔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북한 음악 무용의 현황과 남북예술교류’라는 제목의 세미나 강연자로 그를 초청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남한 음악인들을 10년 넘게 초청해온 그가 한국 땅을 밟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도 대여섯번 남한에서 초청을 받았는데 국적문제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지요. 이번에도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출국 예정일 사흘 전에 여권이 나오더군요.”


그의 국적은 조선적. 정확히 말하면 그는 무국적자다. 해방 이후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지워준 외국인 신분의 조선적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귀화하거나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과 일본은 수교를 맺지 않은 상태라서 조선적 재일동포들은 여권을 취득하기 힘들어 외국에 나가기 어렵다. “몇십년 동안 그리워하던 땅을 밟는다는 생각에 사흘 동안 잠을 설치고 서울 땅에 도착했는데 공항에서 너무 쉽게 통과하니까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더군요.”

고베에서 태어난 그는 총련계 민족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아버지가 고물상을 하는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동네에서 유일하게 피아노가 있던 집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음악과 가까워졌고 대학에서는 작곡을 전공했다. 집에 있던 피아노 한대는 이씨 집안을 유명한 음악가 집안으로 만들었다. 형은 일본에서 가수로, 동생은 북한에서 작곡가로 이름을 알렸고, 일본에서 최고의 지휘자로 인정받는 김홍재씨는 그의 외조카이다.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씨는 일본의 대표적인 음악상인 사이토 히데오상과 와타나베 아키오상을 함께 수상한 유일한 지휘자다. 김씨의 대학 시절부터 함께 살면서 지휘자로의 진로를 권유한 이철우씨는 지금까지 김홍재씨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주로 무대에서 활동한 다른 식구들과 달리 그는 지난 70년부터 20년 동안 재일조선중앙예술단 문예부장으로 재직하며 북한 음악의 일본 보급에 주력해왔다. 78년에는 공훈예술가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북한의 음악사업을 해오던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작곡가 고 윤이상과의 만남이다. “젊었을 때는 독일에 유학가서 작곡 공부를 해야겠다는 꿈도 있었습니다. 라디오를 통해 접한 윤 선생의 음악을 듣고 한 결심이었지요. 그러나 74년 도쿄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의 밤’ 때 선생을 처음으로 직접 뵈면서 그분의 음악을 한국과 아시아지역에 알려야겠다고 마음을 바꿨어요. 80년대 이후 북한의 클래식 음악 수준이 크게 향상된 것도 윤 선생 덕분입니다.”

대중음악 교류에도 앞장

사진/ 1990년 일본을 방문한 윤이상씨와 기차안에서.
윤이상아시아지역대리인을 자처한 이씨의 노력으로 북한에서는 84년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설립됐다. 이곳에는 연구진과 윤이상관현악단 등 170명의 음악인력이 모여 활동하고 있다. 그가 한겨레음악회를 기획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윤이상씨의 무산된 계획을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에서였다. “윤 선생이 일본에 방문했을 때 올림픽이 열리는 88년에 3·8선에서 남북통일음악회를 열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사가 안 된 게 아쉽고 해서, 그렇다면 일본에서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88년 그는 코리아아트센터(K.A.C)라는 기획사를 차려 남북한 음악·무용 교류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K.A.C의 첫 결실인 한겨레음악회는 객석 1700석을 가득 메우는 성공을 거뒀다. 그뒤 해마다 열린 이 행사는 윤이상의 작품과 함께 남북한의 음악을 고르게 소개하는 음악회로 자리잡았다. 도쿄예술극장, 산토리홀 등 일본 최고의 시설과 규모를 가진 무대가 공연 때마다 매진을 기록했다. 그러나 남과 북, 그리고 총련과 민단의 갈등이 늘 불씨처럼 살아 있던 당시 이 음악회를 추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숙선 선생을 초청할 때는 북에 납치하려는 계획이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이미 표는 모두 예매된 상태인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요.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성악가 넬리 리를 초청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초청 연주자가 무대에 도착할 때까지는 늘 노심초사였습니다. 연주곡이나 연주자를 선정할 때도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도록 세심하게 신경써야 했죠.” 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 때 인연을 맺은 황병기씨는 그의 든든한 조력자다. 공연을 준비할 때마다 그는 황씨와 긴 시간 상의하며 프로그램과 출연자를 결정한다. 황씨는 남쪽 음악인 초청이 성사되도록 거들기도 했다.

10년 가까이 쌓아온 공 덕에 남북한 공동음악제를 보는 의심의 눈초리는 옅어졌지만 음악가들로부터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 음악회를 돈벌이나 자신의 이름 알리기에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습니다. 음악회 티켓을 특정 조직에 뭉텅이로 떠넘기기도 하고, 심지어 남북한 정보교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악용해 자신의 이력을 속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는 지난 봄 일본에서 활동하는 가수 김연자씨의 평양공연을 성사시켰다. 클래식 공연 기획에 주력해온 이씨지만 대중음악 교류에 대한 관심이 최근의 것은 아니다. “10여년 전에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을 작곡한 손목인 선생을 만났어요. 그때 작곡가 길옥윤 선생도 만나면서 남북대중가요제를 해보자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예산문제로 미뤄지고 두분이 돌아가시면서 가요제는 무산됐지만 그 과정에서 김연자씨 초청에 대한 논의가 성숙됐지요.” 조선적인 자신이 앞으로 남한을 드나들며 남북문화교류사업을 펼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교류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전문가들이 좀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이씨는 말한다. “단기간의 사업적 이익만 생각하고 추진하면 교류의 안정성을 가지기 힘듭니다. 정부와 민간의 노력이 둘 다 필요하지만 중요한 건 이쪽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서 추진해야 깜짝 이벤트가 아닌 성숙한 문화교류가 가능해집니다.”

고향 땅을 찾지 않은 이유

사진/ 지난해 4월 평양 국제영화센터에서 공연한 김연자씨와 함께 무대에 오른 이철우(맨 오른쪽)씨.
입국한 지 벌써 열흘이 지났지만 남대문 시장 한번 가본 것을 제외하면 변변히 서울구경도 하지 못했다. 만나기 힘들었던 남한 음악인들과의 일정이 빡빡하다. 사실 속내의 이유는 따로 있다. 그리워하면서도 돌아 올 수 없는 13만 재일동포들, 특히 그보다 연배 지긋한 어른들에게 죄송스럽기 때문이다. 어릴 때 부모님이 자주 이야기해 머릿속에 그림이 훤한 고향 땅 대구행도 포기했다.

“조선적 재일동포들의 대부분이 남한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입니다. 공연 때 <아리랑>을 들으면서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분들이지요. 일본 땅에서 평생 서러움을 받아온 이분들에게 남한 정부가 좀더 넓은 아량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숙소 앞을 가로지르는 한강을 바라보는 이철우씨의 얼굴에 “산과 강과 나무가 모두 내 것” 같은 기쁨과 “우리 것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포개졌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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