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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위안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국의 위안부> 둘러싼 ‘박유하 신드롬’이 놓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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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7-20 15:31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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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교수가 7월11일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저서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2013년 8월 출간된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아편을) 군인과 함께 사용한 경우는 오히려 즐기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등 ‘자발적 매춘’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논란이 되어왔다. 결국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그를 형사고소했고 검찰은 명예훼손 혐의로 그를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최근엔 재판 진행 중인 그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지난 7월11일 그는, 자신의 책을 비판한 정영환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푸른역사 펴냄)을 재반박하는 자리를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재반박은 ‘학문적 반박’이라기보다는 ‘모호하고 감정적인’ 답변에 가까웠다. 그의 입에선 ‘오독’ ‘몰이해’ 같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한편에선 박유하 지지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섬세한 논쟁 대신 ‘박유하의 입장 vs 기존 역사학계의 입장’이라는 프레임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프레임은 합당한가, 아니면 단지 박유하 교수의 ‘피해자 코스프레’로 만들어진 신기루에 불과한가.

비판서와 지지자 모임 모두 등장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연구 결과는 비판받아야 한다. 학자는 실증 가능한 자료와 설득 가능한 논리를 바탕으로 연구 성과를 발표한다. 논문이건 단행본이건 출간되는 순간, 학문적 검토와 비판을 감당해야 한다. 반박이 있을 경우 연구자는 학문적 성과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 그만이다. 새로운 논문을 쓸 수도 있고 새로운 책을 쓸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모든 학문은 성장하며 과정이 누적되면 특정 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일본군 군대 위안부’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했다. <제국의 위안부>는 결코 읽기 어려운 책이 아니다. 체계적이며 종합적인 학술서적이라기보다는 누구나 읽기 편한 비평서에 가깝다. 담담하고 간명하게 자신의 주장을 써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기존 통념, 기존 연구 결과와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논란이 된 것이다.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제국주의’ 때문임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의 책임’보다 ‘제국주의의 일반적인 문제’로 규정한다. 박유하는 위안부의 일상이 우리의 통념과 전혀 다름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일본 정부나 군부에 대한 비판보다는 ‘민간업자’의 문제를 지적하며 통상 생각하는 10대 중반 여성이 아닌 ‘20대 여성’이 위안부의 대부분이었다고 서술한다. ‘위안부’와 ‘일본군’인들 사이가 좋았으며 연애하는 등 상당한 유착관계를 보였다고도 서술한다.

하지만 학계의 반응은 상당히 미온적이었다. 적극적으로 학문적 논의를 하기엔 그의 주장에 애매모호한 구석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제국의 위안부>는 같은 자료를 여러 차례 반복해 인용하고 기존 연구 결과에 대한 비판 또는 재해석이 없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연구서라고 보기 어렵다. 책의 내용 상당 부분은 이미 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특별한 관심을 받을 이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역사학계는 대중적인 관심·분노·질타에 뒤늦게 끌려가며 몇몇 학술지를 통해 책 서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수준에서 사태 대응에 나설 뿐이었다.


<제국의  위안부>  논란  일지

2013년 8월  <제국의 위안부> 출간

2015년 2월  법원, <제국의 위안부> 판매금지 가처분 일부 인용(34곳 서술 문제 인정)

2015년 6월  <제국의 위안부> 34곳 삭제판 출간

2015년 11월  검찰, 위안부 피해자 명예훼손 혐의로 저자 박유하 교수 불구속 기소(형사재판 진행 중)

2016년 1월  법원, ‘박유하 교수, 위안부 피해자 9명에게 1천만원씩 배상하라’ 판결

2016년 7월  재일 역사학자 정영환 교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출간

학계에서는 너무나 진부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첫 위안부 피해 증언은 일본의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에게 큰 충격을 준다. 그리고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 방위성 문서를 뒤져 ‘일본 정부의 조직적 개입’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찾아낸다. 1931년 상하이사변 당시 일본 해군이 위안소를 설치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조직적으로 위안부가 동원됐음을 입증했다.

러일전쟁, 시베리아 출병 등 대규모 일본군 동원이 이루어진 현장에선 언제나 성병이 문제로 등장했다. 병사의 인권이나 휴가제도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일본은 군인의 스트레스를 ‘억눌린 성욕’ 차원의 문제로 인식했고, 성병을 막기 위해 성병 보균자가 아닌 여성, 즉 일반 여성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계획에 착수한다.

위안부 동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육군성 부관통첩, 1938년 3월4일)은 당시 우메즈 일본 육군 차관이 결재했다. 위안소 설치 관련 문서를 통해 이에 관여한 것으로 확인된 오카무라, 오카베 같은 인물들도 모두 군부의 고위 인사였다.

20세기 초반 전세계적으로 공창제는 폐지되는 흐름이었고 일본 현에서도 단계적으로 철폐되던 상황이었다. 연합국은 휴가제도를 적절하게 운영했고 나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강제 동원 수는 일본군이 자행한 위안부 동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었다.

요시미 요시아키는 1990년대 중반에 그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9세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세계의 보편적 구조가 제국주의였다는 것은 ‘정설’이다. 하지만 위안부 강제 동원은 ‘제국주의의 일반적 성격’을 넘어 ‘일본 제국주의’의 특징이었으며, 1938년 이후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구체화된 일본식 조선인 착취, 여성 착취 제도였다. 뒤늦게 쓰인 <제국의 위안부> 초반부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제국주의 일반의 현상’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턱없이 부실한 이유다.

박유하가 끊임없이 강조한 민간업자들의 문제 역시 전혀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에서 정부와 군부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만주사변(1931), 5·15 사건(1932), 2·26 사건(1936) 등을 통해 사실상 군부는 정부를 장악한다. 극우 분위기 일색인 가운데 일본 정부를 이끈 인물들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군인이었다.

설령 일본군과 위안부가 사랑해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2014년 7월 <제국의 위안부> ‘도서출판 등 금지 및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 사건 재판에 참석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일본 정부는 위안부 동원에 대한 조직적인 계획을 수립했고, 민간업자를 동원했고, 여성들을 끌어모았다. 어느 날 군인들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여자들을 끌고 나가는 이미지는 대중에게 각인된 드라마틱한 환상이다. 오히려 강제 동원의 현실은 사기, 위장 취업 등이 대부분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을 받고 아버지의 폭력, 교육에서의 배제 같은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던 수많은 여성들이 걸려든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유명숙의 연구(<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 이학사)나 수많은 위안부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당시 벌어진 징용, 징병 역시 대부분 같은 방식이었다.

박유하가 일본군과 위안부의 유착관계를 다루는 장면 역시 통념상 충격적일 수 있지만, 평면적이다 못해 작위적이다. 군인들이 위안부에게 친절하게 굴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전투에서 지친 몸을 끌고 그나마 허락된 개인적 향락의 시간이니 얼마나 소중한가. 위안부 역시 전혀 낯선 공간에서 끝없이 강요되는 상황을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기만 하며 버틸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위안부 간에 일종의 유착관계가 발생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박유하의 묘사를 훌쩍 넘어선다. 13사단장 우치야마 중장의 보고를 보면, 조선인 위안부를 사랑했지만 ‘니가타에 아내가 있던’ 어느 병사는 억지로 위안부에게 동반자살을 권유한다. 위안부가 거절하자 병사는 권총을 발사해 위안부에게 중상을 입힌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또 다른 위안부의 증언을 보면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군 병사에게 동반자살을 강요당해 옆구리를 찔린다. 콘돔 사용을 요구했다가 발로 걷어차이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하거나 마약을 하면서 고통을 견디는 경우도 많았다.

박유하는 수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 일본군과 위안부의 유착관계를 강조하지만 이는 위안부의 생활세계에서 일어났던 여러 모습 중 하나에 불과하다. 박유하가 위안부의 생활세계를 재구성하려 했다는 점에선 참신하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지만 이를 지극히 단순화했다는 비판에선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일본군과 위안부가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하더라도 강제 동원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동시에 위안부가 일본군과의 유착관계를 통해 일시적인 심리적 만족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위안부가 경험하는 생활세계의 기만적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취업을 목적으로 온 여성들은 오자마자 성폭행을 당하고, 시설사용료 등을 이유로 강제로 빚을 떠안고 제대로 된 월급도 받지 못하며 끝없는 성적 폭력의 굴레에 빠져든다. 박유하 스스로 그토록 강조했듯 민간업자는 폭력과 억압으로 끊임없이 위안부를 통제했다. 일본군이 그런 민간업자와 함께 위안소를 철저히 감시했다는 것 역시 위안부 증언집을 통해 드러났다. 그런 상황에서 위안부가 느꼈을 최소한의 정서적·심리적 만족을 논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울림 없는 연구였을 뿐

박유하가 제시하는 ‘화해’의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재일 역사학자가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같은 책을 내며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 역시 있을 법한 과정이다. 하지만 박유하를 논쟁의 희생자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그는 학문적으로 매도된 적이 없다. 단지 그의 연구가 김학순의 증언이나 요시미 요시아키의 연구만큼 깊은 충격이나 울림을 주지 못했을 뿐이다. 그를 둘러싼 팬덤 역시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박유하 신드롬인가. 여전히 의미 있는 것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일 뿐이다.

심용환 <역사 전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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