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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리’에 대한 섬뜩한 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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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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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한국사회를 해부하는 박노자 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사진/ '우리'의 안과 밖을 가르는 배타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한 지적은 특히나 우리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든다.(한겨레 윤운식 기자)
“자기가 남을 잡아먹고 싶으면서도, 남에게 잡아먹히기를 겁내며… 다들 의심 깊은 눈으로 서로서로 쳐다보면서….” 일찍이 중국의 문호 루쉰이 20세기 초 반봉건과 반식민의 질식상태 아래서 갈가리 찢겨져 있던 중국사회를 향해 던진 준엄한 질타이다. 그런데 <광인일기>의 이 오싹한 일갈이 그대로 21세기 한국사회의 “정확한 초상화”라고 진단한다. 박노자 교수(오슬로대 한국학)가 쓴 <당신들의 대한민국>(박노자 지음, 한겨레신문사 펴냄, 02-710-0569, 8500원)이다.

한국을 지배한 왜곡된 근대성

지은이의 이름 석자는 <한겨레21> 독자들에겐 무척 친숙하고 반갑게 다가갈 것 같다. 격주로 연재되는 ‘박노자의 북유럽 탐험’을 보는 재미로 <한겨레21>을 기다린다는 이들도 적지 않을 정도다. 이번에 나온 책은 역주를 단 책을 빼고는 그의 첫 글모음이되 <한겨레21>에 이미 실렸던 글들은 다행히(?) 많이 빠져 있다. 군대와 불교문제에 관해 쓴 글 등을 빼면, 거의 새로 고쳐쓰다시피한 싱싱한 글들의 묶음이다.


1부 한국사회의 초상, 2부 대학, 한국사회의 축소판, 3부 민족주의인가 국가주의인가, 4부 인종주의와 대한민국 등으로 구획된 12편의 살아 퍼덕거리는 글들에 담긴 시각은, 짐작하듯이 무척 진지하며, 사유의 깊이 또한 그윽하다.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사회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병들을 앓고 있는지,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를 논해보고, 나아가서 치료과정에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으로” 내놓은 책답게 실천적 패기도 물씬 묻어난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한국사회는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되고 만 것일까? 박씨는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왜곡된 근대성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한다. 일본의 군국주의 전통과 직결되는 박정희의 전체주의적 근대화 정책이 남긴 폐해를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통해 분석하기도 하고, 조교에게 설거지를 시키는 교수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와 합리의 전당으로 여겨지는 대학사회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전근대적 ‘미풍양속’의 실체를 발가벗기기도 한다.

‘우리’의 안과 밖을 가르는 배타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한 지적은 특히나 우리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든다. 교수에서 불법노동자로 굴러떨어진 몽골 지식인 바트자갈의 사례를 통해 그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인종적 차별의식의 두 기원을 파고든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인종주의는 단순히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핏줄의식에서가 아니라 ‘국적’과 ‘경제력’ 등의 현실적 우열관계에 대한 또렷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같은 핏줄의 조선족 동포나 비슷한 외모의 몽골인에 대한 차별은 그 단적인 증거다.

동시에 검은 피부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더 지독한 차별은 19세기 후반 흑인을 선천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규정했던 서구 고전적 인종주의자들의 견해가 해방 뒤 친미반공체제의 정착과 함께 내면화돼 지금까지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백인 콤플렉스는 단순히 정치·경제적으로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에 대해 갖게 되는 조선시대 ‘사대주의’류의 ‘모화 콤플렉스’를 넘어서, 유전되는 피부색에 집착하는 현대적 인종주의의 양상을 띠게 된다. 백인 인종주의를 내면화한 비백인, 그것이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속내라는 지적은 참 끔찍한 전언이다.

이방인으로, 한국인으로…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담긴 날카로운 비판이 그가 러시아 출신 ‘이방인’의 관점에 서 있다는 점과 무관할 순 없다. 무릇 비주류의 눈으로 볼 때 내부자에겐 잘 드러나지 않는 상처의 풍경들이 비로소 감지되는 법이다. 그러나 그의 날선 질타가 아프면서도 분하지 않은 까닭은 한국사회가 낡은 초상을 벗고 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로 나아가기를 염원하는 한 한국인의 진정이 거기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보다 중국을 사랑했기에 누구보다 예리한 비판으로 중국 인민들의 치열한 각성을 촉구했던 루쉰의 열정이 그의 글에서도 쉽게 느껴진다. 박씨는 2001년 러시아 국적 대신 한국 국적을 선택했으며, 한국인이 되기까지 그가 겪으며 느낀 소회는 책 서문에 잘 나와 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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