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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신념의 시대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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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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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과 적군파, 다르면서도 같은 인물에 대한 애정을 담은 두권의 책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펴냄, 1만900원)과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지원북클럽 펴냄, 8500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책들이다. <…여운형>은 몽양 여운형의 딸 여연구 북한 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96년 사망)이 쓴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이고, <사과나무 아래서…>는 무장투쟁을 혁명의 수단으로 삼은 일본의 ‘극좌 테러조직’ 적군파의 여전사 시게노부 후사코(56)의 자전적 에세이다. 묘하게도 두권을 잇따라 읽으면 비슷한 느낌의 생각들이 서로 얽히면서 머리 속을 어지럽게 떠돈다. 무엇보다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공간을 거치며 일관된 노선을 지키다 테러로 숨져간 몽양이나 ‘68세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한 운동권 학생이 먼 아랍까지 진출해 자기 주장을 실천에 옮긴 그 한결같은 의지가 어떤 낯설음으로 다가온다. 책 속의 주인공들이 던져주는 생각과 행동에서 ‘맞아, 우리에게 그런 시대가, 그런 투쟁의지가 있던 적이 있지. 비록 대상과 목적은 달랐어도’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거꾸로 지금 시대가 낯설게 느껴지기조차 한다.

세계와의 연대를 다짐하며

사진/ 아랍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메이와 함께 있는 적군파 여전사 시게노부. 그는 딸에게 일본국적을 얻어 주려 딸과의 관계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도 했다.
또 한 가지는 같은 인물에 대해 가해지는 정반대의 평가다. 우익보수으로부터는 ‘빨갱이’, ‘친소분자’로, 일부 좌익으로부터는 ‘우경 기회주의자’, ‘친미주의자’로 공격받아야 했던 몽양이나, 아랍에서는 영웅으로 대접받는 여전사가 조국 일본에서는 철면피 같은 테러리스트로 비난받는 처지는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그리고 이 책들은 가족이 가족을 생각하며 쓴 글이다. <사과나무 아래서…>는 무국적자로 남아 있는 딸 메이(28)에게 일본 국적을 얻어주려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던 딸의 관계를 상세히 밝히는 어머니의 글이고, <…여운형>은 자신을 유독 사랑해주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딸의 글이다. 따뜻하고 끈끈한 정감과 함께 아버지를, 또 자신과 딸을 강하게 옹호하는 날선 결연함이 동시에 깃들어 있다. ‘테러리스트’ 시게노부가 올곧게 살면서 정치적 관점이 분명했던 아버지로부터 어렸을 적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나, 여연구가 아버지 몽양을 기억하는 방식은 놀랍도록 닮았다. 특히 그 시대답지 않게 여성을 하나의 인격으로 대해주던 아버지에 대해 시게노부와 여연구는 공통의 기억과 감동을 갖고 있다.

시게노부는 조그만 가게로 힘겹게 살지만 굽힘없던 지식인 출신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릴 때 또래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한국인 아이들을 못살게 굴자, 상처입은 건 뜻밖에도 아버지였다. 시게노부는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어리석음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해악이 되는지” 거듭 이야기하는 아버지로부터 첫 정치적 가르침을 받는다. 가난한 집 사정으로 일찌감치 대학진학을 접고 간장회사에서 취직한 시게노부는 ‘고졸 여성’이라는 벽에 부딪히고는 야간대학에 진학한다. 60년대 중반 대학에 들어선 시게노부가 미-일 안보반대투쟁 등으로 불붙던 학생운동에 끼어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적군파가 되어 아랍까지 찾아가게 된 이유는 당시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 드러난다. “나는 민족주의자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세계와의 연대를 목표한 국제주의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계를 뛰어넘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세계다, 국제주의다 뭐니 하면서 아버지를 혼돈시키고, 그러다가 반론을 당하고. 그러면서 내심 일본만으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만 굳게 더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26살의 나이에 세계 혁명을 위한 해외 거점으로 삼은 레바논으로 향한다. 이후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 총격(72년),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미대사관 점거(75년), 방글라데시 다카 공항의 일본항공기 납치(77년) 사건 등에 관여하게 된다.

지난해 말 일본에서 체포돼 기소중인 시게노부는 ‘테러조직’ 적군파와, ‘테러리스트’로서 뉴욕 9·11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연합 적군 동지가 혁명투사로서의 자각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다른 12명의 동지를 린치 살인한” 연합적군사건(72년) 때 많은 동지가 충격을 받고 조직을 떠났지만 시게노부는 흔들림이 없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1년째 머물던 시게노부는 “자신은 죽음을 피해가면서 남을 죽인다는 것은 잘못이다. 남을 죽인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상대에게 대신 주는 행위말고는 그 어느 것도 용납될 수 없다. 이 엄연한 진실을 동지들이 외면했다”고 규탄하면서도 “투쟁을 조직화할 필요가 있다”며 벤구리온 공항습격 사건에 임하는 ‘최초의 동기’를 찾는다. 이런 논리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9·11 테러사건에 대해서는 충분히 수긍가는 주장을 편다. “누구의 행위이든 무차별한 폭력은 인간에 대한 범죄행위이며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라며 “이스라엘의 국가정책화된 암살과 폭력, 아랍인과 이슬람교에 대한 편견과 차별, 아무런 제동없는 미국과 이에 영합하는 일본 정부” 등에 문제를 제기한다.

일제시대 몽양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

사진/ 해방 직후 남한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해 좌우연합을 추진한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에 피격돼 쓰러진 지 54년이 흘렀지만 몽양 여운형은 아직도 잊혀진 인물이다. 남한은 그에 대한 온전한 평가와 복권은커녕 독립유공자 인정조차 해주지 않고 있다. 몽양은 ‘좌우합작, 남북연합’을 주장하며 미 군정 주도의 단독정부 수립을 끝내 반대했던 인물이다. 딸 여연구가 해방 이후 이런 몽양의 활동상을 생생히 그리면서 김일성의 ‘위대함’을 부각하는 대신 박헌영을 의도적으로 격하시키는 <…여운형>의 후반부가 껄끄러운 이들조차 이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몽양의 일제 때 처신은 흥미롭게 읽을 구석이 많다. 몽양의 배포 큰 자존심이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 때문이다.

먼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 일장기를 달고 경기에 나가야 할지 망설이는 손기정을 출전하도록 격려한 것도 몽양이었고, 일장기를 지운 사진과 함께 특집기사를 가장 먼저 실은 건 <동아일보>가 아니라 몽양이었다는 게 여연구의 증언이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던 몽양은 <동아일보>보다 1주일쯤 앞서 일장기를 지운 손기정 선수의 우승 사진을 싣도록 했고, <동아일보>는 <조선중앙일보> 사진부에서 문제의 사진 동판을 빌려가 게재했다는 것이다.

또 몽양이 1940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 천황을 독대했다는 증언도 실려 있다. 일본은 중국을 겨냥한 외교 수단의 하나로 몽양을 활용하려 했으나, 몽양은 목숨을 내걸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당당히 담판을 벌였다는 게 통역관으로 따라 들어간 사촌오빠의 증언이다.

이 책을 편집한 신준영 <민족21> 편집장은 “요즘 출판가에서는 체 게바라, 등소평, 트로츠키 등 세계적인 정치가들의 평전이 주목받고 있으나 이들이 하나같이 외국인들이란 점이 못내 아쉬웠다”며 “몽양은 격동의 20세기를 함께 살았던 이들과 비교해볼 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실천가였다”고 머리말에 적고 있다. 이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몽양을 둘러싼 여러 인물과 사건에 대한 증언은 아직 정리되지 못한 해방 전후의 현대사를 풍부히 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일본의 잡지 <통일평론>에 실렸던 여연구씨의 회고록을 옮긴 이 책에는 신 편집장이 몽양의 자녀로는 유일한 생존 인물인 세째딸 여원구씨와 나눈 인터뷰, 여운형과 김일성의 회담을 기록한 러시아 비밀문서 등을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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