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쉬지 않는 여인, 대형마트 할인점 청소반장 최경자씨
신도시의 한 대형마트에서 청소일을 하는 최경자(52)씨의 출근시간은 저녁 6시 반. 근무현장에서 그를 만났다. 하루의 끝 무렵 매장에 들어서는 고객들의 표정은 서서히 기운을 잃어가는 반면 그는 활기가 넘친다. “아휴, 우리야 이 시간이 되면 쌩쌩해지지요.”
야간 청소반 근무시간은 저녁 6시 반에서 다음날 새벽 5시까지. 보통 사람들과 정확하게 낮과 밤이 바뀌어 있다.
저녁 10시, 매장 바닥의 주인이 된다
청소일은 흔히 말하는 3D 직종의 하나다. “청소일 한다고 사람들이 뭐라 하는 거요? 아휴 그러라고 그러지요 뭐, 얼른 봐도 무시하는 듯하는 이들이 많지만 상관 안 해요. 그런 거 일일이 신경쓰면 못살지요.” 일단 인상부터 막힘이 없어 보이는 최경자씨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산다는 주의다. “우리처럼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기술도 없는” 사람들, ‘이 나이 아줌마’가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 아니냐는 말이다. 그는 얼른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매장으로 나가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서서 사방을 살핀다. 저기 동료인 방씨는 벌써 과일을 비워낸 빈 박스를 카트에 실어내 오고 있다. 어디 바닥에 물 흐른 데는 없는가 살펴보자.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매장을 획획 오가는 아이들이 괜히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졌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 재빨리 걸레질을 해야 한다. “나 같으면 아이한테 그런 거 신겨서 오진 않겠지만 요즘 엄마들은 생각이 많이 달라요.” 매장영업이 끝나는 10시까지 마치 물고기가 물 속을 헤엄치듯 유연하고도 전문적인 자세로 마대 자루와 빗자루를 들고 아래 위층을 오가며 일을 한다. “10시까지는 정말 시간이 천천히 가요. 어떨 때는 아주 지루할 정도예요.” 그러나 일단 10시가 지나자 청소 팀은 생기를 띤다. ‘매장 바닥’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제 공식적인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일하기 편한 자유로운 복장으로 갈아입는다. 쇼핑 카트에 빗자루와 걸레, 왁스 통을 실어오고 기계도 몰고 나온다. 계산대 아래쪽은 특히 비질을 열심히 한다. 먼지는 보이지 않는 쪽에 쌓이길 좋아하니까. 오늘은 음료대 아래쪽에 왁스칠을 하라고 했지. 먼저 바닥 때부터 긁어내야 한다. 그의 동료는 모두 13명. 그러나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이 잦은 탓에 전체 인원의 숫자가 들쑥날쑥이다.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지요. 일단 밤에 일하는 것이 낮에 일하는 것보다 힘드니까 신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것도 있고, 또 청소한다는 것을 도저히 스스로 용납 못하는 이들도 있고 그런가봐요.” 사실 동료인 방양일(61)씨는 이제 일을 한 지 2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그도 그랬다. “중소기업을 하다가 여의치 않게 되었어요. 처음 일주일 동안은 옷을 갈아입고도 집으로 갈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지금은 주위 모두가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치켜세워준다. “누구에게 신세지면서 살아야 하는 것보다 백번 더 좋은 일이지요.” “빈둥빈둥 놀면서 이런 일은 싫다고요?” 최경자씨는 원래 하이톤인 그의 목소리를 더욱 높인다. “아, 다들 일자리 없다없다 하는데 우리는 사람을 못 구해서 난리예요. 사람들이 안 와요, 글쎄, 왜들 일을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빈둥빈둥 놀면서 이런 일은 싫다는 거지요. 나원 참.” 그는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자정에서 새벽 1시는 저녁을 먹는 시간. 요즘은 회사에서 미리 밥을 해주기 때문에 식당에서 차려먹기만 하면 된다. 근무환경이 좋아진 것이다. 밤이 깊을수록 청소는 난이도와 내용이 풍부해진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쪼그리고 앉아 손 힘을 모아서 바닥을 닦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왁스머신을 돌리는 베테랑이 되었다. “면접 보는데 소장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거냐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데요. 그래서 그랬지요. 사람이 못할 일이 뭐 있겠느냐고. 이런 일들이 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빗자루질부터 시작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난 뭐든지 배우려고 하는 게 있어요. 기계 조작하는 거, 뭐 이런 게 궁금해지는 거야. 그래서 쉬는 시간에 가서 물어보고 배우고. 결국은 일을 모두 훤하게 꿸 수 있는 거고. 그렇게 하다보면 처음엔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 알게 되더라고요.” 2년 전 그는 청소반원 중 으뜸이 되었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유치원에 반찬을 공급해주는 일을 했다. 이사를 하는 바람에 그 일을 그만두고 정보신문을 뒤져 일거리를 찾아낸 것이다. 사실 그는 오십 평생 살아오면서 한번도 일을 손에서 뗀 적이 없는 커리어 우먼. 7남매의 맏딸인 그는 열아홉부터 손놓고 지내시는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맡았다. “제가 일하다가 시집가면 그 다음 동생이 또 일을 하고 그랬지요. 난 평생 놀아본 적이 없어요. 아이 가졌을 때에도 부업을 했지요. 왜 실뜨기 같은 거 있잖아요….” 그는 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냈다. 딸은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아들은 입대를 앞두고 있다. 두 아이는 어릴 적에도 친구들 앞에서 엄마의 신문수레를 자랑스럽게 밀어주었다. 최경자씨는 그 점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아이들 국민학교 입학식에 손잡고 데려다준 이후 한번도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어요. 시간이 있어야지요. 어떨 때는 하루에도 몇탕씩 일을 했거든요.” 아침에는 신문배달하고 낮에는 아파트 소독하는 일을 하고, 그리고 시간나면 야쿠르트 배달하고. 파출부 일도 사이사이 끼어 있다. 그의 커리어에는 방문세일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많은 일 중에 다시 하고 싶지 않은 품목이다. “아파트 벨 눌렀다가 얼마나 욕을 얻어먹었는지. 금방 애 재웠는데 깨웠다고, 근데 내가 요즘 낮에 잠을 자다보니 정말 화는 나겠더라고요, 호호….” 혹시 일 안 하면 허전한 증세 아니신가요? 유식한 말로 하면 워커홀릭.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난 그냥 일을 안 하고 살면 하루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왜 가만있으면서 돈을 버리나 싶은 거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오천원, 만원이라도 버는 건데, 이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야간에 일을 해야 하는데 남편께서는 반대 안 하시는가요? “어느 남편이 매일 밤마다 마누라가 일을 나가는 것을 좋아하겠어요. 그리고 또 이런 일 나가라고 하면 그런 남편을 그냥 둬요?” 최경자씨의 남편은 현재 북한 건축현장에 나가 있다. 석달에 한번씩 집에 들른다. 지금만 그런 게 아니다. 그전에는 인도네시아에 있었고 그전에는 중동. 그 그전에는 아예 가정 생계현장에 있지 않았다. 주로 경제적으로 대형사고를 치는 쪽이었다. 월북한 남편?
“글쎄, 남편이 식구를 먹여살릴 생각을 안 했어요. 요즘이야 안 그렇지만. 내가 일을 안 하면 전부 굶어죽을 것 같더라니까.” 사실 그는 아직도 잘 모른다. 남편이 나 몰라라 해서 자기가 억척으로 일을 한 건지, 아니면 자기가 워낙 억척이니 남편이 은근히 빠진 건지, 그 점이 미스터리다. 좌우지간 100원을 벌면 200원을 쓰는 재주를 가진 남편과 안 헤어지고 아직까지 산 게 “아주 잘한 일인 듯하다”고 그는 활짝 웃는다. “헤어지면 뭘 해요. 그래봤자 남의 자식 키우는 일밖에 더 되겠어요.” 거친 삶의 물살을 밀고 나온 원동력은 바로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다.
그의 친구들은 야, 살면 얼마나 사느냐, 그만 하고 우리랑 낮 생활을 하자고 조른다. 계모임도 하고, 온천에 놀러도 가고 그러자는 얘기다.
“건강이 될 때까지 난 일을 할 거야. 근데 이 일도 힘이 드는지 이젠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오네. 나이는 못 속이나.” 손을 주무르면서 말을 이어나간다. “우리 같은 나이에 어디 가서 또 일을 시작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여기가 재미있어요. 정말.”
그는 “재미있어요”라는 말을 정말 자주 한다. 그의 재미는 어떤 의미인가? “이렇게 사람들이 다 가고 없는 한밤중에 일을 하고 있으면 얼마나 좋은데요. 깨끗하게 닦인 바닥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절로 좋아져요. 신문배달할 때는 산더미 같던 신문이 하나하나 줄어들어 재미있었고.” 아마 그는 재미가 아주 없었을 상황에서도 이 말을 자주 되뇌어왔을 것이다.
뼛속까지 시린 새벽 퇴근시간 5시. 동료들과 포장마차로 간다. 뜨근뜨근한 오뎅 국물과 우동. 소주 한잔씩 곁들이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요, 없는 사람들끼리 정이 더 나요. 우리가 가는 시간이면 포장마차 사람들도 일 끝내는 시간이거든요. 서로 수고했다고 말도 해주고 안줏거리도 그냥 반값으로 주고 그래요. 어휴, 얼마나 재미있는데.” 새해를 맞는 새벽 속으로 그의 밝은 웃음소리가 퍼져나간다. 이제 우리가 무심코 밟고 다니는 대형매장의 그 ‘넓은 바닥’이 어째서 한결같이 깨끗한지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신실한 힘들이 세상을 쓸어내고 닦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권은정/ 자유기고가

사진/ (박승화 기자)
청소일은 흔히 말하는 3D 직종의 하나다. “청소일 한다고 사람들이 뭐라 하는 거요? 아휴 그러라고 그러지요 뭐, 얼른 봐도 무시하는 듯하는 이들이 많지만 상관 안 해요. 그런 거 일일이 신경쓰면 못살지요.” 일단 인상부터 막힘이 없어 보이는 최경자씨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산다는 주의다. “우리처럼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기술도 없는” 사람들, ‘이 나이 아줌마’가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 아니냐는 말이다. 그는 얼른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매장으로 나가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서서 사방을 살핀다. 저기 동료인 방씨는 벌써 과일을 비워낸 빈 박스를 카트에 실어내 오고 있다. 어디 바닥에 물 흐른 데는 없는가 살펴보자.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매장을 획획 오가는 아이들이 괜히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졌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 재빨리 걸레질을 해야 한다. “나 같으면 아이한테 그런 거 신겨서 오진 않겠지만 요즘 엄마들은 생각이 많이 달라요.” 매장영업이 끝나는 10시까지 마치 물고기가 물 속을 헤엄치듯 유연하고도 전문적인 자세로 마대 자루와 빗자루를 들고 아래 위층을 오가며 일을 한다. “10시까지는 정말 시간이 천천히 가요. 어떨 때는 아주 지루할 정도예요.” 그러나 일단 10시가 지나자 청소 팀은 생기를 띤다. ‘매장 바닥’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제 공식적인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일하기 편한 자유로운 복장으로 갈아입는다. 쇼핑 카트에 빗자루와 걸레, 왁스 통을 실어오고 기계도 몰고 나온다. 계산대 아래쪽은 특히 비질을 열심히 한다. 먼지는 보이지 않는 쪽에 쌓이길 좋아하니까. 오늘은 음료대 아래쪽에 왁스칠을 하라고 했지. 먼저 바닥 때부터 긁어내야 한다. 그의 동료는 모두 13명. 그러나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이 잦은 탓에 전체 인원의 숫자가 들쑥날쑥이다.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지요. 일단 밤에 일하는 것이 낮에 일하는 것보다 힘드니까 신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것도 있고, 또 청소한다는 것을 도저히 스스로 용납 못하는 이들도 있고 그런가봐요.” 사실 동료인 방양일(61)씨는 이제 일을 한 지 2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그도 그랬다. “중소기업을 하다가 여의치 않게 되었어요. 처음 일주일 동안은 옷을 갈아입고도 집으로 갈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지금은 주위 모두가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치켜세워준다. “누구에게 신세지면서 살아야 하는 것보다 백번 더 좋은 일이지요.” “빈둥빈둥 놀면서 이런 일은 싫다고요?” 최경자씨는 원래 하이톤인 그의 목소리를 더욱 높인다. “아, 다들 일자리 없다없다 하는데 우리는 사람을 못 구해서 난리예요. 사람들이 안 와요, 글쎄, 왜들 일을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빈둥빈둥 놀면서 이런 일은 싫다는 거지요. 나원 참.” 그는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자정에서 새벽 1시는 저녁을 먹는 시간. 요즘은 회사에서 미리 밥을 해주기 때문에 식당에서 차려먹기만 하면 된다. 근무환경이 좋아진 것이다. 밤이 깊을수록 청소는 난이도와 내용이 풍부해진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쪼그리고 앉아 손 힘을 모아서 바닥을 닦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왁스머신을 돌리는 베테랑이 되었다. “면접 보는데 소장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거냐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데요. 그래서 그랬지요. 사람이 못할 일이 뭐 있겠느냐고. 이런 일들이 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빗자루질부터 시작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난 뭐든지 배우려고 하는 게 있어요. 기계 조작하는 거, 뭐 이런 게 궁금해지는 거야. 그래서 쉬는 시간에 가서 물어보고 배우고. 결국은 일을 모두 훤하게 꿸 수 있는 거고. 그렇게 하다보면 처음엔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 알게 되더라고요.” 2년 전 그는 청소반원 중 으뜸이 되었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유치원에 반찬을 공급해주는 일을 했다. 이사를 하는 바람에 그 일을 그만두고 정보신문을 뒤져 일거리를 찾아낸 것이다. 사실 그는 오십 평생 살아오면서 한번도 일을 손에서 뗀 적이 없는 커리어 우먼. 7남매의 맏딸인 그는 열아홉부터 손놓고 지내시는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맡았다. “제가 일하다가 시집가면 그 다음 동생이 또 일을 하고 그랬지요. 난 평생 놀아본 적이 없어요. 아이 가졌을 때에도 부업을 했지요. 왜 실뜨기 같은 거 있잖아요….” 그는 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냈다. 딸은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아들은 입대를 앞두고 있다. 두 아이는 어릴 적에도 친구들 앞에서 엄마의 신문수레를 자랑스럽게 밀어주었다. 최경자씨는 그 점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아이들 국민학교 입학식에 손잡고 데려다준 이후 한번도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어요. 시간이 있어야지요. 어떨 때는 하루에도 몇탕씩 일을 했거든요.” 아침에는 신문배달하고 낮에는 아파트 소독하는 일을 하고, 그리고 시간나면 야쿠르트 배달하고. 파출부 일도 사이사이 끼어 있다. 그의 커리어에는 방문세일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많은 일 중에 다시 하고 싶지 않은 품목이다. “아파트 벨 눌렀다가 얼마나 욕을 얻어먹었는지. 금방 애 재웠는데 깨웠다고, 근데 내가 요즘 낮에 잠을 자다보니 정말 화는 나겠더라고요, 호호….” 혹시 일 안 하면 허전한 증세 아니신가요? 유식한 말로 하면 워커홀릭.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난 그냥 일을 안 하고 살면 하루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왜 가만있으면서 돈을 버리나 싶은 거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오천원, 만원이라도 버는 건데, 이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야간에 일을 해야 하는데 남편께서는 반대 안 하시는가요? “어느 남편이 매일 밤마다 마누라가 일을 나가는 것을 좋아하겠어요. 그리고 또 이런 일 나가라고 하면 그런 남편을 그냥 둬요?” 최경자씨의 남편은 현재 북한 건축현장에 나가 있다. 석달에 한번씩 집에 들른다. 지금만 그런 게 아니다. 그전에는 인도네시아에 있었고 그전에는 중동. 그 그전에는 아예 가정 생계현장에 있지 않았다. 주로 경제적으로 대형사고를 치는 쪽이었다. 월북한 남편?

사진/ 깨끗하게 닦인 바닥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는 최경자(오른쪽)씨와 그의 동료들.(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