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 기자
최정범이 구술하고 강동원이 엮은 <지리산 달궁 비트>. 식민지, 분단, 전쟁을 온몸으로 관통한 남자의 격동 세월이 생생히 담겼다.
방에 들어서자 한편에 <한겨레>와 <한겨레21>이 수북했다. 한 달치는 될 법. 돋보기 없이 그는 날마다 신문을 읽고 주마다 주간지를 꼼꼼히 읽는다고 했다. 목소리에 구릿빛 녹이 묻어났다. 그는 기자에게 말했다. “만인이 평등한 세상… 지금도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변함이 없다. 그 사회가 돌아오면 얼마나 좋으냐고. 지금 세상? 아주 잘못돼가고 있다. 지도자들부터 부패돼 있기 때문에, 완전히 이 사회가 썩었다.” 왜 빨치산이 되었는가. 책머리 ‘구술자의 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지리산 별을 보며 그는 참세상을 꿈꾸었다.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하고, 그래서 인민이 풍족한 삶을 구가하는 세상!’ (…) 모든 것을 결과만을 두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단언을 하자면, 내가 목숨을 바쳐 이루려고 했던 세상과 지금의 북한 체제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인정할 만한 일이지만 전세계의 현대국가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습체제, 다른 무엇보다 인민을 억압과 굶주림과 도탄에 빠뜨린 북한의 현재 모습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잘못된 현실임이 분명하다. 내가 목숨을 던져 만들고자 했던 세상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빨치산은 프랑스어로 도당·동지를 가리키는 ‘파르티’(Parti)에서 비롯한 말이다. 적의 후방에서 무장 인민투쟁을 벌이는 독립부대, 적 점령지에서 자발적인 군사조직의 대원으로 참여한 사람을 이른다. 중국 공산당을 이끈 마오쩌둥은 빨치산 대신 ‘인민유격대’라는 호칭을 썼다.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은 1946년 9월 노동자 총파업을 계기로 일어난 대구 ‘10월 폭동’ 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한 2·7 사건, 여순 사건과 제주 4·3 사건, 이후 한국전쟁기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빨치산은 1955년 봄 군경에 의해 대부분 소탕됐으며, 그해 4월1일 지리산 민간인 입산통제가 해제됐다. 마지막 빨치산은 1963년 경남 산청에서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생포되면서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다.(김영택, ‘한국전쟁기 남한 내 적색 빨치산의 재건과 소멸’, 2003) 일제 말 강제징용 두 번 끌려가 최정범을 사회주의, 빨치산으로 이끈 것은 무엇인가. 역설적이게도 참담한 강제징용이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식민지 백성의 대표적인 고난 중 하나인 ‘징용’을 두 차례나 온몸으로 겪어냈다. 그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이 또래의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떠졌으니 그만한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14살이던 1942년 아버지를 대신해 함경도 장진호 강계수력발전소 공사판에 끌려갔다. 이듬해 겨울 그는 귀향했다. 다시 이듬해인 1944년, 16살 그는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로 다시 징용을 갔다. 육군 병참기지에서 취사장 노무자로 노역했다. 그리고 이듬해 해방을 맞았다. 18살이던 1946년 남원 인민위원회 청년교육캠프에서 <공산주의 ABC>를 처음 보았다. 1919년 러시아 볼셰비키 제2차 당 강령을 풀어쓴 책이다. 미군정의 사회주의 인사 단속에 휘말려 1년간 경북 김천과 인천의 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 1949년 겨울 21살에 한옥연과 결혼했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신부를 처가에서 데려오지도 못한 채 인민군을 맞았다. 이후 조선노동당 입당(후보당원), 인천상륙작전, 인민군 패퇴, 지리산 입산…. 현대사의 울돌목이 그를 휘감았다. 1951년 겨울 최정범은 자신의 은거지 ‘달궁 비트’ 근처에서 “말로만 듣던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1905~53)과 조우하기도 했다. 그는 이현상을 이렇게 기억했다. “건장하고 당당한 신체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인물이었다.” 지금도 그는 한 여성을 잊지 못한다. 신애덕(85). 비전향 장기수 류낙진(1928~2005)의 부인이자,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할머니다. 신애덕은 남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 전남방직에 취업했다. 총파업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16살에 반년 옥살이를 했다. 석방 뒤 광주의 한 병원에서 간호부로 일했다. 한국전쟁기 그도 빨치산이 되어 최정범을 만났다. 발목 관통상으로 ‘환자트’(환자 비밀 아지트)에 머물던 최정범은 과다 출혈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신애덕이 자신의 팔에 고무줄을 감더니 주사기를 찔러 피를 뽑기 시작했다. 나는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피를 뽑더니 주사기를 내 팔뚝에 찔러 수혈해줬다.” 두 사람의 혈액형은 같은 B형이었다. 이후 신애덕은 1953년 9월 임실에서 네 군데 총상을 입고 경찰에 체포됐다. 최정범은 지금도 신애덕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긴다. 반백년 세월이 넘도록 두 사람은 전화를 주고받거나 만나왔다. 신애덕은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의 자녀 집에 머물고 있다. 1953년 봄 최정범은 은신처에서 주민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1950년 가을 시작한 빨치산 생활 2년 반 만이었다. 남원경찰서로 압송된 그는 최난수 서장을 만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악질 친일 경찰이었다. “최난수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나를 조롱했다. 내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이런 자들이 우쭐대는 나라가 아니었다.” 산에서 만난 생명의 은인
지난 6월6일 전북 남원시 최정범씨(왼쪽) 자택에서 강동원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빨치산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