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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비평의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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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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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 대한 영향력 갈수록 상실해 가는 우리 비평의 초라한 자화상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자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을 50%까지 끌어올려 한국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긴 2001년, ‘영화비평의 추락’은 또 하나의 냉엄한 현실이 됐다. <고양이를 부탁해>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 평단에서 거의 일치된 찬사를 받은 영화일수록 흥행에 참패하면서 ‘비평의 위기감’은 피부에 실감나게 와닿았다. 90년대 초, 정성일씨를 선두로 이효인, 이정하, 유지나씨 등 이른바 ‘평론가 1세대’들이 누렸던 인기와 영향력은 이제 ‘흘러간 옛날 이야기’가 돼버렸다.

“제발 별 많이 주지 마”

“비평이 흥행에 어떤 영향력도 못 미치는 것 같다. 그만큼 스타 비평가나 영향력 있는 저널이 없다. (평론가들이 작품에 대해 매기는 평점에서) 별 세개 받으면 흥행이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됐고, 영화제에서 상 받으면 감춰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영화 마케팅에서 가장 초점을 맞추는 건 텔레비전의 연예정보 프로그램에 노출해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한 영화 제작자가 익명을 전제로 술술 말을 이어갔다. 이건 비평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 대중에 대해 영향력을 상실한 비평에 대한 냉정한 평가다. 영화사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각종 설문조사는 이런 평가와 여기에 근거한 대응이라 할 마케팅 방식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보여준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접하느냐는 질문에서 각종 비평이 실리는 신문과 영화 주·월간지의 순위는 한참 뒤로 밀린다. 최근 싸이더스가 <화산고> 개봉에 맞춰 3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영화정보 입수경로는 인터넷(37%)>TV 프로그램(36%)>예고편(19.2%)>영화잡지(12%)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영화전문지가 그나마 체면을 세우고 있지만 신문(3.9%)은 입소문(4.9%)보다 못했다. 명필름이 <와이키키 브라더스> 개봉에 앞서 좀더 엄밀하게 실시한 개별 설문조사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 9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TV 영화프로그램(30%)>주변 사람들(24%)>인터넷(23%)>영화주간지(22%)>TV 연예프로그램(11%)>일간지(9%)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각종 지면에 실리는 비평이 깊이있는 분석보다는 아무래도 흥미 위주의 정보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텔레비전이나 개인의 감상평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인터넷에 비해 얼마나 천대받는지 보여주는 간접증거인 셈이다.

비평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는 이유를 산업쪽에서 찾자면, 할리우드를 닮아버린 한국영화의 마케팅 방식을 우선 꼽을 수 있다. 2001년은 주요 배급사가 극장들을 한손에 거머쥐고 크게 풀어 한번에 먹는 배급방식이 거의 관행처럼 자리잡은 해였다. 관객의 선택폭을 아주 좁혀 개봉 1, 2주 안에 최대한 수익을 올리는 작전을 펴면서, 손님이 안 들면 곧바로 작품을 내리고 뒷심이 붙으면 좀더 오래 끌고 가는 전략이다. 이런 틈바구니에서는 비평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비평의 담론이 뛰어놀 만한 작품들이 극장을 잡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또 비평가들은 “좋은 영화가 나와야 좋은 비평이 나올 수 있다”며 문제작 생산에 부진한 제작자들을 탓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비평은 다른 장르의 비평과 달리 좀 특별한 구석이 있다. 그 생산주체와 유통 통로를 점령하다시피한 건 이른바 ‘이론비평’ 혹은 ‘학술비평’이 아니라 ‘저널비평’이라는 점이다. 신문이나 주·월간지의 비평글은 대부분 영화담당 기자이거나 기자를 겸하는 평론가들의 손에서 나온다. 앞서 언급한 제작자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스타 비평가가 나와서 대중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저널들이 워낙 비평가를 안 키운다. 기자마다 개인차가 큰데도 모두 비평 같은 리뷰를 쓴다. 이 때문에 정보만 넘칠 뿐이지 비평이 해야 할, 영화제작과 수용자 사이의 다리 구실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아무튼 영화계 전체를 놓고 볼 때 비평에 대한 대중의 냉소주의는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다.”

저널비평과 동반자주의

사진/ 지난해에는 평단의 거의 일치된 찬사를 받았으나 흥행에서 고배를 마신 영화가 속속 등장했다.
비평 내부의 문제에 접근하자마자 대번에 튀어나온 건 미디어의 문제였다. 평론가와 기자로 동시에 활동하고 있는 김영진 <필름2.0> 편집위원은 “비평의 권위가 떨어지는 건 비평가의 자질 부족을 우선적인 이유로 꼽을 수 있다”면서도 “평론을 평론가가 하느냐,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지면의 권력을 쥔 건 기자들이다. 사람들이 평론가를 욕하는데, 평론가는 사실 힘이 없다”고 말한다. <씨네21> <필름2.0> 등 일부 영화전문지는 서너명씩의 평론가를 스태프처럼 두고 고정적인 지면을 할애하지만, 신문에서 평론가의 고정란을 찾아보기란 정말 어려워졌다. 신문쪽에서 할말이 없는 건 아니다. 기자들은 독자들이 평론가들이 정색하고 쓴 글을 딱딱하고 무겁게 여겨 외면하고, 또 지면을 주려고 해도 평론가층이 워낙 얕아 필자 선정이 쉽지 않다는 점을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가볍게 가려는 신문 전체의 편집방향과 ‘믿고 맡길 만한’ 평론가가 없다는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부 사정이 저널비평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는다. 저널비평의 아마추어리즘과, 비평 대상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기보다 적당한 ‘거래관계’에 빠진 동반자주의가 대중의 신뢰감을 스스로 잃게 했다는 지적들이다.

“저널비평을 기자들이 점령했다고 하지만, 그걸 저널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일정한 팬을 가진 모 기자의 글도 비평이라기보다 에세이라고 봐야 정확한 거 아닌가. 또 영화담당 기자들은 취재원하고 자꾸 얼굴을 맞대야 하니까, 또 한국영화에 대한 호감도가 워낙 광범위해져서 펜이 아무래도 무뎌진다. 이걸 피할 수 있는 길은 전문 비평가에게 맡겨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외국처럼 평론가와 일정 기간 계약을 해서 책임있게 지면을 맡기는 게 좋다는 걸 알지만….”(이영기 <중앙일보> 영화담당 기자)

선후관계를 따지기 어려운 구석은 있지만, 저널비평은 자꾸 힘이 떨어지니까 더 쉽고 재밌게 가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또 대중의 신뢰감을 잃는 묘한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있는 듯하다. 지난 가을, 가장 젊은 영화평론가 세대에 속하는 이상용씨가 엄밀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저널비평을 공개적으로 문제삼은 적이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비평이 처한 현재의 문제를 비교적 명쾌하게 짚어준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흑수선> 때도 그랬다. 영화제도 영화제이지만 작품을 제대로 평가해야 하지 않나. 신문평들을 보고 ‘영화가 이렇게 훌륭했다는 말이야’ 하고 속으로 뜨끔할 정도였다. 아카데미즘이 활성화하지 못하면 결국 저널비평도 죽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저널비평과 이론비평은 서로를 너무 닮아버렸다. 비평가 1세대가 저널이면 저널, 학계이면 학계에서 분명하게 나뉘어 이끌어가야 하는데 너무 여러 곳에 발을 걸치고 있다.”

학술비평·이론비평의 공허함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가 한 임권택 감독 연구는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 이렇다 할 연구서가 없다거나 변변찮은 한국영화사조차 나오지 않고 있는 건 학술비평·이론비평이 부재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케팅과 저널의 힘에 포위된 처지가 평론가 스스로의 미진한 자세까지 변명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든다고 해서 이를 비평의 추락으로 여기는 건 그 잣대가 잘못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비평의 권위 추락은 세계적으로 볼 수 있는 경향적 현상이다. 비평으로 움직이는 관객이 프랑스에는 7천명, 일본에는 3천명 정도라고 한다.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다. 추락이라기보다 안정 단계로 봐야 하지 않을까. 원론적으로 비평은 영화의 미학적 가치를 발견하고 지지하는 일이다. 소수라도 배타적으로 이런 작업을 해나가는 게 필요한데 국내에서 이런 게 충분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허문영 <씨네21> 편집장)

허 편집장은 이런 진단과 함께 영화 담론의 유통을 활발하게 펼치기 위한 기반이라 할 시네필(‘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일종의 영화광)이 부재한 국내의 현실을 지적했다. 영화의 미학적 가치나 형식적 새로움 등에 주목하고 신뢰하는 시네필의 활동이 비평문화의 기반이 되는데, 국내에는 이런저런 동호회는 많을지언정 시네필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평의 생명력은 대중에 대한 강한 영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비평의 생성과 소통을 이룰 수 있는 토양에서 꽃필 수 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비평이 논쟁하며 다툴 수 있는 조건을 논한다면 문학은 영화보다 행복해야 한다. 대중과 동떨어진 지는 오래됐지만, 이론비평끼리 서로 논쟁하며 둥지를 틀 수 있는 공간은 문학쪽이 좀더 많이 갖추고 있다. 하지만 “현 단계에서 문학의 위기는 비평의 위기다”라는 말이 최근 문단 안팎에서 대두되고 있을 정도로 이곳 사정은 여의치 않다. 90년대 중반 이후 비평이 제대로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이 문단 전체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은 소장평론가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돼온 문제다.

문학에 ‘주례사 비평’만 난무?

사진/ 문학권력 비판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강준만(서경신 기자), 군성우(이정용 기자)씨와 지난해 가을부터 이들에 대한 반격에 나선 <문학동네>의 남진우(서경신 기자)씨.(위로부터)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교원대 국어교육)는 “근래 거론되는 비평의 위기는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의 측면보다 비평이 존재하는 형식에 대한 위기다”라고 설명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비평은 부도덕한 권력에 대한 비판하거나 상업주의로부터 문학을 지키려는 윤리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출판사의 자본주의적 전략에 투항하고 헌신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유 교수의 지적처럼 비평의 위기나 비평의 타락을 이야기할 때 가장 격렬하게 제기돼온 것은 문단의 상업주의화 문제다. 비평가를 “상업자본에 하청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표현한 문학평론가 신철하씨의 말처럼 비평이 작품판매를 위한 홍보전단 정도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신철하씨는 98년 한 문학월간지에서 “90년대 이후에 들어오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출판자본-작가-비평가’의 왜곡된 생존사슬이 청산되지 않는 한 한국문학의 미래는 없다고 말해도 큰 과장이 아니다. 잘 알고 있듯이 한편으로는 문학을 빙자한 상업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상업주의를 눈가림한 문학주의가 진지한 독자와 진지한 작가를 다함께 희생의 제물로 삼고 있는 것이 우리 문학의 현실이다”라고 우려했다.

근래 들어 비평문제에 대해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 가운데 ‘주례사 비평’이라는 말이 있다. 작품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은 사라지고 결혼식의 주례사처럼 덕담만이 난무한다는 데서 만들어진 자조적인 말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젊은 평론가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 조정래씨까지 “상업주의에 수청들기, 각종 심사 장악하기, 끼리끼리 간음하기”라는 격한 언어로 평단에 일침을 가할 정도로 비평가들의 문제는 평론가와 창작가를 막론하고 문학계 전체의 위기의식으로 확산된 지 오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 문학계를 오랫동안 이끌어오면서 상징적 권위를 지닌 주요 문학출판사에서 상업주의 전략이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초부터 문단의 ‘뜨거운 감자’가 된 ‘문학권력’ 논쟁 또는 ‘비판적 글쓰기’는 권위있는 출판사들이 상업주의를 매개로 권력화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수십년 동안 한국 문단의 풍향계로 자리잡아온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 그리고 90년대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문학동네> 등 우리 문단의 중심에 서 있는 문학계간지에서 자사 출판물에 대한 찬사일색의 비평을 지속적으로 실으면서 비평을 일종의 상품포장 행위로 전락시키고 작가들과 비평가들의 줄서기를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에콜이라고 지칭되는 주요 집단 안에 끼지 못하면 작가들뿐 아니라 비평가들 역시 주목받을 수 있는 길이 달리 없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유력 출판사로부터 자사 출판물을 평해달라는 제안을 받으면 제대로 된 비판을 하기 어렵다.” 문학평론가 이숭원 교수(서울여대)의 지적이다.

비평과 산업의 긴장관계가 없다

부산에서 비평활동을 하고 있는 평론가 하상일씨는 문단의 권력화가 중앙중심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방에서 등단한 작가나 비평가들은 서울에서 재등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안에서도 중앙 대 변방의 구도는 존재한다. 3개 주요 에콜에 들어가야 문단 전체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숭원 교수는 권력화 문제가 현장비평의 빈곤과 비평계의 조로현상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김현 선생이나 김윤식 선생이 존경받는 것은 무엇보다 현장비평에 치열했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자기를 숙성시켜야 할 40대에 요즘 비평가들은 현장을 떠나 문학상 심사에서 행사주관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이다. 선배들이 가졌던 재능의 부족을 힘의 단결로 메워가려는 것이 아닌가.”

흥미로운 것은 문학권력 비판에 대해 침묵과 무시로 일관했던 기존 평단에서 이에 대응하는 움직임이 최근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계간 <문학동네>는 지난 여름호에서 ‘비평과 권력’이라는 특집을 대응해 문학권력 논쟁에 대해 포문을 열었고, 이번 겨울호에서도 후속 비판을 싣고 있다. <문학동네>는 “이들의 비판적, 혹은 전투적 글쓰기라는 것이 대체로 이성적 담론의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선정성, 음해성 언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고 편집위원인 남진우씨는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문학권력 비판의 전면에 나선 강준만, 권성우씨를 반격하고 나섰다. 이들의 논쟁에는 “야비한”, “우둔한”, “열등감의 소산” 등 거친 언어가 동반되면서 최근의 비판 국면에 대한 우려섞인 염려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유성호 교수는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가는 과정이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조차 하나의 입장이기 때문에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면서 “문학권력 논쟁은 우리 문학이 생산, 유통, 소비, 그리고 재생산되는 존재 방식에 대한 흔치 않은 담론을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영화와 문학 모두 공통된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건 비평과 산업의 긴장관계가 팽팽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스타 비평가’ 로저 에버트가 제작자와는 절대로 접촉하지 않는다거나, <LA타임스>의 평론가들이 일반인들과 함께하는 시사회에만 참석하는 원칙을 지킨다는 이야기는 괜한 폼잡기로 들리지 않는다. 지성에 대한 ‘숭배’가 사라지는 세상을 대중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비평을 그만두는 사람들, 그리고 이전에 자기 글이 가졌던 권위나 권력적인 기능이 자꾸 떨어지면서 위축된다고 여기는 이들은 처음부터 비평을 권력으로 접근하지 않았나 반성해야 한다”는 영화평론가 이효인씨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평론은 파출부 문학상은 사기”

강준만씨가 최근 <문학권력>(개마고원)이라는 단행본을 발표했다. 언론학자인 그가 문단 내의 병폐를 꼬집는 이 책을 쓴 건 놀랍지 않다. 그는 몇년 전부터 <인물과 사상>에서 <문학과 사회>의 정과리, <창작과 비평>의 백낙청 등 문단의 주요 인물들을 ‘실명비판’해왔을 뿐 아니라 <인물과 사상> 20호에서는 ‘한국문학의 위선과 기만’이라는 제목의 사실상의 단행본을 냈기 때문이다. <문학권력>의 발표는 <인물과 사상> 20호에서 예고했던 바이기도 하다. 문단 바깥의 인물로 “벼락치기로 공부한 수험생의 핏발선 눈동자가 떠오른다”는 조롱까지 받으면서 그가 문학계의 비판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한국 문단이라고 하는 ‘닫힌 종교’는 속이 썩어도 너무 썩었다. 그저 자기 패거리 키우기에만 바쁘다. 내가 문학을 아무리 몰라도 나에겐 지금 내가 이 책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수준의 개입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문학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문단이 상식 수준의 과오를 범할 때엔 그 누구건 상식의 힘으로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머리말에서)

그의 비판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상업주의로 흐르고 있는 문학출판의 현실을 북돋우는 장치들로 문학비평, 문학상 제도, 문학(출판사)과 언론과의 유착에 대한 비판을 한 다음 각론으로 권력화되고 있는 문학 에콜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의 문제점을 짚는다. 그는 평론가를 ‘출판자본의 ‘파출부’’로, 문학상 제도를 ‘제도적 사기 혹은 권위 훔치기의 합법화’라는 이름으로 규정짓는 데 주저함이 없다. 강씨 특유의 이런 ‘독설’은 주류 문단의 신경을 긁는 것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특기인 왕성한 인용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 “‘문학권력’(‘문학자본’도 포함)의 문제에 대해 여러 비판적인 문인들이 제기한 비판적 견해를 종합해서 책으로 내놓는” 것이라는 강씨의 말마따나 이 책이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의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공저로 이름이 올라와 있는 평론가 권성우 교수(동덕여대 인문학부)는 머리말과 함께 <황해문화> 겨울호에 수록됐던 남진우씨의 반론에 대한 장문의 재반론 ‘심미적 비평의 파탄’을 발표했다. 그는 남씨의 글이 “심미적 비평이 한순간 기괴한 공격성으로 돌변하는 카멜레온적이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지적한다. 권씨는 남씨를 비롯해 많은 문인들이 “소모적인 진흙탕 논쟁이라는 식으로 단순한 잣대에 의해서 매도하는 것은 이 논쟁의 심층적인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지독히 상투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비난의 수사학’과 주관적 궤변을 동원하여 문학권력 논쟁을 인위적으로 진흙탕 싸움의 성격을 띠게 만든 남진우의 결정적인 공로(?) 덕분에 이제 이 논쟁이 애초에 제기했던 근원적인 문제의식은 희석되고 부정적인 이미지만 난무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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