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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질주하고 노래하며 도전한다

제5회 아랍영화제 여성감독 작품 3편 <스피드 시스터즈> <나와라의 선물>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로 보는 아랍 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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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31 16:54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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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지역 영화를 통해 한국과 아랍의 접점을 만들어온 아랍영화제가 5월26일~6월1일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열린다. 올해로 다섯 번째다. 알제리·이집트·튀니지 등 아랍 여러 국가의 영화 15편을 상영하는 이번 아랍영화제에선 특히 아랍 출신 여성감독들의 영화 3편을 선보인다. 개막작 <나와라의 선물>, 중동 최초 여성 카레이싱팀을 다룬 다큐영화 <스피드 시스터즈>, ‘튀니지의 봄’ 이후 성장한 소녀 파라의 이야기를 담은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는 그동안 주류 매체가 다루지 않은 방식으로 아랍 여성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_편집자

위부터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나와라의 선물>, <스피드 시스터즈>. 아랍영화제 사무국 제공

시동을 건다. 팔레스타인 여성 누르 다우드가 자동차 키를 돌리는 순간, 엔진의 굉음을 듣는 그의 얼굴에 희열이 넘친다. 액셀을 밟는다. 요르단 암만에서 추방돼 난민캠프가 있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도시 제닌에 사는 마라 자할카는 핸들을 꺾으며 자유를 만끽한다. ‘질주 본능’을 과시하는 그녀들을 둘러싸고 남성 관객들이 환호한다. 그녀들은 남성 카레이서와 다르지 않다. 헬멧을 썼고, 카레이싱 슈트를 입었다. 섹슈얼리티를 뽐내는 대신, 속도를 즐긴다.

속도를 즐기는 아랍 첫 여성 카레이서들

제5회 아랍영화제 ‘포커스 2016: 오늘의 아랍 여성’ 섹션에서 상영되는 영화 <스피드 시스터즈>의 레이싱 장면이다. 다큐영화 <스피드 시스터즈>는 누르, 마라를 포함해 베티 사데, 모나 알리, 메이순 자이시 등 여성 5명으로 구성된 아랍 지역 최초 카레이서팀 ‘스피드 시스터즈’의 이야기다.

<스피드 시스터즈>를 만든 감독 앰버 파레스는 레바논계 캐나다 여성이다. 할머니·할아버지가 레바논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뒤 캐나다에서 태어나 살아온 이민 3세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영화와는 무관한 인생이었다. 집에서는 중동 음식인 후무스(으깬 병아리콩으로 만든 소스)를 먹는 동시에 하키도 자주 했다. 캐나다와 레바논의 영향을 동시에 받으며 살아왔고,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딱히 없었다.

그러나 2011년 9·11 테러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사회 전체에 이슬람포비아가 커졌고 아랍 커뮤니티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날카롭고 예민해졌다. 파레스는 심각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했다. 그제야 뉴스나 대중매체가 찍어내는 아랍·중동·이슬람에 대한 이미지가 자신이 할머니·할아버지를 통해 체득해온 것과 다르다는 걸 인지했다. 그는 가방을 싸서 자신의 ‘민족적 고향’으로 갔다. 그곳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그리고 우연히 구경 간 카레이싱대회에서 ‘스피드 시스터즈’를 만났다. ‘스피드 시스터즈’는 그가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새로운 풍경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같고도 달랐다. 모두 달리고 싶어 했지만, 달리는 이유도 달리는 목적도 달랐다.


마라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마라 자할카라는 여성이 있다는 걸 전세계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레이싱 챔피언’이었다. 그녀는 11살 때부터 엄마 차를 훔쳐 달렸고 19살에 레이싱대회에서 ‘가장 빠른 여성’ 타이틀을 달았다. 이변이 없는 한 ‘가장 빠른 여성 레이서’는 마라였다. 아버지는 그런 마라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한다. 마라의 할아버지는 “말리고 싶지만 이미 시작했으니…”라고 말한다.

모나는 달리면서 자꾸 경로를 이탈해 대회를 완주하지 못한다. 그러나 달린다. “나는 트로피를 위해 달리지 않는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달린다.” 그렇다고 맹목적이지는 않다. 결혼을 앞둔 그녀에게 팀 리더 메이순이 물었다. “만약 남편이 레이싱을 그만두라고 하면 어떡할 거야.” “글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레이싱을 선택하진 않을 거야.” 모나의 답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계속 달린다. 남편은 모나에게 레이싱을 관두라고 하지 않았다.

베티는 여성성을 중시하는 레이서다. 그녀는 네일아트를 즐기고, 미용실에 자주 가며, 통굽 하이힐을 좋아한다. 새빨간 립스틱을 좋아하는 금발의 베티가 베들레헴에서 열린 레이싱 대회에서 우승하자, 미디어들이 달려들었다. 마라가 우승했을 때는 받아본 적 없는 스포트라이트였다. 베티는 “나는 대중이 좋아하는 말을 할 줄 안다”고 말한다. 베티는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레이서다.

관행에 도전하는 여성 감독들

중동 지역 첫 여성 카레이서팀 ‘스피드 시스터즈’의 카레이싱 경기를 지켜보는 팔레스타인 남성 관객들. 아랍영화제 사무국 제공

<스피드 시스터즈>가 보여주는 팔레스타인에는 서안지구와 이스라엘을 구분짓는 8m 높이의 거대한 장벽도 있고, 곳곳의 검문소에서 총을 들고 감시하는 군인들도 있다. 베티는 실제로 연습하다 총에 맞기도 한다. 예루살렘 신분증이 있는 메이순과 누르는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서안지구 신분증을 가진 마라·베티·모나는 장벽 밖으로 나가려면 심사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제약 속에서 펄떡펄떡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단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캐나다 랜덤하우스에서 발행하는 잡지 <해즐릿>(Hazlitt)과의 인터뷰에서 파레스는 “한 장소를 정의하는 단 하나의 이야기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스피드 시스터즈 역시 팔레스타인의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슬람혐오도, 여성혐오도 사실과 다른 ‘박제된 고정관념’에서 비롯한다. <스피드 시스터즈>는 그 ‘박제’를 벗어던진다.

개막작으로 상영된 이집트 여성감독의 영화 <나와라의 선물>은 이집트의 가난한 계급 출신으로 가정부로 일하는 나와라가 주인공이다. 이집트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는 여성은 3명 정도에 불과하다. <나와라의 선물> 프로듀서 타그리드 아부엘하산에 따르면, 이집트 영화 제작사들은 여성감독의 영화를 제작하려 들지 않는다(상자 기사 참조). 할라 칼릴 감독과 아부엘하산은 그런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아예 나즈라필름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를 차렸다. <나와라의 선물>은 촬영감독을 제외한 모든 스태프가 여성이다. 여성감독, 여성프로듀서가 만들었고, 타이틀롤도 여성이 맡았다. 이집트 영화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작품이다.

소재 역시 색다르다. 이집트에선 대부분 코미디영화, 할리우드식 액션영화가 투자와 흥행 양쪽에서 환영받는다. <나와라의 선물>은 2011년 1월 30년 독재를 지속해온 무바라크 정권 퇴진을 요구했던 ‘이집트 1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다.

내용도 매우 사실적이다. 영화 속 TV·라디오에서 계속 나오는 ‘무바라크 재산을 압류해 모든 국민에게 나눠준다’는 뉴스는 이집트 거의 모든 서민들을 들뜨게 했던 ‘뜬소문’이었다. 서민들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나와라의 시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수술받아야 하지만 침대가 없어 몇 날 며칠을 병원 바닥에서 지내는 모습 역시 2016년 지금까지 여전한 현실이다.

저항을 노래하는 18살 소녀

애초 아랍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로 돼 있던 개막작 할라 칼릴 감독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다. 감독은 대신 영상편지를 보냈다. 정용일 기자

이런 지독한 현실을 가정부 나와라를 통해 보여주는 <나와라의 선물>은 200만 명이 본 성공한 독립영화다. 아부엘하산은 “이집트에선 가난한 계급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자 대부분의 관객이 울었다”고 말했다.

2011년 1월 튀니지 민중이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투쟁을 했던 ‘튀니지의 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는 학교를 막 졸업하고 록밴드에서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는 18살 여성 파라가 주인공이다. 파라는 저항적 노래를 통해 ‘튀니지 민중이 처한 현실’을 노래하고, 사랑을 하고, 경찰에 끌려가 성적 수치심을 주는 고문을 당하며, 그 상처를 이겨낸다.

낯설면서도 두려운 지역인 아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아프고, 사랑하고, 좌절하며, 도전한다.


<나와라의 선물> 프로듀서  타그리드  아부엘하산

“이집트  보통의  삶을  찍고  싶다”

정용일 기자
타그리드 아부엘하산(사진)은 자신이 “이집트 상류층”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 <나와라의 선물>의 주인공 ‘나와라’와 같은 가정부를 고용하고 있다. 아부엘하산에 따르면 “이집트 사회에서 가정부와 가정부를 고용하는 자의 계급 차이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고, 그래서 매우 심각하다”.

아부엘하산은 자신이 카이로에서 방송 및 영화연출을 전공한 뒤 영국에서 시나리오 창작을 공부하고, 미국 뉴욕필름아카데미와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캠퍼스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타고난 계급 때문에 운이 좋아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부를 마친 뒤 이집트로 돌아가 영화 <나와라의 선물> 제작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여성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려 하지 않는 이집트 영화 제작사의 관행 때문에 투자처를 찾는 데만 1년6개월이 걸렸다. 제5회 아랍영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 온 아부엘하산을 5월26일 영화제 개막식이 열리는 서울 대현동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만났다.

이집트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어떤가.

검열이 매우 심각하다. 영화를 만들기 전 각본 단계에서 한 차례 검열이 있고, 영화를 만든 뒤 상영 전 단계에서 또 한 차례 검열이 있다. 나 역시 무슬림 여성과 기독교 남성 간의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고 했지만, 각본 검열에서 ‘제작 금지’ 당했다. 제작을 허용하더라도 표현 하나하나 수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또 애당초 상영등급이 없다. 이집트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는 ‘전체 관람가’다. 나올 수 있는 장면은 키스신 정도다. 그나마도 짧아야 가능하다.

이집트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 제약이 없나.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남성과 비슷한 편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여성과 남성의 취업률을 보면 여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여성들은 학위를 이용해 취업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영화를 만들 때도, 여성감독이 택하는 소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성감독이 투자받는 일이 쉽지 않다. 우리가 제작사를 직접 차린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여건이 어려운데도 이집트에서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유는 뭔가.

미국과 영국으로 영화 공부를 하러 간 건, 그들의 테크닉을 배우고 싶었을 뿐이지 그곳에서 활동하고 싶어서는 아니다. 나는 이집트가 가진 이야기가 훨씬 풍부하다고 생각한다. 이집트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가난한 계층의 이야기, 즉 우리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 또 여성감독이 있어야 이집트 영화에 다양성을 불어넣을 수 있다.

준비하는 작품은.

테러리즘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세뇌되는지 한 가족사를 통해 말하는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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