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와 민주는 같은자리말이다.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연구는 양적, 질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는 부분도 많다. 특히 광주민중항쟁 ‘현장’을 주목하거나 ‘문화’를 다룬 연구는 최근에야 미개척 상태를 벗어나고 있다.” ‘항쟁 사후’가 아닌 ‘항쟁 열흘’로 뛰어든 책
<오월의 문화정치>(오월의봄 펴냄)가 던진 문제의식.
책은 세 부분으로 짜였다. 1부는 5·18 직전에 전개된 정치·문화 투쟁. “1980년 초의 정치 상황과 총학생회 부활에 따른 학생시위, 학내 민주화 투쟁이 사회투쟁, 정치투쟁으로 변모하던 상황.” 2부에서는 현장에서 전개된 문화적 실천을 톺아본다. 시, 구호·표어, 노래·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유인물, 음향. 3부는 거리 시민들의 연대와 공동체, 운동 조직 이야기. “‘해방구로서의 나눔’을 실천했던 ‘공동체’. (…) 시민 공동체가 이룩한 ‘직접민주주의’ 재현.”
새로운 자료 발굴과 창의적인 분석에서 이 책은 특히 빛난다. 지은이 천유철은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세 가지를 꼽았다. 5·18 당시 쓰인 ‘최초의 시’ 발굴을 비롯해 시인들과 시민들이 창작한 시의 특징을 해석한 것.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 주도한 <투사회보> 등 각종 유인물의 제작 주체·상황을 정리한 것.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에 전개된 ‘소리 싸움’(음향전)에 처음 주목한 것.
이번에 지은이가 확인한 5·18 최초의 시는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지던 5월20일 쓰였다. 시인은 김준태(당시 전남고 독일어 교사).
“어둠 속에 불기둥이 솟고 있었다/ 끝없는 아우성 소리 밤바람 소리/ 더욱 참혹하게 일어서 달리는/ 사랑과 평화와 자유의 갈증들/ 아아, 밤이었다 불 꺼진 밤 10시/ 텅 비어 있는 죽음과 죽음 속에/ 가득히 담겨 소용돌이치고야 마는/ 저 역사에 대한 명백한 진리의/ 어둠 속에 부서진 라디오와/ 눈덩이처럼 얼어붙은 별빛이 뒹굴고/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밤 10시’).
이제까지 알려진 5·18 첫 시는 1980년 6월2일치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아아, 광주여 우리들이 십자가여!’였다. 계엄사령부는 신문 인쇄 전 제목을 ‘아아, 광주여!’로 바꾸고 시 전체의 3분의 2를 삭제하는 등 폭력적인 검열을 했다. “다행히 김준태는 시를 쓸 때, 검열로 시 일부가 삭제되더라도 독자가 시적 문맥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시적 기교를 발휘했다.”
‘집단 창작’도 이뤄졌다. 5월25일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 운집한 시민들은 저마다 종이에 생각을 적었고, 이것들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었다. “(…) 계엄군은 로보트고, 민주 시민 자유롭네/ 계엄군은 다급하고, 민주 시민 여유 있네/ 계엄군은 강도 정부, 민주 시민 인정 많네”(‘계엄군과 광주 시민’ 끝부분)
이 책의 지은이는 서른한 살 청년 학인이다(성균관대 대학원 박사과정). “더욱 정밀한 시각에서 광주민중항쟁을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문화구조와 의미망을 세밀하게 살피고 규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광주는 민주다, 우리가 호명하는 한.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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