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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곡성’이 던진 미끼

찬양과 냉소 사이에서 300만 관객 끌어모은 <곡성>의 기괴함은 무엇인가… 모호함을 관객에게 떠넘기는 비범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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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23 14:56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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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구(곽도원)는 외지인과 맞서는 주체였다가 또 다른 외지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맹신과 불신 사이에서 의심하고 회의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당신이 영화를 보는 이유가 2시간짜리 안락한 유희에 있다면, 굳이 <곡성>을 볼 필요는 없다. 아니 보지 않는 편이 훨씬 옳다. 이 영화는 전혀 안락하지 않다. 물론 유희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영화가 300만 관객을 돌파한 지금까지 영화관 바깥에선 온갖 ‘유희’가 판치고 있다. ‘난장’ 수준의 영화 뜯어먹기가 전개되고 있다.

그 광경은 얼핏 한국 영화에 오랜만에 감독주의의 활력이 돌아온 듯 보이기도 한다. 호들갑이 영화 자체보다 훨씬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이례적인 상황. 불편하지만 즐겁기 때문일까. 애석하게도 온전히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곡성>을 매개로 벌어지는 이례적인 상황은 즐거움을 배가하기 위한 쾌락 행위라기보단 영화에 불과한 무엇이 이토록 모호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집단적 퍼즐 맞추기처럼 보인다. 상업영화 <곡성>은 확실히 어떤 ‘안전핀’들이 뽑힌 채 도착했다.

삼킬 것인가 끌려다닐 것인가

솔직히 말하면, 재능 있는 감독이 야심차게 파놓았을 덫에 걸려들고 싶지 않았다. 피칠갑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 영화에 대한 말들이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무성해졌을 때도, 애써 피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봤다. 그리고 물었다, 그 미끼를.

<곡성>은 성경 구절(누가복음 24장)을 깔고, 구니무라 준(외지인 역)이 미끼를 끼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피식 웃음마저 터져나오는 규범적인 ‘낚시질’인 셈이다. (구니무라 준을 낚시인으로 재전유한 패러디물이 차고 넘쳐난단 점에서 그 장면에 대한 감상은 보편적이었다고 확신한다.) 그 적나라한 의도를 알건 모르건 영화는 모두를 걸려들게 만든다. 그 자체는 충분히 비범한 재주다.

<추격자>(2008)와 <황해>(2010)를 통해, 분명히 예측 가능한데 이상하리만큼 통제되지 않는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나홍진 감독은 6년 만의 신작에서 훨씬 능란한 솜씨로 관객에게 ‘미끼’를 드리운다. 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이 미끼를 통째로 삼키겠는가. (이 단순한 미끼의 서사는 영화에서 수차례 변주, 반복되고 직접적으로 발화되기도 한다.)

성경 구절과 은유를 건너뛴 ‘직설’로 시작한 <곡성>은 말하자면, 범벅이다 싶을 정도의 ‘떡밥’을 그야말로 흩뿌린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부감을 색재현의 단순함으로 채워버린다. 영화는 종종 과잉을 견디지 못하고 어디론가 점프한다. 어떤 설명들은 아예 중간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공허하고 모호한 공포가 계속 이어지지만 압박적인 건 강렬한 캐릭터들의 존재감뿐이다. <곡성>이 찬양과 냉소 사이에서 널뛰기를 하고, 300만 관객을 돌파했음에도 여전히 해설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감독이 던져놓은 ‘미끼’를 덥석 물긴 했는데, 이게 헛헛하다. 끌려다니는 게 맞는지, 아예 삼켜버려야 하는지 찜찜한 탓이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미덕이자 성취라면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곡성>의 진짜 문제는 해석이 된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어떤 이들은 <곡성>이 특별히 더 말을 보탤 게 없는 영화라고 말한다. 기꺼이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상업영화로서 성공했다는 것 외에 별다르게 할 말이 없는 영화일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해석의 의미화 과정이 중요할 텐데 그건 여전히 답보 상태다. 해석을 하더라도 이 영화가 그래서 지금 여기에 도착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의 나약함 드러내기 위한 ‘피칠갑’?

<곡성>은 명료하지 않고, 해석된들 끝내 동의할 수 없는 구석이 다분한 ‘문제작’이다. <곡성>을 본 관객들은 일차적으로 ‘이해가 됐다’ ‘안 됐다’를 놓고 서로 다툰다. 그런 다툼이 오랜만이라 반갑고, 영화라는 장르의 산업화가 사실상 독점화로 치달은 이후 이례적 현상이라는 주목의 말은 많지만, 정작 왜 이 영화가 이해와 몰이해의 극단에서 펄럭이는지를 차분히 짚는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허무하겠지만, 이 영화는 많이 비어 있다. 영화평론가 김현민이 이미 지적했지만 ‘인과를 비틀어 반전을 도모하는 것이 추리서사의 오래된 관습’이란 점을 아주 넓게 인정하더라도 그렇다. 예컨대, 영화를 본 관객들은 외지인과 무명(천우희)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한다. 당연하다. 영화가 실제 그러하다. 영화의 거의 대부분에서 외지인은 분명 실체적인 악령이었다.

<곡성>의 전반부는 소문으로 떠도는 외지인에 대한 환상을 꽤 오래 그리고 자세하게 입증하는 방식으로 채워져 있다. 외지인은 타자에 대한 공포 그 자체이고, 잔인하고 충동적인 본성대로 움직이는 존재다. 무엇보다 익숙한 세계를 이질적으로 파멸시키는 절대자였다. 그 외지인을 타파하려던 주체인 종구(곽도원)는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또 다른 외지인 일광(황정민)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문제를 우회한다. 그 과정에서 정작 무명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고, 아무런 개입도 않는다. 주체와 타자의 대결은 싱겁게 소멸하고, 타자와 또 다른 타자 사이에서 종구는 계속 회의하고, 의심하고 끝내 대상화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인간적 나약함, 믿음과 의심에 관한 이야기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뭐랄까,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서 촌스러운 것”이다. 그 모든 피갑칠이 고작 ‘촌놈들’(인간들)을 원시화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라면 말이다. ‘간댕이가 쥐좆만 한’ 우리 모두는 굳이 그런 영적인 공포가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존재들이다. 그동안 무수히 반복적으로 입증돼온 그 나약함을 다시 말하기 위해 이렇게 과잉된 이미지들이 펼쳐진 것이라면 <곡성>은 그야말로 허무한 영화다.

무명은 누구고 일광은 누구 편이냐

무명(천우희)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설왕설래가 영화를 본 이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르다고 할 정도로, <곡성>은 영화 중반부 일광의 등장과 굿을 계기로 이야기를 급격히 꺾는다. 그 급격한 차원 이동을 재구조화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관객은 본격적인 ‘괴기’의 형상과 마주하게 된다. 순차적으로 보이지만 이야기를 건너뛰는 비약이다. 관객은 이전까지 주어진 조건에서 구성된 ‘진실’을 믿으며 영화의 호흡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곡성>은 점점 모호해진다.

결국, 끝내 <곡성>은 무명의 정체가 무엇인지, 일광은 당최 누구 편으로 등장한 것인지, 외지인은 왜 오락가락했는지를 그냥 그대로의 문제로 남겨둔 채, 끝맺는다. 역시, 성경의 수수께끼를 통해. 그건 이 영화가 오컬트 장르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용납될 수 있는 문제로 간과하기 어려운 결함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영화의 완성도가 결여됐거나 최소한 부족했기에 발생하는 필연적 흐릿함을 지금 우리는 애써 즐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흐릿함의 사후적 향유가 영화의 품질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그래서 ‘문제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못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도 놀라운 것인지 감독이 직접 영화를 설명한 인터뷰들까지 읽고 나면 더욱 석연찮다. 완성된 작품은 쏘아진 화살이다. 어디로 날아가 어떻게 꽂힐지는 늘 부정확한 문제고, 창작자는 거기 개입할 수 없다. 그리고 의도가 무엇이었건 아무 데나 꽂혀도 괜찮다. <곡성>의 화제성은 바로 그 의외성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그 만발한 여백을 스스로 지우고 있다. 궤적에 도취되어 바라봤지만, 끝내 이탈한 모양새의 영화에 대해 감독은 자꾸 꽂힌 자리를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

어떤 영화들은 감독이 낸 수수께끼를 푸는 것으로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한국 영화는 반전이라고 불리는 그 수수께끼가 영화의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 풍토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의 논의와는 별개로, 수수께끼가 그 자체로 정당하려면 최소한 질문과 보기는 정확해야 한다. 지문에 없거나 혹은 비틀어져 있는 ‘보기’를 맞추는 놀이가 발발하는 건 문제가 잘못됐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곡성>은 시각적 측면의 맵시에 비해 서사의 이음새가 상당히 이격한 영화다. 이를 완성도의 결여라고 써도 크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15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긴장을 극대화하는 압박적 화면이 쉴 새 없이 이어지지만, 정작 어떤 이야기들은 끊어져 있고, 균질하게 이해할 근거는 부족하다. <곡성>을 본 사람들의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은 주어진 정보만큼만 판단할 수 있는 관객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그 불충분함이 유도한 결과적 오독이다.

불충분함이 유도한 결과적 오독

누군가에게 <곡성>은 그 점괘를 낸 무당이 바라보는 산세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무명이 던지는 돌멩이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동시에 종구가 앉아 있는 의자에 관한 이야기여도 무방하다. 플롯에 확장성이 있단 뜻이 아니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외통의 경로에서 무엇을 말하건 출구를 찾을 순 없단 뜻이다. 애초 <곡성>의 제목은 구체적 지명을 호출하는 것이었다. 구체성이 그만큼 중요했단 얘기다. 그 구체성 위에 포개진, 상상력에 기반한 사건은 애석하게도 길을 잃었다.

그 많은 떡밥을 흩뿌렸지만, 관객은 인물들이 벌인 행동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지에만 골몰하고 있다. 이건, 격려받을 무엇이 아니다. <곡성>은 정말 ‘의심’과 ‘현혹’에 대한 이야기인가. 한쪽을 선택하지 않기 위해 애써 다른 한쪽을 뭉개버리며, 그 모호함을 관객에게 떠넘기는 영화는 아닌가. <곡성>이 왜 이토록 뜨거워야 하는지 그 현혹이야말로 몹시 쓰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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