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블랙은 돌아오지 못했다
관습적 키스와 시한부 인생 설정… 원작 순정만화 존중 않는 드라마들
등록 : 2016-05-03 20:55 수정 : 2016-05-08 08:09
<응답하라 1988>(tvN)에서 덕선(혜리)은 만화책을 잘 보지 않는다. 하이틴로맨스는 열렬히 읽지만, 순정만화는 김영숙의 <갈채>처럼 소품으로나 잠시 스쳐갈 뿐이다. 그 시절 대중문화를 꼼꼼하게 재현하기로 유명한 <응답하라> 시리즈가 1980년대부터 르네상스를 맞이한 순정만화를 크게 조명하지 않았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쌍문동이라는 배경에서 드러나는 <아기공룡 둘리>에 대한 헌사, 정환(류준열)을 비롯한 남자아이들이 해적판 <드래곤볼>을 열심히 읽는 장면 등 소년만화에 대한 재현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생각해보면 전작 <응답하라 1994>에서도 <슬램덩크> 같은 작품은 쓰레기(정우)가 열독하는 모습으로 비중 있게 소개된 반면, 이미라의 <인어공주를 위하여> 같은 인기 순정만화는 소품으로 비추는 데 그쳤다. 여성주의 대중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정만화는 여성들이 즐기는 장르라는 바로 그 이유로 아직도 충분히 복권되지 않은 듯하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그러한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최근에는 <굿바이 미스터 블랙>(MBC)을 보며 비슷한 아쉬움을 느낀다. 추억의 순정만화 팬이라면 제목만 들어도 설레지 않을 수 없는 전설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했지만, 두 작품의 공통점은 딱 그 제목만이다. 원작은 거장 황미나 작가가 1983년에 출간한 작품으로, ‘순정만화 최초의 블록버스터’라 불리기도 한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야기에 세포이 항쟁, 남북전쟁 등 굵직한 세계사적 사건들을 새겨넣은 대서사시로 순정만화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복수, 출생의 비밀, 원수와의 사랑 등 자극적인 갈등 요소도 종합선물세트처럼 모여 있으나, 순정만화 특유의 섬세한 연출미학과 심리 묘사가 단순한 자극을 넘어선 몰입을 이끌어낸다.
안타깝게도 드라마는 원작의 특징 가운데 외적 갈등 요소만을 끌어온데다 자극성을 더 배가했다. 악역의 악행은 더욱 악랄해졌고, 주인공 차지원(이진욱)에게는 몇 번이고 죽음에서 살아 돌아오는 불사조 설정에 그와 모순되는 시한부 설정까지 더해졌다. 차지원의 복수보다 악역들의 살해 시도와 미수의 반복이 큰 비중을 차지하느라 원작에서처럼 독자를 울리는 인물들의 우수와 내적 갈등은 끼어들 틈이 없다. 순정만화적 감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연출은 더 문제다. 멜로의 진전은 인물들의 감정 묘사가 아니라 ‘탈출 키스’ ‘수갑 키스’ ‘생수 키스’ 등 죽음의 위협 사이사이 관습처럼 배치된 스킨십을 통해서나 이뤄진다. 순정만화 장르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존중이 없는 관습적 연출이 낳은 참사다.
이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최근 <치즈 인 더 트랩>(tvN) 논란도 맥락은 유사하다. 동명 원작 웹툰은 남녀 주인공 캐릭터의 신선한 설정과 인물 간 권력관계의 현실적 묘사로 순정만화 장르 전통 안에서 새로운 공식을 보여줬다는 호평을 받았으나, 드라마는 진부한 삼각관계 로맨스에 그쳤다. 남다른 감수성으로 호평받아온 이윤정 감독이었음에도 연출에서는 원작 존중을 찾기 어려워 아쉬움의 목소리가 더 컸다. 그리하여 순정만화는 여전히 변방의 장르로 남아 있다. ‘미스터 블랙’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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