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가기 전에 읽어봅시다… 각계 전문가 10명이 뽑은 ‘올해 최고의 책’
겨울이 깊어갑니다. 따뜻한 방 안에서 한권의 좋은 책을 만나는 즐거움은 매서운 찬바람을 피하는 좋은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송년 기획으로 각계 전문가 10명에게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을 추천받았습니다. 그들의 감동이 독자들에게 해가 가기 전에 이어졌으면 합니다. 편집자
나뭇잎 한장에 담은 상상력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이경림 지음, 이룸(02-2648-1311) 펴냄, 8천원 시인들은 참 기발하기도 하지. 나도 시인이면서,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를 펼쳐 읽는 동안 내내 나는 간질거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끔은 길다란 이야기의 한 부분만 뚝 잘라서 옛다, 먹어라 하고 떡 주듯이 던져주고, 가끔은 벽에 진 얼룩을 손톱으로 긁어내어 그 아래 무늬를 들여다보듯이 오래고 질기게 세밀화를 그리는 이 복잡한 이야기의 숲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숨쉬게 해주는 새로운 공기다. 아직 우리의 덜 여문 허파가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신선한, 그래서 자꾸만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이 낯설고도 친숙한 이야기들. 이경림의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는 시잡지에 연재되었다가 ‘소설’로 묶여 나온 특이한 이력의 책이다. 이 책을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으로 추천하고자 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이 책의 출현은 90년대 소설의 방아쇠를 당긴 것으로 여겨지는 장정일의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가 야기한 조용한 혁명에 필적할 만한 형식의 혁명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문학이란 사유의 새로움 이전에 존재의 새로움에서 온다. 그리고 존재의 새로움은 그 존재를 담는 그릇인 문학의 형식이 갱신될 때 비로소 투명해진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존재들을 위하여 이미 존재하는 말과 사물의 견고한 결합을 풀어내어 새로운 통사구조를 만드는 일. 이 낯선 형식에다 출판사는 ‘나뭇잎 한장에 쓴 소설’이라는 사족을 달았다. ‘엽편소설’이라는 장르실험의 흐름을 타고서 시인의 내부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상상력이 말의 몸을 얻은 것이다. ‘나뭇잎만한’(엽편) ‘작은 이야기’(소설)라는 명명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이 정원에 살고 있는 말들의 특별함이라는 이유도 중요하다. 이 책을 앞에 두고 쩔쩔매는 독자들을 많이 본다. 이 말들에 저항하지 못할 만큼 매혹되면서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당혹감일 것이다. 그녀의 평이한 구문이 실제로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금방 이해하지 못한다. 때로 그것은 ‘없는’ 것이고 때로 그것은 ‘다른’ 것이다. 능청맞을 정도의 자연스러움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이미지들은 알고 보면 낯설다. 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의 방식,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이 운동이 되고 그 운동이 바로 생이 되는 이 특별함.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상상력이라고 하는 문학 본연의 도구, 그러나 한국시에서 오래 버림받았던 도구를 사용해야만 한다. 이 순결한 귀환이 나는 너무 좋다. 이 책을 독자는 하루에 한편씩만 읽어도 좋다. 마음대로 길을 덧대어 가고 싶은 대로 가보아도 좋다. 모처럼 만나는 상상의 자유로움을 만끽하시라. 노혜경/ 시인 일상성에 반기를 들다
손님
황석영 지음, 창작과비평사(02-718-0543) 펴냄, 7500원
<손님>은 올 한해 내가 읽었던 소설들 가운데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작품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 광기와 세계관, 역사와 초월과 같은 대립항들을 수시로 떠올리게 하면서, 문학을 통해 재현된 역사의 현장에 전율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와 마르크시즘, 전쟁과 민간인 학살과 같은 무거운 소재가 황석영이라는 한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생동감이 넘치는 갈등과 화해의 드라마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은 90년대 이후 우리 소설의 일상성에의 편식경향에 외로운 반기를 든 작품으로도 주목된다. 근래 들어 발표되고 있는 많은 작품들이 몇몇 예외에도 불구하고, ‘일상성’이나 ‘욕망’의 문제를 예리한 지성주의로 포착하기보다는, 소재의 확장이나 서사적 빈곤의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황석영의 <손님>이 보여준 강렬한 문제의식과 치열한 역사의식, 밀도 높은 서사 구성력은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손님>이 내게 주었던 감동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의 소설현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아쉬움을 피력하게 만든다. 그것은 황석영이나 박완서, 김원일 등 이른바 중견작가들의 정력적인 창작활동과 비교해볼 때, 발군의 작가적 역량을 보여주는 젊은 작가들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는 나의 판단 때문이다. 화제가 되는 작품은 많지만 감동에 이르게 하는 작품은 현격히 줄었고, 일상성과 욕망을 다루는 작품은 많지만 대개가 연애담이나 불륜담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공선옥의 <수수밭으로 오세요>와 같은 뛰어난 작품도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러한 현상은 우리 소설의 미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작가와 비평가들이 한번쯤 진지하게 숙고해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명원/ 문학평론가
가족, 그 섬뜩한 현실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이훈구 지음, 이야기(02-2642-5313) 펴냄, 8천원
올 가을 출간된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가 준 반향은 컸다. 일본이 자랑하는 독서가인 그는 더이상 문학류도 고전명저도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카시가 주목하는 책은 오늘 우리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다큐멘터리물들. 그의 책을 읽어보면 다소 튀는 듯한 그의 주장이 상당부분 납득된다.
지난 여름, 휴먼 다큐멘터리 한권을 울면서 읽었다. 연세대 이훈구 교수가 쓴 부모 토막살해범 이은석군에 대한 보고서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가 그것이다. 안정된 중산층 가정에서 별다른 결핍없이 자라나 명문대에 재학중이던 한 청년이 어떻게 해서 양친을, 그것도 상상할 수 없이 극악한 방법으로 살해하고 유기했는지 저자는 별다른 감정이입 없이 그려낸다.
외형은 번듯하지만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양순하게만 길러지고 영화, 인터넷, 컴퓨터 게임에 중독되어 현실과 환상의 착란을 일으킨 한 대학생의 삶이 과연 희귀한 별종에 해당되는지 저자는 되묻는다. 이성에 대한 동경으로 설레는 나이에 외모에 대한 ‘근거없는’ 열등감으로 공격적 성향을 키워온 내면의 이지러짐이 이은석만의 특이한 기질인지 저자는 또한 묻는다.
흉흉한 국제정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치권 스캔들도 좌시해선 안 된다. 연예·스포츠 화제도 흥미롭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것은 결국 개개인의 일상적 삶이 아닐까. 그 일상을 규정하고 배후에서 힘을 발휘하는 요소들이 광범위하게 이은석과 닮아 있다는 점을 이 책은 담담히 일깨워준다. 이 섬뜩한 현실보고가 어찌 심리학 교수만의 몫이겠는가.
김갑수/ 시인·방송인
‘팀워크’의 재발견
하이 파이브
켄 블랜차드 등 지음·조천제 등 옮김, 21세기북스(02-336-2100) 펴냄, 9천원
이 책은 딱딱한 전문서가 아니다. 오히려 어른을 상대로 하는 가벼운 소설과 비슷하다. 이 책의 저자는 <겅호> 등으로 유명한 켄 블랜차드와 셀든 보울즈이다. 책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앨런은 탁월한 성과를 내온 직장인이다. 구조조정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그에게, 어느날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그가 해고를 당한 것이다. 우연히 만난 신임 사장에게 해고의 이유를 물으니 더 기가 차다. 당신은 물론 탁월하다, 그렇지만 당신만 탁월할 뿐이다. 우리는 다 함께 탁월해질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다.
실의에 빠진 그는 자신의 아들이 선수로 뛰고 있는 아이스 하키 시합을 보러 간다. 우연치 않게 코치직을 수락하고, 자신에게 가장 부족했던 팀워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에 이른다. 우여곡절 끝에 앨런의 팀은 결국 준우승을 차지하고, 앨런은 자신을 해고시킨 회사에서 팀워크에 대해 강의한다. 사장을 포함, 전 직원으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다.
이 책을 추전하는 이유는 책을 읽는 도중 가슴에 와 닫는 문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현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None of us is as smart as all of us) 어찌 보면 당연히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실제 일할 때 이렇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스스로를 자각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책이다. 한 시간 만에 완독할 수 있다는 것도 즐거움이다.
신현암/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소유의 죽음, 신뢰의 죽음
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이희재 옮김, 민음사(02-515-2000) 펴냄, 1만5천원
기술 혁명은 제품의 수명을 단축시켜 ‘뜬구름처럼 덧없이 사라지게’ 만든다. 변화의 스피드는 꽤 오랜 동안의 보유를 전제로 하는 ‘소유’를 부담스럽게 만든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소유의 시대인 산업화 시대가 끝남으로써 자본주의는 새로운 접속의 시대로의 여정을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접속이란 비단 컴퓨터에 접속한다는 뜻이 아니다. 접속은 소유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사람들은 항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일시적으로 접속하려고 한다. 이것은 인터넷은 물론 주택, 자동차, 전자제품, 공장, 체인점 같은 다양한 실물영역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새롭고 포괄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업의 관심은 고객과 평생 지속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디지털이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 즉 ‘평생 동안의 상업적 관계’는 기업의 전략적 목표가 될 수는 있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커다란 부담을 주고 있다. 일상적 삶 속에 침투한 상업적 관계의 확산은 타인의 시간, 타인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애정조차 돈으로 살 수 있다고 가정한다. 게임과 오락을 돈으로 사듯 문화와 호의와 사랑을 돈으로 사는 사회 속에서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자본주의는 성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시장은 신뢰를 먹고사는 것이지 신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경제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가 좋은 경제를 만들어 낸다.
이 책은 세상이 만들어주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바탕으로만 가능했던 시장경제가 ‘신뢰를 만들어내는 샘물’이라 할 수 있는 문화적 영역까지 침투하여 ‘모든 관계를 돈의 관계’로 만들어감으로써 오히려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엄중히 따지고 든다. 심각한 위험을 내포한 사회로의 이행에 이의를 제기하고 다른 대안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이다.
구본형/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대표
추락하는 교양을 위하여
교양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인성기 등 옮김, 들녘(02-323-7366) 펴냄, 3만5천원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급기야 교양이 ‘죽은 개’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무리 사람의 품격을 높여주는 지식이더라도, 경제적 가치가 없으면 허섭스레기로 여기는 풍토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만시지탄이지만, 한없이 추락한 교양의 ‘주가’를 ‘반등세’로 끌어올린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교양>이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둔중한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그러나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설파한 날렵함도 겸비하고 있다.
760쪽이 넘은 이 두터운 책을, 그냥 재미삼아서라도 읽을 수 있는 것은, 지은이의 풍자정신 덕이다. 지은이는 우상숭배자들이 교양적 지식에 입혀놓았던 철갑을 뜯어내고, ‘거룩한 붉은 광택과 개념의 안개’를 걷어냈다. 혹여 풍자가 공격적이어서 부담스럽다면, 지은이가 매복해놓은 유머라는 게릴라를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면 된다. “예술의 거룩한 성전과 교양인들이 교통하는 것과 인문주의의 영속하는 가치들을 믿습니다. 영원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끝맺는 <교양의 신앙고백문>은 그 유머의 정점이다.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비유법에 있다. 내가 아는 것을, 그것을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비유법이라는 무기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 만약 광야에서 신을 만났다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무엇처럼 또는 무엇같이 생겼다거나, 그것은 무엇이었다고 말해야만 한다. 직유와 은유라는 양날의 칼을 얼마나 적절하게 쓰는가는 전적으로 지은이의 교양과 관련된 문제다. 프랑스의 정신을 설명하기 위해 지은이는 개선문에서 시작한 사통팔달의 거리를 예로 든다. “합리주의가 여기에서 태양같이 광휘를 사방으로 발산한다”는 것이다. 이쯤이면 고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양의 교양적 지식까지 아우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벗하며 읽을 만한 책을 만났다는 것은, 이 땅의 교양인들에게는 가뭄 끝에 만난 큰 비처럼 축복임에 틀림없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밥상 위에 혁명이 있다
소박한 밥상
헬렌 니어링 지음·공경희 옮김, 디자인하우스(02-2275-6151) 펴냄, 8500원
방 한쪽에선 스님들이 조용히 발우공양을 하고, 또다른 편에선 조폭들이 “형님, 많이 드십시오!” 하고 외치며 시끌벅적하게 밥을 먹는다. 영화 <달마야 놀자>의 한 장면이다. 밥상의 차이를 통해 두 조직의 질적 차이가 적나라하게 포착되는 순간인 셈이다. 어디 승려와 조폭들만 그렇겠는가? 흔한 말로 사는 게 ‘다 먹자고 하는 짓’이라면, 먹을거리야말로 삶의 출발이자 끝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보면, 정말 그렇다.
‘요리를 많이 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는 이 괴상한 ‘반요리책’은 조리는 적게, 재료는 단순하게, 시간은 짧게, 게다가 한술 더 떠 고기나 설탕, 인스턴트 식품같이 우리 식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을 모두 먹지 말라고 말한다. 그럼 대체 뭘 먹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자연이 차려놓은 향연을 맛보라!”고. 그래도 일생 동안 풍성하게 먹고도 남을 지경이라고.
그렇다고 이 책이 그저 결벽증에 빠진 채식주의자의 건강타령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 오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먹거리의 변환을 통해 삶의 배치를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선동하는 과격한 ‘프로파간다’다. 이를테면, 요리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본주의의 이윤체계와 근대적 질서의 허구를 가차없이 조롱하고 비트는 ‘반문??’, ‘반문명론’이라고나 할까. 요컨대, 건강한 먹을거리란 지배적 질서가 강요하는 삶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자 이미 구획된 경계를 넘어 타자를 향해, 동물을 향해, 우주를 향해 마음을 열어가는 길이 된다. 정말,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밥상 위에는 모든 것이 있다. “권력도, 자본도, 그리고 혁명까지도!”
고미숙/ 문학연구자
충돌론에서 교류론으로
씰크로드학
정수일 지음, 창작과비평사(02-718-0543) 펴냄, 4만3천원
씰크로드에 대한 나의 관심은 아마추어 수준의 것이어서 정수일 교수가 낸 <씰크로드학>이 어떤 학문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자격이 없다. 내가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21세기가 ‘문명충돌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헌팅턴류의 전망이 극히 위험하고 조잡스런 것이라 보기 때문에 이런 관점을 상쇄할 다른 시각의 대중화가 지금 이 시대에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수일씨의 <씰크로드학>은 문명충돌론을 문명의 교류론과 협상론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한다. 저자에 따르면 ‘씰크로드학’은 ‘씰크로드’ 그 자체에 대한 연구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문명교류학’이며, 문명들 사이의 교류는 접촉, 전파, 수용, 접변의 역사적 과정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충돌’은 이 통시적 교류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배워 알게 된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내가 알고 있는 씰크로드라는 것은 일반 통념대로 로마라는 서쪽 끝과 중국이라는 동쪽 끝 사이의 교류통로이다. 정 교수의 책은 이 통념을 수정하게 한다. 그에 따르면 씰크로드의 동쪽 끝은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이다. 둘째, 씰크로드는 동서 두 지역간의 단선적 통로이기보다는 전세계를 포괄하는 ‘환지구적 교류통로’이다. 북유럽과 북미, 아프리카까지도 이 교류통로에 포함된다. 이는 씰크로드를 전 지구적 교류의 틀 안에서 보게 하는 창의적이고 야심적인 관점이다. 셋째, 씰크로드학은 물질문명 요소들의 경제적 교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정신문명과 민족사 연구가 포함되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학제적으로 참여한다. 씰크로드가 인문-사회학적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은 인문학도인 내게는 적절하고 흥미로운 관점이며, 이 책이 대중적 독서물이 될 수 있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문학)
여성은 민족주의의 피해자?
위험한 여성-젠더와 한국의 민족주의
최정무·일레인 김 편저, 삼인(02-322-1845) 펴냄, 1만5천원
‘민족’을 성역화하려는 혹은 여전히 최종적 가치기준으로 설정하려는 무의식이 한국사회를 지배한다.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여전히 ‘위험’하다. 그 작업을 여성이, 그것도 해외에 사는 ‘교포’ 지식인들이 한다고? “서구 편향적이다” “배부른 소리다”라는 비난에 반쯤은 이미 노출되어 있다. ‘불온’한 이 작업은 영어로 이뤄졌고 이제서야 박은미씨에 의해 한국어로 표현되었다.
11명의 (여성)학자들은 민족주의가 갖는 억압성과 지배 성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해부한다. ‘종군위안부’로 불리는 일본군 성노예, 미 기지촌 여성, 매매춘 성 노동자, 일반 여성노동자, 민족적 서사에 기초한 영화와 소설, 그리고 다양한 층위의 한국 남성 등에 대한 미시적 분석을 통해 한국의 민족주의가 사실은 제국주의와 ‘공모’하여 여성을 억압하고 성 착취/지배를 지속시키는 ‘내부’의 구조를 은폐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서구 제국이 자신을 남성성으로 구축하고 비서구를 여성으로 타자화하듯이 식민지의 남성도 그러한 제국주의적 남성성을 내면화함으로써 ‘민족’을 방어하는 한편 식민지 여성을 억압한다. 식민지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분노를 여성에게 투사한다. 여성은 민족적 순교 혹은 수치의 상징으로 은유되면서 식민지 남성의 자존심을 자극하며(“아, 수난 받는 민족이여! 오욕의 역사여! 짓밟힌 우리의 누이여 어머니여!” 등등) 민족주의 회로는 다시 강화된다. ‘강간’을 민족 메타포로 사용하는 상투적인 기법! ‘성애화된 민족’, ‘성별화된 민족’은 바로 이런 논리를 개념화한다.
이 책은 식민주의-민족주의운동 속에서 생산된, 교묘한 차별과 배제의 한국형 메커니즘에 대한 해부학이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민족과 국민에서 철저히 제외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 여성은, 내 자의적인 생각에, 이제 민족국가 중심적 애국주의 이데올로기에 가장 덜 오염된 그리고 저항할 수 있는 대안 세력이 되었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당대비평 편집위원
유물론, 흐름의 사유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칼 마르크스 지음·고병권 옮김, 그린비(02-702-2717) 펴냄, 2만3천원
니체가 그랬다던가? 자신은 너무 일찍 왔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려면 10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그러나 니체만 그랬던 건 아니다. 스피노자는 400년을 기다려야 했고, 에피쿠로스는 거의 2500년을 기다려야 했으니까. 이점은 에피쿠로스에 대해 썼던 마르크스 또한 다르지 않은 듯하다. 마르크스 당대에는 출판에 실패했고, 나중에는 유명한 다른 저작들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으며, 변증법의 주문(呪文)으로 인해 그 안에서 작렬하던 새로운 유물론적 사유는 이해되지 못했다. 이 책을 중요하게 취급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마르크스에 대한 전기적 서술에서 그런 저작이 있다는 소문만을 들었을 뿐이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떠올렸던 것은 들뢰즈의 책 <의미의 논리>를 읽으면서였다. 거기서 그는 스토아주의자와 더불어 에피쿠로스의 중요성에 대해 반복하여 역설한다. 그리고 ‘클리나멘’(clinamen: 벗어나는 선) 내지 ‘편위’라는 말을 다시 접했던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책 <천의 고원>에서였다. 그리고 이 책을 보기까지 짧지 않은 기다림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클리나멘이란 개념을 통해 원자론은 이제 ‘원자론’이기를 그치게 된다는 역설을 정확하게 지적하여 보여준다. 거기서 이제 유물론은 고체적 사유가 아닌 액체적 사유, 흐름의 사유가 되며, 존재가 아닌 생성의 사유가 된다. ‘유물론’이길 그친 유물론? 번역자의 ‘해제’는 그걸 가리고 있는 헤겔적 단어들과 변증법적 껍데기들을, 마르크스 자신이 후일 명시적으로 깨고자 했던 것들을 걷어내준다. 이 책에 담겨 있는 클리나멘은, 이후 마르크스가 역사유물론이라는 형태로 유물론의 역사, 아니 철학의 역사에서 만들어낸 위대한 클리나멘을 충분히 예시하고 있다.
이진경/ 사회학자


이경림 지음, 이룸(02-2648-1311) 펴냄, 8천원 시인들은 참 기발하기도 하지. 나도 시인이면서,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를 펼쳐 읽는 동안 내내 나는 간질거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끔은 길다란 이야기의 한 부분만 뚝 잘라서 옛다, 먹어라 하고 떡 주듯이 던져주고, 가끔은 벽에 진 얼룩을 손톱으로 긁어내어 그 아래 무늬를 들여다보듯이 오래고 질기게 세밀화를 그리는 이 복잡한 이야기의 숲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숨쉬게 해주는 새로운 공기다. 아직 우리의 덜 여문 허파가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신선한, 그래서 자꾸만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이 낯설고도 친숙한 이야기들. 이경림의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는 시잡지에 연재되었다가 ‘소설’로 묶여 나온 특이한 이력의 책이다. 이 책을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으로 추천하고자 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이 책의 출현은 90년대 소설의 방아쇠를 당긴 것으로 여겨지는 장정일의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가 야기한 조용한 혁명에 필적할 만한 형식의 혁명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문학이란 사유의 새로움 이전에 존재의 새로움에서 온다. 그리고 존재의 새로움은 그 존재를 담는 그릇인 문학의 형식이 갱신될 때 비로소 투명해진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존재들을 위하여 이미 존재하는 말과 사물의 견고한 결합을 풀어내어 새로운 통사구조를 만드는 일. 이 낯선 형식에다 출판사는 ‘나뭇잎 한장에 쓴 소설’이라는 사족을 달았다. ‘엽편소설’이라는 장르실험의 흐름을 타고서 시인의 내부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상상력이 말의 몸을 얻은 것이다. ‘나뭇잎만한’(엽편) ‘작은 이야기’(소설)라는 명명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이 정원에 살고 있는 말들의 특별함이라는 이유도 중요하다. 이 책을 앞에 두고 쩔쩔매는 독자들을 많이 본다. 이 말들에 저항하지 못할 만큼 매혹되면서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당혹감일 것이다. 그녀의 평이한 구문이 실제로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금방 이해하지 못한다. 때로 그것은 ‘없는’ 것이고 때로 그것은 ‘다른’ 것이다. 능청맞을 정도의 자연스러움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이미지들은 알고 보면 낯설다. 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의 방식,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이 운동이 되고 그 운동이 바로 생이 되는 이 특별함.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상상력이라고 하는 문학 본연의 도구, 그러나 한국시에서 오래 버림받았던 도구를 사용해야만 한다. 이 순결한 귀환이 나는 너무 좋다. 이 책을 독자는 하루에 한편씩만 읽어도 좋다. 마음대로 길을 덧대어 가고 싶은 대로 가보아도 좋다. 모처럼 만나는 상상의 자유로움을 만끽하시라. 노혜경/ 시인 일상성에 반기를 들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칼 마르크스 지음·고병권 옮김, 그린비(02-702-2717) 펴냄, 2만3천원
니체가 그랬다던가? 자신은 너무 일찍 왔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려면 10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그러나 니체만 그랬던 건 아니다. 스피노자는 400년을 기다려야 했고, 에피쿠로스는 거의 2500년을 기다려야 했으니까. 이점은 에피쿠로스에 대해 썼던 마르크스 또한 다르지 않은 듯하다. 마르크스 당대에는 출판에 실패했고, 나중에는 유명한 다른 저작들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으며, 변증법의 주문(呪文)으로 인해 그 안에서 작렬하던 새로운 유물론적 사유는 이해되지 못했다. 이 책을 중요하게 취급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마르크스에 대한 전기적 서술에서 그런 저작이 있다는 소문만을 들었을 뿐이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떠올렸던 것은 들뢰즈의 책 <의미의 논리>를 읽으면서였다. 거기서 그는 스토아주의자와 더불어 에피쿠로스의 중요성에 대해 반복하여 역설한다. 그리고 ‘클리나멘’(clinamen: 벗어나는 선) 내지 ‘편위’라는 말을 다시 접했던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책 <천의 고원>에서였다. 그리고 이 책을 보기까지 짧지 않은 기다림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클리나멘이란 개념을 통해 원자론은 이제 ‘원자론’이기를 그치게 된다는 역설을 정확하게 지적하여 보여준다. 거기서 이제 유물론은 고체적 사유가 아닌 액체적 사유, 흐름의 사유가 되며, 존재가 아닌 생성의 사유가 된다. ‘유물론’이길 그친 유물론? 번역자의 ‘해제’는 그걸 가리고 있는 헤겔적 단어들과 변증법적 껍데기들을, 마르크스 자신이 후일 명시적으로 깨고자 했던 것들을 걷어내준다. 이 책에 담겨 있는 클리나멘은, 이후 마르크스가 역사유물론이라는 형태로 유물론의 역사, 아니 철학의 역사에서 만들어낸 위대한 클리나멘을 충분히 예시하고 있다.
이진경/ 사회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