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소설은 미완의 시대에 존재한다

324
등록 : 2000-08-30 00:00 수정 :

크게 작게

근대문학 비평사의 큰 고개 김윤식 교수, 그 부지런한, 끊임없는 비평의 과정

이런 사람이 있다. 하루에 적어도 10시간 이상 공부하고, 1년에 평균 3.7권씩 책을 내며, 27년 동안 100권 넘는 책을 쓴, 그런 학자다. 김윤식(64) 서울대 국문과 교수를 이야기할 때 국문학도들은 한숨을 짓는다. “근대문학 논문을 쓰려면 김 교수를 피해갈 수가 없다.” 안 건드린 주제가 없고, 다룬 주제마다 심도있는 저서를 남겼다는 얘기다.

지난달 <한국현대문학 비평사론>(서울대 출판부)에 이어 소설평론집 <초록빛 거짓말, 우리 소설의 정체>(문학사상사)가 출간됨으로써 그의 저서 수는 100권을 넘어섰다. 정확히 순수저술 101권, 편저 24권, 번역 5종, 감수 7종. 그러나 정작 그는 담담히 말한다. “우리나라 출판계가 관대해서 이렇게 많이 나온 거요. 100권이 무슨 큰 일인가, 한권 한권 쓰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

-문학사가이자 비평가가 된 계기는.

=대학교 들어오기 전까지는 소설가가 되려고 했지. 문학사가나 평론가가 되려고 안 했어요. 그런데 정작 와보니 학교는 학문하는 곳이지 시나 소설을 쓰는 곳이 아니야. 할 수 없이 학문을 할 수밖에.


-일본유학시 루카치를 접했을 때 지적 깨달음을 얻었다고 최근에 쓰셨는데요.

=1970년 일본에 근대문학을 공부하러 갔지요. 민족주의가 뭐냐, 라는 걸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사실 이 민족주의가 고약한 것이거든요. 민족주의의 단점은 왕따사상, 나 아닌 남을 배제하는 배제원리입니다. 민족주의의 좋은 점이 있다면 ‘우리 안에서는 평등하자’는 것이구요. 그때 루카치의 책을 읽고 민족주의보다 더 큰 틀이 있다, 그것은 인류라는 것이다 라는 점을 루카치를 읽고 깨달았지요.

-독서량에 대해서 소문이 많은데요.

=평론가로서, 나는 죽은 작품이 아니고 살아 있는 작품을 읽는 데 주력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동시대에 나와 함께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작품을 읽는단 말이지요. 한국에서 발표된 중·단편 중에서 안 읽은 것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초록빛 거짓말…>에서도 보이는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독자와 대화하는 듯한 문체,문학사가와 평론가 대화하는 문체 등 계속해서 새로운 문체를 시도하고 계신데, 그 이유는 뭔가요.

=내가 첫 번째로 쓴 저술이 카프문학에 관한 겁니다. 나는 카프를 최초의 진정한 근대문학으로 봅니다. 이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 이것이 근대다 이거지요. 주제 자체가 그 당시 사회에서 터부였지요. 당시 임화 사진을 직접 책에 넣기도 했고. 그래서 중앙정보부에 두번이나 불려갔고 서재도 다 뒤져지고 그랬어요. 그러다보니 나까지 무슨 지사인 양 착각한 것이 있지.

그런데 동구권, 러시아 무너지고 이제 어디로 가요? 전에 쓰던 그 스타일로 글을 쓸 수는 없다 말입니다. 사상이 바뀌었는데 문체는 그대로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그 문체 그대로 쓰는 것은 사기입니다.아도르노가 2차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딱딱한 문체를 더이상 쓰지 않았습니다. 독일에 돌아와서는 수필을 썼지요. 그래서 대화체를 개발한 것입니다.

-<초록빛 거짓말…>을 통해서 1998년 1월부터 99년 12월까지 월간 <문학사상>에 기고한 한국 현대소설 월평을 묶으셨는데요,최근 한국문학의 동향을 평가한다면.

=80년대 우리 문학의 명제는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라는 거였습니다. 일제, 국가폭력, 이데올로기 폭력 등에 대한 인간의 항거를 표현해온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를 넘어가면서 역사는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나왔지요. 원래는 코제브가 그런 말을 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는 끝났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계 상황이 이렇게 변하고 있을 때, 우리의 문학에서도 새로운 명제가 나왔습니다. 윤대녕이 <은어낚시통신>에서, ‘인간은 벌레다, 물고기다, 물풀이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체현했습니다. 결국 90년대 이후의 모든 소설이 “인간은 생물이다”라는 명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국문학을 연구하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한 가지입니다. 문학은 인간의 위엄을 표현하는 장르다. 그것을 드러내는 데 가장 기여한 세계문학의 한 갈래가 우리 문학이라는 겁니다.

-근대는 소설의 시대요, 그 이전은 서사시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그러면 다음 시대에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없어지는 일도 가능할는지요.

=루카치는 <문화사회학>에서 소설 출현 이전의 시대를 황금의 시대라 규정합니다. 즉, 본질적인 것, 신이 지상에 그대로 있는 시대입니다. 희랍신화를 보세요. 신들이 인간처럼 질투도 하고 사랑도 하면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지요.이 서사시의 시대에는 시간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지상을 떠나면서, 즉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시간이 개입합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망가뜨립니다. 모든 것이 낯설어집니다. 소외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때 만들어진 서사양식이 소설입니다. 그래서 모든 소설의 주인공은 자기와 사회간에 갈등을 겪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냐”를 찾기 위해서 떠납니다. 그러나 방황하여 보아도 세계가 썩었기 때문에 자기를 찾을 수 없어서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소설의 끝입니다. 이 대표적인 작품이 <말테의 수기> 아닙니까?

그러므로 소설을 연구한다는 것은 근대, 즉 인류사를 연구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유토피아가 도래한다면 소설 아닌 다른 장르가 생기겠지요. 새로운 시대가 온다면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듯이, 패러다임이 바뀌겠지요. 그러나 유토피아가 도래할 때까지는 소설은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면 소설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까요.

=김지하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감옥에 있었을 때 독방에 먼지가 날아와서 더깨가 지더라, 거기에 민들레 씨앗이 날아와서 싹이 나오더라는 겁니다. 김지하는 거기서 ‘생명사상’을 보았다고 하는데 나는 이렇게 봤습니다. 문학이 살아남는다면 이런 식으로 살아남을 거다, 도시의 시멘트 바닥에 먼지가 고여서 식물이 돋듯이. 이것을 성기완 시인은 ‘식물적 상상력’이라고 표현했지요.

(사진/“나같은 외곬으로 사는 게 바람직한 건 아니죠”지금도 하루에 10시간이상 공부하고 100권이 넘는 책을 펴낸 김윤식교수는 한국근대문학 비평 연구에서 피해갈 수 없는 언덕이다)
-비평가란 어떤 사람입니까.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비평가란 공동묘지지기지요. (책을 가리키면서) 이게 다 죽은 사람들 아닙니까? 시체에게 몸을 빌려주는 것이지요. 도서관에 앉아서 죽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르트르는, 난 그거 안 한다, 참여해야 한다 했습니다. 남들 운동하고, 학생들이 몸에 기름붓고 불붙이고 떨어지는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게 뭐 대단합니까.

-후학들이 공부를 안 한다, 그런 생각 않으십니까.

=그렇지도 않아요. 많이들 하고 있고. 나같이 사는 게 뭐 그렇게 바람직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 살다보면 사람 사귀는 데도 힘을 들이고, 공부에도 힘을 들이고 해야 하는데 외곬으로 살았으니까. 내 보기엔 사람이 일생 동안 한 열권 정도 책을 쓰고 열명 정도의 사람에게 투자하면 좋은 거 같아. 다시 살라면 나는 이렇게 살지 않을 겁니다.

정년을 1년 앞둔 이 노대가는 현재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에 대해 집필중이다. 다시 살라면 이렇게 살지 않겠다면서도, “나는 머리가 좋은 사람도 아니고, 그냥 많이 읽고 많이 썼을 뿐이지요. 많이 쓰다보면 좋은 글이 나옵니다”라며 책상으로 다가 앉는 김 교수의 몸짓은, 세상에 이렇게 즐거운 일이 없다는 듯이 다급해보였다.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