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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광주에서 길 잃은 작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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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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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찬 프로그램에도 불구, 관객들에게 지나친 냉대 받은 광주영화제

사진/ 한편 한편 선정에 정성이 담긴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광주국제영상축제는 미디어와 관객으로부터 지나친 냉대를 받았다.(씨네21 정진환 기자)
제1회 광주국제영상축제 개막 바로 다음날인 지난 12월8일의 광주시 충장로 극장가. 토요일이어서 사람들은 붐볐지만, 대부분이 영화제와는 무관해 보였다. 광주극장, 씨네씨티, 무등극장 등 영화제 출품작을 트는 극장 앞은 한산했다. 복합관인 제일시네마에는 일반 영화 <화산고> 상영관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선 반면 영화제에 나온 단편영화들을 트는 5관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극장 앞에 쌓아둔 영화제 팸플릿이 좀처럼 줄지를 않았다. 300∼400석짜리 극장에 평균관객이 30∼40명 남짓이었고, 그중에서도 게스트나 취재진을 빼고 표를 사서 들어온 일반 관객은 10명가량에 불과했다. 평균 좌석점유율이 70%에 이르는 부산국제영화제와 대조적이다. 7일의 개막식날 로랑 캉테 감독의 <시간의 사용>을 상영할 때는 좌석이 남아돌아 시민들을 무료입장시켜 겨우 채우기도 했다.

놓치기 아까운 영화 수두룩

일반인 빼고 국내 영화관계자들의 호응도 저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초청된 인사들의 상당수가 내려오질 않아 영화제쪽에서 발급해주는 아이디카드가 창구에 잔뜩 쌓여 있었다. 국내 다른 영화제에서는 부천판타스틱영화제의 김홍준 집행위원장만 모습을 보였고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쪽에서는 아무도 오질 않았다. 언론도 마찬가지여서 기자가 출장온 곳은 중앙일간지 2개와 영화전문지 2개에 불과했다. 부산, 부천, 전주 등 국제영화제가 이미 3개나 되는데 또 무슨 국제영화제냐는 반응이 있었고, 행사 준비기간이 짧아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이 있지만 그래도 이건 지나친 냉대다.


상영작 140편(장편 50여편) 가운데 로랑 캉테, 알랭 기로디 등 영화계에 새로운 사실주의적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는 프랑스의 신예감독과 일본의 스와 노부히로, 포르투칼의 페드로 코스타 등 개성 강한 작가들의 최근작들은 국내 다른 영화제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창설자 앙리 랑글루아를 다룬 다큐멘터리, 장 마리 스트라우브나 장 비고의 고전들도 영화 애호가라면 놓치기 아까운 작품들이다. 필름으로 보기 힘든 미조구치 겐지, 이마무라 쇼헤이 등의 영화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상당한 매력이었다. 영화제를 찾아온 로랑 캉테는 “소규모 영화제치고 이렇게 프로그램이 알찬 영화제는 처음 봤다”면서, 준비부족으로 영문 번역이 실리지조차 않은 영화제 팸플릿을 가지고 열심히 다른 영화들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워낙 영화제가 한산하다보니 광주지역 지방 언론은 “혈세 2억5천만원을 이렇게 낭비해도 되느냐”며 영화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호응도만 놓고보면 이 지적이 타당할 수 있지만, 예산 3억원(중앙정부 지원 2억, 광주시 예산 5천만원, 기타 협찬 5천만원)으로 이 정도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는 건 높이 사줄 일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예산 25억원에 세계 각국의 최근 장편들을 두배 반 정도 가져왔다. 그러나 서구영화들은 대다수가 칸이나 베를린, 베니스 등 국제영화제 수상작들을 그대로 가져왔고, 부산영화제의 강점인 아시아영화의 경우도 올해 아시아에 이렇다 할 문제작이 없었던 탓에 부산국제영화제만의 자기 맛을 찾기가 힘들었다. 부산영화제가 영화의 백화점처럼 되면서 영화제의 자기 특성이나 프로그래머의 시각을 확인하기 힘들어지는 듯한 안이함을 보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한편 한편 선정에 정성이 담긴 광주영화제의 프로그램은 확실히 돋보인다.

한국 영화에는 관객 몰려

뜨악하던 광주 시민들은 <고양이를 부탁해> <와이키키 브라더스> <나쁜 남자> <이것이 법이다> 등 영화제 막판에 상영된 한국 장편극영화 4편에는 상당한 호응을 보였다. 편당 관객이 400명을 넘었고, 폐막작인 <이것이 법이다>는 완전 매진됐다. 여기에 힘입어 광주영상축제의 유료관객은 가까스로 2천명을 넘었다. 일본의 거장과 유럽 작가주의 감독에 치중한 프로그램이 너무 ‘고급스러워’ 시민들이 거리감을 가졌을 수 있지만, 국내 언론이나 영화계가 이번 영화제를 이처럼 무관심하게 대한 건 납득하기 힘든 면이 있다. 광주국제영상축제 염정호 사무국장은 “내년에는 시민들과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프로그램을 보강하고, 준비기간도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임범 기자/ 한겨레 문화부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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